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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50화 (5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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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가…….’

로제는 제 눈을 의심하며 고개를 저었다. 괜히 얼굴이 뜨끈뜨끈 달아올랐다. 그 순간, 상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런 의미에서, 이 귀여운 따님한테 강아지를 한 마리 선물하는 건 어떠신지.”

“……흠.”

헤이번은 상인을 쳐다보다가 플리타를 보았다. 플리타가 하얀 강아지를 품에 안은 채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슬그머니 강아지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꼭 강아지를 갖고 싶은 건 아닌데…….”

“강아지는 그냥 물건이 아니다, 플리타.”

헤이번이 아이를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플리타가 강아지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에도 미련을 못 버리고 그 자그마한 몸을 쓰다듬다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 생명이야.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아.”

“…….”

“누군가의 삶을, 그게 비록 한낱 짐승이라 할지라도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럴 수 있겠니?”

헤이번은 진지하게 플리타를 향해 물었다. 로제가 달아올랐던 뺨의 열기를 식히며 그를 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대공 저에 어울리지 않는 잡종이라 안 된다거나, 반대로 너무 쉽게 강아지를 사 준다거나 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믿음이 갔다. 그는 아이에게 생명의 무게를 알려주고 있는 중이었다.

아버지로서.

어린 자식에게.

“네가 그 작은 녀석의 가족이 되고, 친구가 되어줘야 한다는 거다. 심심할 때 같이 놀다가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그 녀석의 일상을 책임지고 아플 때는 돌봐 줘야 하고…….”

흐뭇하게 미소 짓던 로제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그 변화를 알 리 없는 헤이번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또한 개는 사람보다 수명이 짧으니 그 녀석의 죽음마저도 함께해 주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럴 각오가 되어 있다면 사 주마.”

눈물이 핑 돌았다. 로제는 더 이상 헤이번과 플리타를 지켜보지 못하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땅바닥에 방울방울 눈물 자국이 생겼다. 그러던 중에 플리타가 곰곰이 고민하다가 대답하는 게 들렸다.

“그럴게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예. 제가 하양이를 책임질게요.”

로제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플리타를 보았다.

플리타가 단단히 마음먹은 듯 입술을 앙다문 채 다시금 강아지를 품에 안고 제 아비를 보고 있었다. 아이를 보던 로제의 시선이 이번에는 헤이번에게로 옮겨갔다. 그 역시 진지한 시선으로 자신의 아이를 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헤이번이 피식 웃더니 흔쾌히 허락했다.

“그래, 좋다. 사 주마.”

“와아!”

플리타가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품에 안은 강아지의 보들보들한 털에 제 뺨을 비벼댔다. 그 모습을 보던 헤이번이 직접 상인과 계산을 마쳤다.

상인이 아이와 그를 번갈아 보다가 허헛,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외모만 훤칠하게 잘생기신 분인 줄 알았는데 아주 대단하십니다! 아빠가 따님 교육까지 확실히 하시네. 부인께서 남편 복이 많으신가 봐요.”

상인이 농담조로 건넨 말에 로제가 얼굴을 붉히며 어색하게 웃었다. 딱히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할 수도, 아니라고 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하양아, 이제 우리 같이 집에 가자!”

플리타가 강아지를 품에 꼭 끌어안은 채 신나서 외쳤다. 그러더니 문득 생각난 듯 로제를 돌아보았다.

“근데 엄……. 아니, 로제.”

로제에게 다가간 플리타는 엄마라 부르려다가 호칭을 고치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쉬운 마음을 접고 본래 하려던 말을 꺼냈다.

“유모가 하양이를 보면 싫어할까?”

“아…….”

로제는 그제야 유모를 떠올렸다.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유모가 어떻게 나올지 눈앞에 선명히 그릴 수 있었다. 가뜩이나 플리타에게 천한 피 운운하던 사람이니 개의 혈통을 따지며 아이에게 상처가 될 말을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로제와 플리타가 동시에 흐린 표정을 짓던 순간이었다. 값을 치르고 온 헤이번이 무심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딸이 키우고자 하는 개를 한낱 고용인에 불과한 이가 뭐라 할 수는 없지.”

“……예?”

“플리타, 너는 내 딸이다. 헤이번 괸터스의 하나뿐인 딸.”

헤이번은 플리타를 향해 단언하듯 말했다. 플리타가 강아지를 안은 채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연한 이야기를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울컥한 듯 아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개를 키우든, 다른 무엇을 하든, 그건 전적으로 네 스스로 결정할 일이다. 어느 누구도 네 결정에 간섭해서는 안 돼. 그렇게 놔두어서도 안 되고. 알겠니?”

“……어, 으음. 네에.”

플리타가 머뭇거리다가 작게 대답한 뒤, 강아지의 머리통에 제 코끝을 비볐다. 아이의 얼굴과 귀가 새빨개진 게 헤이번뿐만 아니라 로제의 눈에도 들어왔다.

헤이번이 그런 아이의 머리를 아주 살짝 쓰다듬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플리타가 깜짝 놀라 강아지를 안고 있던 한 손을 들어 제 머리를 만져 보았다.

그의 손길이 지나간 자리를 느끼려는 듯.

제 아비의 체온을 다시 한번 느껴 보고 싶은 듯.

