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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추궁하려는 게 아니야. ……보아하니 디저트 가게에 다녀온 것 같은데.”
헤이번의 시선이 뒤늦게 로제의 손에 들린 상자에 닿았다. 상자 겉면에 그려진 앙증맞은 케이크 그림에 모든 의문이 풀렸다. 물론 왜 굳이 디저트 가게에 가면서 저런 수상한 차림새를 했는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말이다.
“플리타에게 가 보도록. 아이가 기다릴 테니.”
아마도 플리타에게 디저트를 사다 주려고 외출했던 모양이라고, 헤이번은 나름대로 추측하며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로제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계단을 오르려 했다.
헤이번 역시 본래 가던 대로 계단을 내려가려던 중에 문득 뭔가가 거슬려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로제를 불러 세웠다.
“로제.”
로제가 계단을 오르려다가 그의 부름에 다시금 돌아섰다. 그 얼굴을 가만히 살피던 헤이번이 미간을 모은 채 말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주치의라도 불러 줄까?”
“예? 아, 아닙니다.”
“몸이 안 좋으면 바로 치료를 하는 게 좋아. 방에 가서 있도록 해. 내가 지금 바로 주치의에게 가 보라고 할 테니까.”
“아니요!”
로제는 헤이번의 말에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부녀가 똑같이 주치의를 불러 주겠다고 한 것에 둘이 닮았다며 재미를 느낄 여유가 없었다. 하녀가 감히 대공 저의 주치의에게 진료를 보는 일만큼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약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좀 나아졌고요.”
“약?”
“예, 사실은 조금 전에 외출하여…….”
로제가 난처한 듯한 표정으로 대답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헤이번은 그제야 로제의 진짜 외출 목적을 알고는 혀를 찼다. 그게 뭐 그렇게 감출 일이라고 그랬나 싶어 기가 막히기까지 했다.
“어디가 어떻게 아팠던 거지?”
“그냥, 어, 소화가 좀 안 되어서요.”
벌써 세 사람에게 같은 거짓말을 했다. 플리타, 백작 저의 하녀, 그리고 헤이번. 로제는 이러다가 거짓말쟁이가 되겠단 생각에 쓴웃음을 삼켰다.
“그런 거면 굳이 밖에 나가지 않아도…….”
헤이번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을 찡그리며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들린 디저트 상자에 다시금 닿았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로제가 어색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되었네. 플리타에게 가 봐. 아이가 많이 좋아하겠군.”
그는 피식 웃은 뒤, 몸을 돌렸다. 로제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플리타에게 디저트를 사다 주느라 외출해서 겸사겸사 의원에 들렀다고 여긴 듯했다.
“……다행이야.”
그녀는 거듭 안도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문득 뭔가를 떠올리고는 얼굴을 붉혔다. 조금 전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질 뻔한 저를 구해준 그를 떠올린 탓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 허리를 감아 안았던 그의 단단한 팔과 그에게서 생생히 전해졌던 심장 박동 소리라 해야겠지만 말이다.
「로제.」
다정히 자신을 안아주며 부드럽게, 때로는 열기를 품고 저를 부르던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로제는 코끝이 찡해지는 걸 느끼며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당신, 정말 예뻐.」
제 뺨을 손등으로 쓸어내리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던 예전의 그가 생각났다.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열꽃이 피어나듯 붉어졌던 제 몸도, 그의 손이 지나가는 곳마다 감각이 살아나는 것만 같던 날의 기억도.
기억은 생생한데, 사람은 사라졌다.
로제는 계단을 다 오르고 나서 뒤를 돌아보았다. 헤이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이미 계단을 내려갔을 테니 당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시선은 그의 잔영이라도 좇으려는 듯 한참 동안 계단 중간 어딘가를 헤맸다.
* * *
“와아! 로제, 저거 봐! 저기, 강아지!”
플리타는 로제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걷다가 강아지를 파는 상인을 발견하고는 곧장 그녀를 잡아끌었다. 로제가 그런 아이를 못 이기겠다는 듯 웃으며 아이를 따라 걸음을 옮기다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는데, 헤이번이 어색한 표정으로 그들의 뒤를 따라오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아빠, 빨리요! 빨리!”
그 순간, 플리타가 그를 부르며 재촉을 해, 헤이번은 로제에게서 시선을 거둔 뒤,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플리타가 관심을 보인 곳에서는 노점상이 갓 태어난 강아지를 팔고 있었다.
그 혈통을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잡종 강아지.
그렇기에 귀족들이나 부유한 평민들이라면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강아지가 고작 푼돈 몇 푼에 팔리고 있는 중이었다.
“우와, 귀엽다아아.”
플리타는 강아지 앞에 쪼그려 앉아 턱을 괸 채 감탄했다. 그때, 눈도 채 뜨지 못한 강아지 한 마리가 아장아장 다가와 아이를 향해 킁킁, 코를 들이밀었다.
“어, 우웅……. 만져 봐도 돼요?”
강아지의 까만 코가 손끝에 닿을 듯 말 듯 다가오자 플리타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가 조심스럽게 상인에게 물었다. 그러자 상인이 호탕하게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꼬마 아가씨. 요 녀석이 아가씨가 마음에 들었나 보네. 한번 쓰다듬어 보려무나.”
