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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48화 (48/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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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사는 말을 하려다가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인상을 쓰고는 다시 말을 돌렸다. 환자 앞에서 대놓고 할 말은 아니라 여긴 듯했다.

“가족들은 아가씨가 이 병에 걸린 걸 알고 있소?”

“……아니요.”

로제는 목구멍이 꽉 막혀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내 대답했다. 그러자 치료사가 혀를 끌끌 차고는 조언을 하듯 말을 건넸다.

“하루라도 빨리 알리는 편이 좋겠소. 가족들에게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말을 못 하는 아가씨의 심정도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가족들이 이별할 시간을 줘야 하지 않겠소? 그게 두고두고 한이 되어 남을지도 모르는데.”

“가족, 없어요.”

로제는 치료사의 말을 듣다가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손끝이 새하얘질 정도로 꽉 움켜쥔 치맛자락이 그녀의 손 안에서 구겨졌다.

“……저런.”

생각하지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치료사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로제를 보는 그의 시선에 동정이 서렸다. 하지만 그는 굳이 로제의 사정을 물으려 하지 않았다. 젊은 나이인데 가족이 없다는 건, 그만큼의 아픈 사연이 있다는 의미일 터였다.

“어쨌든 증세를 완화시키는 데에 도움이 될 약은 지어드리리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시오.”

치료사가 콧등에 걸치고 있던 안경을 벗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제는 그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창밖을 보았다. 내일부터 축제라더니, 그래서일까.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나 활기차 보였다.

……살아 있기에 누릴 수 있는 시간.

밖을 응시하던 로제의 눈가가 젖어들었다.

그 시간이 그녀에게는 왜 그렇게 야박한 것일까.

남들에게는 저토록 후하면서, 왜 제게는 저들에게 허락된 시간의 절반만큼도 허락하지 않는 것인지.

원망하는 마음이 가슴속에서 불쑥 치밀고 올라왔다. 세상도, 제 운명도 모두 원망하고 싶었다. 로제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엄마!”

그 순간, 어디선가 아이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로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열렸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창가로 향했다.

‘아가……. 플리타.’

창틀을 짚고 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절박했다. 어딘지 모를 곳에서 제 아이를 찾아 헤매는 녹색 시선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때 갈색 머리의 여자아이가 어느 여인을 향해 우다다다 달려가는 게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엄마아아!”

“그렇게 뛰다가 넘어지면 어쩌려고!”

야단을 치면서도 냉큼 아이를 품에 안은 여인의 모습을 보던 로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황급히 창을 등지고 돌아섰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로제의 안색이 더욱 나빠졌다.

“흐으, 윽.”

그녀는 창문 아래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플리타가 백작 부인과 그녀의 딸을 보며 느꼈던 마음이 어떠했을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부럽고 서러운 마음이 제 아이를 얼마나 아프게 했을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런 아이의 앞에 엄마라고 나설 수 없는 제 처지가 서글펐다.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엄마가 되어주지 못해서. 엄마의 빈 자리를 느끼게 만들어서. 홀로 외롭게 놔두어서.

“……미안해, 아가. 플리타.”

로제는 터져 나오려는 흐느낌을 애써 참으며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가까스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있는데, 약이 든 봉투를 들고 나오던 치료사가 그녀를 보고는 서둘러 다가왔다.

“혹시 발작이라도 일어난 거요?”

“……아니요. 괜찮아요. 이게 제 약인가요?”

로제가 젖은 눈가를 훔치며 다시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치료사에게서 약 봉투를 받아 들고 계산을 마쳤다. 치료사가 약값을 받은 뒤에도 불안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로제는 그 시선을 뒤로한 채 치료사의 집에서 나오자마자 후드를 깊이 눌러썼다. 제 정체가 드러날까 싶어 하녀복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상태였다. 혹여 대공이 데려온 하녀 중 하나가 몹쓸 병을 앓고 있더라는 소문이라도 퍼질까, 나름대로 최대한 조심한 것이다.

자칫 방심했다가 제 병에 대한 이야기가 헤이번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대로 대공 저에서 내쫓길지도 모른다. 병든 하녀를 공녀의 곁에 둘 리 없으니까.

남은 시간을 다 채우지도 못하고 아이의 곁에서 떠날 수는 없었다.

……제게 남은 시간을 다 채워도 고작 반년밖에 되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1년도 짧다고 여겼는데 반년이란다. 그 짧은 시간마저 온전히 헤이번과 플리타에게 쓰지 못하고 죽는다면 미련이 남아 눈조차 제대로 감지 못할 것만 같았다.

‘조심해야지. 어떻게든 오랫동안 버틸 거야.’

로제는 서글픈 마음을 꾹꾹 눌러 접고, 그 위에 다부진 각오를 얹었다. 죽음을 앞두었다고 해서 마냥 절망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만큼 더 소중히 보내야 할 터였다.

“기다리고 있을 텐데.”

로제는 저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를 떠올리며 백작 저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녀는 몇 걸음 옮기다 말고 이내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백작 저의 하녀가 이 근처에 달콤한 디저트를 파는 가게가 있다고 한 게 생각났다.

