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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타가 로제를 향해 작은 손을 뻗었다. 로제가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으며 그 손을 잡았다.
“그럼요. 공녀님 곁에 언제나 전하께서 계실 거예요. 그리고 저도…….”
아이를 달래기 위해 말을 잇던 로제의 말끝이 흐려졌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 언제나, 라는 건.
“……?”
헤이번이 그 망설임을 느끼고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딱히 이상하게 여길 만한 것은 없었다. 그는 괜한 느낌이라 여기고는 다시 아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모레부터 축제가 열린다고 하더구나.”
“……?”
플리타와 로제가 그를 쳐다보았다.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둘 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헤이번이 어색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한 뒤, 말을 이었다.
“미들피온의 축제가 제법 유명한 편이라 들었다.”
“……?”
헤이번의 말이 이어질수록 두 사람의 고개가 더욱 갸우뚱, 기울었다.
“그래서 이것저것 구경할 게 많다고 들었고. 로제, 축제를 구경한 적 있나?”
“예? 아, 아니요. 그런 건…….”
로제는 갑자기 제게 향한 질문에 당황해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헤이번이 이번에는 플리타를 쳐다보았다. 당연히 아이는 축제를 구경한 적이 없었다. 대공 저 밖으로 나갈 일 자체도 드물었고.
그래서인지 두 사람 모두 헤이번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지 눈치채지 못했다. 헤이번은 멋쩍은 표정으로 미간을 긁적이다가 한숨을 내쉰 뒤, 대놓고 말을 꺼냈다.
“모레, 같이 축제 구경을 가자꾸나.”
“……!”
“지, 진짜요?”
로제의 눈이 동그래진 것과 동시에 플리타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그리고 헤이번이 그 물음에 대한 답으로 고개를 끄덕인 직후, 아이의 입에서 기쁨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 * *
“그래서 있잖아, 축제에 가면 사탕도 있고, 인형 탈 쓴 사람도 볼 수 있대. 그리고 밤이 되면 불꽃놀이도 하는데 하늘에 반짝반짝 불꽃이 막 수놓인 것처럼……. 로제, 왜 그래?”
플리타가 그림책에서만 봤던 축제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신나게 이야기하다가 몸을 웅크리고 있는 로제를 보고는 깜짝 놀라 다가왔다.
“왜? 어디 아파?”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픈 거 맞는 것 같은데?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어!”
플리타는 눈물을 글썽이며 제 작은 손을 로제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어? 열은 없는데……. 오히려 이마가 엄청 차가워.”
“그것 보세요, 공녀님. 괜찮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로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 그러자 플리타가 헷갈리는 듯 그녀를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괜찮아?”
“예.”
“그런데 왜 웅크리고 있었어?”
“음……. 점심을 먹은 게, 소화가 좀 안 돼서요.”
로제가 플리타의 물음에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적당히 둘러댔다. 그 말을 믿은 플리타가 벌떡 일어나더니 그녀를 붙잡아 낑낑대며 일으켰다.
“그럼 약 먹어야지. 내가 주치의 불러서 약 달라고 할게.”
“아니요, 제가 직접 갈게요. 그래야 증세를 보고 약도 더 잘 주시죠.”
“으음…….”
플리타는 로제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고민을 하며 눈을 깜빡였다. 로제가 가슴의 통증을 애써 참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잠깐…… 제가 자리를 비워도 될까요, 공녀님?”
“치료 받으러 가려고?”
“예.”
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플리타가 걱정 가득한 눈으로 로제를 보다가 두 손으로 그녀를 떠밀었다.
“알았어. 얼른 다녀와. 빨리 약 먹어야 낫지.”
“혼자 계실 수 있으세요? 아니면 다른 하녀라도.”
“혼자 있을래! 다른 사람 필요 없어. 나 혼자 잘 있을 수 있어. 내일 축제 가서 할 것도 미리 생각해둘 거고.”
아이가 제 스케치북을 가리키며 말했다. 플리타의 스케치북에는 이런저런 것들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그중 대부분이 세 사람이 나란히 손을 잡고 뭔가를 구경하는 것이었다. 로제는 잠시 스케치북을 보다가 미소를 짓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금방 다녀올게요.”
“응! 응! 얼른 갔다 와.”
플리타가 더 이상 지체하지 말라는 듯 로제를 재차 떠밀었다. 로제가 아픈 게 많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로제는 얼떨결에 아이에게 떠밀려 방을 나서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얼른!”
아이가 문을 닫으려다가 그 틈새로 로제를 보고는 다시금 재촉했다. 로제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한 뒤, 몸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얼굴이 마구 찌푸려졌다.
‘아니야. 아직은…….’
플리타가 뒤에서 또 보고 있을지 몰랐다.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발걸음을 뗄 때마다 속이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간신히 버티고 복도를 지나 계단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흐윽!”