상인은 플리타에게 거듭 강아지를 쓰다듬어 보라며 권유하고는 아이가 입고 있는 옷을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리고 아이의 부모라 생각되는 두 남녀, 헤이번과 로제를 힐끔 본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축제를 즐기러 나온 부유한 평민 가족임이 틀림없었다. 평소라면 시선을 주지 않았을 잡종 강아지이지만, 아이가 이렇듯 관심을 보이니 충동적으로 살 수도 있는, 그런 부유한 가족 말이다.
‘고귀하신 귀족 나리들보다는 오히려 이런 쪽을 공략해야지.’
아무리 축제라 하더라도 귀족들이 이렇듯 길가에서 잡종 강아지를 구경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상인은 한 마리라도 팔아야겠다는 일념하에 더욱 적극적으로 말을 이었다.
“거기, 아빠랑 엄마도 가까이 와서 좀 봐요. 따님이 강아지를 엄청 예뻐하는데.”
“……!”
뒤편에 서서 플리타가 강아지와 노는 걸 흐뭇하게 보던 헤이번과 로제가 동시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건 플리타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강아지가 손끝을 핥도록 내버려두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들 왜 그렇게 놀라요? 우리 꼬마 아가씨까지. 혹시 아빠랑 엄마가 아니니?”
상인은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나 싶어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다가 플리타에게 물었다. 플리타가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뒤쪽을 힐끔 보더니 다시 상인을 향해 고개를 힘차게 저으며 말했다.
“아빠랑 엄마 맞아요! 우리 아빠, ……그리고 우리 엄마예요!”
“역시 그렇지? 딱 봐도 알겠더라. 아주 쏙 빼닮았어. 특히 엄마가 미인이라 그런지 우리 꼬마 아가씨도 아주 예쁘게 생겼어.”
상인이 하하, 하고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플리타 역시 까르르 웃으며 고개를 재차 끄덕였다.
“응, 나 우리 엄마 닮아서 예뻐요.”
“고…….”
그 모습을 보던 로제가 당황하여 플리타를 부르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헤이번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녀가 깜짝 놀라 헤이번을 돌아보자 그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러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플리타가 엄마 없는 걸 드러내기 싫은가 본데……. 그냥 내버려두지.”
“하, 하지만 전…….”
“여기서 설마 ‘전하’라 부를 건가? 금세 난리가 날 텐데?”
헤이번이 피식 웃더니 주변에서 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로 물었다. 로제는 그를 부르려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지금 이곳에서 전하, 공녀, 운운하였다가는 난리가 날 터였다. 그것을 방지하고 편하게 축제를 즐기기 위하여 옷차림 역시 신경 써서 평민처럼 입고 나오지 않았던가.
부유해 보이기는 할지언정, 귀족처럼 보이지는 않게.
그저 돈 잘 쓰는, 그런 부유한 평민 가족처럼.
“로, 엄마! 엄마도 이리 와 봐!”
플리타가 강아지를 구경하다가 로제를 향해 손짓을 했다. 처음에는 그녀를 로제라 부를 뻔했지만, 냉큼 엄마라 바꿔 부르고는 해맑게 웃었다.
‘엄마’라…….
로제는 저도 모르게 가슴속이 욱신거려 옷 앞섶을 꽉 움켜잡았다. 결코 들을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엄마’란 호칭을, 아이의 입을 통하여 직접 들었다.
“로제, 왜 그러지?”
“아니요. 그냥…….”
로제가 먹먹한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자 헤이번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로제는 서둘러 고개를 흔든 뒤, 아이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엄마, 이 강아지 귀엽지?”
“그러게요……. 아니, 그러게.”
로제는 무심코 존대를 하다가 말투를 고쳤다. 다행히 상인은 강아지를 팔 생각에 그녀의 말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아빠도 이리 와 봐요. 하이고, 어쩜 이렇게 세 식구가 다 인물들이 훤할까. 내가 이곳에서 장사한 지 오래되었는데 이렇게 잘 어울리는 가족은 처음 보네요. 여기 분들 아니지요?”
“음…….”
“예, 축제가 열린다고 해서 일부러 왔어요.”
헤이번이 느닷없는 질문에 당황하여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로제가 서둘러 대답했다. 상인이 그런 그녀를 보다가 헤이번을 다시 쳐다보더니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부인이랑 따님이 이렇게 사랑스러우니 무엇인들 못 해 주겠어요. 안 그래요?”
“……뭐, 흐흠.”
헤이번은 상인의 말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 모습에 상인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하하하! 남편분이 의외로 수줍음을 타시네. 나 같으면 세상 곳곳, 동네방네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닐 텐데 말이에요. 나처럼 곱고 아름다운 부인 있는 사내 나와 봐라! 나처럼 귀엽고 예쁜 딸 있는 사람 나와 봐라! 하고 말이죠.”
“아, 아니…….”
상인의 호들갑에 로제마저 당황하여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슴속 한구석이 간지러웠다.
‘헤이번은 기분 나쁠지도 모르는데…….’
한낱 하녀와 부부라고 오해를 받았으니 말이다. 로제는 저도 모르게 들뜨려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힌 뒤, 헤이번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런데 예상외로 그는 불쾌해 보이지 않았다. 제 착각일지 모르지만 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