“아, 저기인가 보구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로제의 눈에 한 가게가 들어왔다. 그냥 밖에서 보기만 해도 달콤함이 묻어날 것만 같은 디저트 가게였다.

아이가 좋아할 만한.

* * *

플리타의 방으로 향하는 로제의 발걸음이 급했다. 플리타에게 얘기하고 외출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이를 혼자 놔두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물론 필요하다면 백작 저의 하녀들이 플리타의 시중을 들기야 하겠지만, 아이에게는 전부 낯선 이들일 테니 말이다.

‘그래도 이걸 보면 좋아하겠지?’

로제는 계단을 오르다가 제 손에 들려 있는 작은 상자를 힐끗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상자 안에는 아이가 좋아할 만한 케이크와 쿠키 같은 디저트가 담겨 있었다. 게다가 축제를 위하여 특별히 만들었다는 쿠키는 플리타가 좋아하는 토끼와 다람쥐 등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우와, 하고 입을 벌린 채 눈을 반짝일 아이의 모습이 선명히 그려졌다. 로제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디저트가 담긴 상자를 챙겼다.

치료사의 집에서 나오기 전에 받은 약 중 하나를 먹은 덕분인지 몸이 한결 나아진 상태였다. 저를 염려하던 아이에게 괜찮아진 모습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이 정도 몸 상태라면 내일 축제에 가도 별다른 문제가 없을 테니 말이다. 아이의 손을 잡고 헤이번과 함께…….

그녀가 무심코 그를 떠올린 것과 동시에 계단 위쪽에서 누군가가 내려왔다. 그러더니 서너 계단 위에 멈춰 서서 그녀를 향해 말을 걸었다.

“설마…… 로제?”

“……!”

떠올리고 있던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탓일까. 로제가 깜짝 놀라 계단을 오르다 말고 발을 헛디뎠다. 그 바람에 그녀의 몸이 균형을 잃고 뒤쪽으로 기울었다.

비명조차 지를 새가 없었다. 그저 눈앞의 남자가 눈을 크게 뜨고 저를 향해 손을 뻗는 것을 보았을 뿐.

한편으로는 우습단 생각도 들었다. 축제에 같이 가고 싶어서 약까지 받아 가지고 왔는데, 병으로 죽는 게 아니라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죽는 건가 싶어서…….

“큰일 날 뻔했잖나. 계단을 디딜 땐 항상 조심해야지!”

그 순간, 헤이번이 로제의 팔을 낚아채듯 잡더니 다른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 짧은 시간에 서너 계단 아래로 뛰어 내려와 그녀를 붙잡은 것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지척에서 거세게 들렸다. 로제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잠시 그에게 안겨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황급히 뒤로 물러서려 했다.

“저, 전하. 죄송합…….”

“또 뒤로 넘어가려고?”

헤이번이 그런 로제의 허리를 다시 한번 당겨 안으며 못마땅한 듯 미간을 좁혔다. 로제는 자신이 계단 위, 그 비좁은 곳에서 재차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헤이번에게 안겨 있다는 것만 생각하여 같은 실수를 반복할 뻔한 것이다.

그녀의 얼굴과 목이 새빨개졌다. 헤이번이 그런 로제를 보다가 한숨을 내쉰 뒤, 그녀를 안았던 팔을 풀었다.

“……감사합니다.”

로제가 작은 소리로 인사하며 그제야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헤이번은 괜히 제 손을 두어 번 쥐었다가 펴고는 인상을 썼다.

너무나 가벼웠다. 어린애만도 못 하단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자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렇다 하여 일을 못 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아니, 체력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일을 못 한다면 하녀장이나 집사가 알아서 해고할 터였다.

그러니 자신이 신경 쓸 이유는 없는데……. 그런데 어째서인지 눈앞의 여자가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듯 가냘픈 것이 신경에 거슬렸다. 그는 그런 제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 말을 돌렸다.

“그런데 어딜 다녀오는 건가?”

헤이번의 시선이 로제가 입고 있는 후드로 향했다. 처음에는 저 후드 때문에 그녀가 맞는지 헷갈렸다. 저택 안에서 후드를 깊게 눌러쓴 모양새라니. 다른 누가 봤더라면 수상한 사람이라 했을지도 몰랐다.

그나마 저를 보고 놀란 로제가 뒤로 넘어갈 뻔하면서 후드가 벗겨져서 그녀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을 다행이라 해야 할지는 미지수이지만.

“아, 예에. 예, 저기…….”

그저 별다른 뜻 없이 물어본 것뿐이었다. 애당초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말을 돌리려고 그저 생각나는 대로 질문을 한 것이었고, 그 대답을 특별히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 질문에 당황해하며 말을 더듬는 로제를 보자 헤이번의 눈이 가늘어졌다.

“……로제?”

“아! 예, 저, 바깥…… 바깥 구경을 하느라.”

로제는 헤이번의 시선을 피하며 더듬거리다가 뒤늦게 대답을 했다. 하지만 그 대답에 헤이번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그런 수상한 차림새로?”

“……예?”

“바깥 구경을 하고 싶다면 그냥 나가도 되지 않았나? 굳이 후드까지 뒤집어쓸 필요 없이.”

헤이번의 말을 듣던 로제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입술을 깨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조금만 더 뭐라 했다가는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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