로제는 플리타의 방 쪽에서 제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곳에 다다른 뒤에야 한 손으로 벽을 짚으며 그대로 무너졌다. 식은땀이 뺨을 타고 턱 아래로 뚝, 뚝, 떨어졌다.
몸이 갑자기 안 좋아진 건 오늘 아침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밤사이에 오한이 일더니 아침 무렵에 와서는 급격히 상태가 나빠졌다.
“……안 되는데.”
그녀는 차디찬 바닥에 주저앉은 채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헤이번이 어제 축제 얘기를 꺼낸 뒤로 플리타는 계속 들떠 있는 상태였다. 백작 부인 모녀를 보며 울먹였던 일은 아예 잊어버린 듯 상기된 얼굴로 내일 구경할 축제 얘기를 하느라 바빴다.
「신난다! 우리 셋이 같이 축제 보러 가는 거야! 로제도 신나지?」
플리타는 자신과 헤이번, 그리고 로제까지 셋이 함께 축제 구경을 가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만약 자신이 몸이 좋지 않아 나가지 못하게 되면 아이가 크게 실망할 터였다.
‘실망하게 할 수는 없어.’
로제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얼굴의 땀을 닦은 뒤, 다시 벽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현기증이 일었다. 그녀는 어지럼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때, 계단 아래쪽에서 누군가가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려와, 로제는 다시 한번 식은땀이 난 얼굴을 닦고는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아래층에서 올라온 사람은 백작 저의 하녀였다. 하녀가 로제를 발견하고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로제 역시 하녀를 향해 화답하듯 인사한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잠시만요.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요.”
하녀는 로제를 향해 공손히 말했다. 대공 저의 고용인들이 그녀를 냉대했던 것과 달리 백작 저의 고용인들은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었다. 아마도 자신이 대공 저의 하녀라는 점 때문인 듯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똑같은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저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다른 것은.
하지만 지금은 그런 점이 제게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었다.
“혹시 영지 내에 실력 좋은 치료사가 있나요?”
“예? 아, 저택 내에…….”
“아니요, 여기 말고, 바깥에요.”
로제는 하녀가 백작 저의 주치의를 부르려는 걸 서둘러 막았다. 그러고는 조금 전 플리타에게 했던 거짓말을 되풀이했다.
“점심을 먹은 게 소화가 좀 안 되는 것 같아서요.”
“아, 그런 거라면 굳이 주치의 선생님을 보지 않아도 돼요. 고용인들을 위한 상비약이 따로 있어서요.”
하녀는 로제의 말에 친절하게 대답했다. 로제가 그 말에 잠시 난감해하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겸사겸사 바깥 구경도 하고 싶어서요. 진료를 받는다는 명목으로 공녀님께 외출 허락도 받았거든요.”
“아아, 그렇다면, 뭐…….”
하녀가 그제야 로제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쯧쯧, 젊은 아가씨가 어쩌다가 이런 몹쓸 병에 걸렸는지…….”
치료사는 로제의 몸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로제는 덤덤한 표정으로 그의 동정 어린 시선을 받아냈다. 이제 와서 새삼 놀랄 것도 없고, 슬퍼할 이유도 없었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잠시라도 증세를 완화시킬 수 있는 약이었다. 병을 낫게 하는 기적의 치료제가 아니라.
“통증을 덜하게 해 줄 수는 있지만, 이 병 자체를 고치는 건 불가능하오.”
“알고 있어요. 저도 치료제를 원하는 건 아니에요. 그저 통증만 좀 가라앉힐 수 있으면 돼요.”
로제는 그의 말에 낙담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너무나 덤덤한 반응에 치료사가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얼마 남았다는 소리를 들었소?”
“……예?”
“아가씨의 남은 수명 말이오.”
치료사의 말에 로제의 녹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짓다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고, 로제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1년…… 정도 남았다고 들었어요. 운 좋으면 1년 하고도 조금 더 살 수 있겠지만, 그래도 2년은 넘기지 못할 거라 하더군요.”
“흠……. 1년이라.”
치료사가 로제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더니 떨떠름한 투로 말을 얼버무렸다. 그 반응을 본 로제의 표정이 굳었다.
“왜 그러시나요? 혹시 선생님께서 보시기에는 틀린 진단인가요?”
“그건 아니오. 아가씨를 처음 진료한 사람이 봤을 당시에는 그렇게 본 게 정확할 수 있소. 다만, 그 이후에 병의 진행 속도가 달라졌다면 그 예측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까 하는 말이오.”
치료사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하지만 로제는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러자 치료사가 그녀를 힐끗 보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제 머리를 긁으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1년도 안 남았소.”
“……1년도 안 남았다고요?”
로제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가뜩이나 몸이 좋지 않아 창백했던 얼굴이 새파랗게 보일 정도였다. 치료사가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병이 처음보다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소. 이대로라면 반년 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