“멍멍!”

바로 그 순간이었다. 플리타에게 안겨 있던 강아지가 버둥거리다가 아래로 떨어진 것은.

“앗! 하양아!”

아무리 작은 강아지라 할지라도 어린아이의 짧은 팔로 안기에는 무리였다. 더구나 두 팔이 아닌, 한 팔로 안는 것은 더욱 그랬다. 어쨌든 그 바람에 놓쳐버린 강아지는 아이가 부르는데도 불구하고 냉큼 앞으로 달려 나갔다.

“하양아! 거기 서!”

플리타가 덩달아 강아지의 뒤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헤이번과 로제가 그런 아이를 잡으려는 순간, 아이의 앞에 한 소년이 다가오다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공녀님!”

“플리타!”

로제와 헤이번이 깜짝 놀라 플리타를 불렀다. 플리타는 강아지를 향해 뛰다가 제 앞에 쓰러진 소년을 보고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하지만 아이는 우는 대신, 소년을 향해 엉금엉금 다가갔다.

“괘, 괜찮아?”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만큼 소년의 상태가 나빠 보였기 때문이다.

플리타보다 예닐곱 살 정도 많아 보이는 소년은 일어나지 못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덜덜 떨고 있었다.

플리타가 그 소년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화들짝 놀라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헤이번이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 아빠?”

“다친 데는 없느냐? 갑자기 그렇게 뛰어가면 어떡해! 그러다가 길이라도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헤이번은 진심으로 놀란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가 그런 아비의 모습에 당황했는지 눈을 깜빡이다, 연녹색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로제가 다가와 헤이번을 만류했다.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전하. 공녀님께서 일부러 그러신 것도 아니고…….”

“사소한 실수가 평생 두고두고 후회할 일을 만들 수도 있는 법이지.”

헤이번은 로제의 말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엄하게 나무랐다. 아마도 소년이 신음을 내뱉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계속 그랬을 것이다.

“흐으윽, 윽.”

“참! 얘, 괜찮니?”

로제는 그제야 소년의 존재를 깨닫고 황급히 몸을 돌렸다. 헤이번 역시 소년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열이 굉장히 높아요, 전하. 그래서 의식이 혼미한 것 같은데…….”

로제가 소년의 이마에 손을 대 보고는 깜짝 놀라 헤이번을 향해 말했다. 헤이번이 미간을 좁히더니 플리타를 다시 내려놓고는 소년을 향해 다가갔다. 그사이에 멀리 달아난 줄 알았던 강아지는 제 어린 주인에게로 돌아와 눈치 없이 꼬리를 흔들며 주변을 맴돌았다.

“……쯧, 그렇군.”

헤이번이 한쪽 무릎을 꿇고 소년의 상태를 세심히 살폈다. 제 아이가 엉덩방아를 찧은 것을 보고 놀란 바람에 소년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걸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터라 그의 얼굴 위에 죄책감이 스쳤다.

“이 오빠 많이 아픈 거 같은데……. 이마가 무진장 뜨거웠어, 로제.”

울먹이던 플리타가 강아지를 데리고 다가와 입을 열었다. 그러더니 헤이번과 로제의 사이에 쪼그려 앉아 소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오빠, 일어나 봐. 내 목소리 들려?”

플리타가 낑낑대며 소년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소년은 신음을 뱉다가 갑자기 몸을 구부리더니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안 되겠다. 내가 이 녀석을 업도록 하지. ……페드윈 경.”

헤이번은 눈을 찡그리고는 서둘러 소년을 등에 업었다. 그러고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제 호위 기사를 불렀다. 그러자 지금껏 근처에 있는지도 몰랐던 페드윈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로제와 플리타가 갑자기 나타난 페드윈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페드윈은 아무렇지 않게 헤이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예, 전하.”

“근처에 치료사가 있는지 알아보게. 이 녀석을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해야겠어.”

그의 명령에 페드윈이 냉큼 몸을 돌렸다.

* * *

“그러니까 이 골목에서 왼쪽으로…….”

페드윈은 자신이 알아낸 치료사의 집으로 안내를 했다. 헤이번의 등에 업혀 있던 소년은 페드윈과 함께 호위를 위하여 따라온 다른 기사에게 업힌 상태였다.

그리고 헤이번과 로제, 플리타는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치료사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설마…….’

로제는 낯익은 골목 풍경에 입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어제 자신이 찾아갔던 치료사의 집이 바로 이 근처였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우연이란 게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의 우연이 생기지는 않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그렇게 믿는 게 무색할 정도로 로제의 얼굴 위로 불안한 빛이 점차 짙어졌다.

“아! 저곳이 치료사의 집인가 봅니다.”

바로 그때, 페드윈이 긴가민가하며 길을 안내하다가 이내 확신한 듯 자신만만하게 어느 집을 가리켰다. 그와 동시에 로제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자신이 어제 다녀간, 바로 그 치료사의 집이었다.

‘하필이면.’

아니, 영지 내에 치료사가 그렇게 많지는 않을 테니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그래도 하필이면, 왜.’

로제는 자꾸만 입속에서 맴도는 말을 억지로 삼켰다. 그녀의 불안을 알지 못하는 페드윈은 태연히 그 집 앞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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