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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44화 (44/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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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장이 로제에게 매달려 있는 플리타를 보다가 반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플리타는 우물쭈물하다가 로제의 치맛자락에 고개를 묻었다.

그에 당황한 로제가 어쩔 수 없이 대신 대답했다.

“목욕물부터 부탁드립니다.”

일단 깨끗하게 씻고 옷도 갈아입을 필요가 있었다. 어찌 되었든 이곳은 낯선 곳이고, 그만큼 아이를, 아니, ‘공녀’를 평가하려 드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 말이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하녀장이 이채 서린 눈으로 로제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플리타를 향해 예를 표한 뒤, 방을 나갔다.

“……공녀님.”

하녀장이 나가고 단둘이 남은 뒤, 로제가 플리타를 가만히 불렀다. 그러자 그녀의 치맛자락에 얼굴을 숨기고 있던 플리타가 움찔거렸다.

로제는 아이가 제 스스로 고개를 들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나, 바보 같았지?”

플리타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로제를 빤히 올려다보며 물었다. 로제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하지만 플리타는 입을 내민 채 침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치만……. 아까, 백작 부인 앞에서.”

“왜 그러셨어요?”

로제는 아이를 향해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아이가 야단을 듣는다고 느끼지 않도록, 평소보다도 더욱 상냥한 목소리로. 그 덕분일까. 혹은 로제에 대한 애정과 신뢰 때문일까. 플리타가 우물쭈물 망설이는 듯싶더니 이내 솔직히 털어놓았다.

“무서웠어.”

“백작 부인이 무서우셨어요?”

“응.”

“공녀님을 반갑게 맞이하셨잖아요.”

“……하지만, 똑같은 눈으로 봤는걸.”

플리타가 머뭇거리다가 볼을 부풀리며 대답했다. 로제가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유모가 나더러 ‘천한 피’라고 했을 때처럼, 똑같은 눈으로 나를 봤어.”

“……!”

“아까 그 백작 아저씨도, 그 아줌마도. 사랑스럽다고 말하면서, 나를 보는 눈은 무서웠단 말이야. 진짜야.”

플리타는 로제를 보며 덧붙여 말했다. 로제는 말문이 막혀 뭐라 대꾸하지 못하다가 그제야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요, 공녀님.”

“진짜?”

“물론이죠. 공녀님이 제게 거짓말을 하실 리가 없잖아요.”

로제는 플리타의 말을 진심으로 믿었다. 어린아이의 거짓말이라 여기지도 않았고, 잘못 본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아이는 자신을 향한 타인의 감정에 때로는 어른들보다 더 민감하다. 누가 저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더 정확히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더구나…….

어미의 천한 피를 물려받았단 말을 들으며 자란 플리타로서는 그런 시선에 더욱 예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로제는 입 안쪽 여린 살을 꽉 깨물며 울분을 삼켰다. 그러고는 애써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러셨던 거예요?”

“으응. ……나, 바보 같았지?”

플리타가 조금 전 했던 질문을 다시 건네며 로제의 눈치를 살폈다. 로제는 더욱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오히려 너무나 똑똑하신걸요.”

“……똑똑해?”

“그럼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걸, 공녀님만이 오로지 알아차리신 거잖아요. 정말 대단하세요.”

우리 공녀님, 진짜 똑똑하세요. 어떻게 그걸 알아차리신 거예요? 저는 공녀님이 정말 자랑스러워요.

로제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아이를 거듭 칭찬했다. 그러자 살짝 주눅 들어 있던 플리타의 표정이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아이의 어깨가 으쓱이기 시작했다.

“우와, 여기서 저기, 정원이 보여! 로제! 저쪽 나무에 새 둥지가 있어!”

그러고는 언제 겁을 먹고 침울했던가 싶게 아이가 밝은 모습으로 방 안을 돌아다니더니, 이내 창틀에 매달려 바깥 풍경을 구경하며 재잘거렸다. 로제는 안타까운 눈으로 아이를 잠시 바라보다가 가방을 열고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창밖을 구경하던 플리타가 다시 우다다, 달려와 로제의 품에 매달린 것은.

“바깥 구경 다 하셨어요?”

“응!”

플리타는 로제에게 매달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뭔가를 생각했는지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있잖아…….”

“예, 공녀님.”

로제는 플리타의 드레스를 가지런히 정리하며 대꾸했다. 플리타가 그것을 구경하며 말을 이었다.

“방금…… 유모가 같이 안 와서 정말 좋다고 생각했어.”

“…….”

“이런 생각을 하면 나쁜 아이인 거지?”

아이는 솔직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랬다. 로제는 짐을 정리하다 말고 플리타를 보았다. 그러고는 연녹색 눈을 마주한 채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은 저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로제도?”

“예, 유모님이랑 같이 안 와서 좋다고요. ……저도 나쁘죠?”

로제의 물음에 플리타가 어, 하고 중얼거리며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킥킥대며 웃기 시작한 건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이가 로제도 저와 같은 생각을 했다고 여겼는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다시 방 안 구석구석 탐험에 나섰다. 내심 유모랑 같이 오지 않아 좋아했던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대공 저에서 출발하기 직전까지 짜증을 냈던 유모를 봤으니 그럴 법도 했다.

「내가 집 지키는 개도 아니고……. 어떻게 전하께서 나에게 이런 모멸감을 안겨 주실 수 있지? 로제, 네가 전하께 이런저런 모함을 한 거 아니니?」

유모는 그 모든 것을 로제의 탓으로 돌리고 화를 냈다. 플리타가 보는 앞에서도 서슴지 않고 로제의 뺨마저 때릴 정도였으니 그 화가 얼마나 극심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마 돌아가고 나면 한동안 유모에게 시달릴 게 분명했다. 그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사실, 두통의 이유는 유모 하나만이 아니었지만.

「또 보자꾸나.」

로제는 저를 바라보던 선왕비의 눈빛을 떠올렸다. 선왕비와 공작 부인을 배웅하기 위하여 모든 고용인들이 저택 밖에 나가 일렬로 서 있는 와중에, 선왕비가 제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그 바람에 다른 고용인들의 질시 어린 시선을 받기도 했었다.

그들이 볼 때는 자신이 선왕비의 관심을 끌었다고 여길 터였다. 대공 전하에 이어 선왕비의 관심까지 끌다니, 참 대단하다며 비아냥거리던 누군가의 말이 귓가에 스쳤다.

‘팔찌를 돌려드려야 할 텐데.’

불편한 관심이었다. 게다가 받지 말았어야 할 물건까지 제게 있으니 대공 저를 떠나온 상황에서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제 방의 서랍장 안에 깊숙이 보관해 둔 팔찌를 떠올리다가 한숨을 삼켰다.

어쨌든 일단은 잊어야 한다. 아이와 함께 떠나온 첫, 그리고 마지막 여행이 아니던가.

‘그래, ……마지막.’

“자, 다 됐어요.”

로제는 복잡한 마음을 가슴속 한구석에 몰아넣은 채 다시금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플리타를 보았다.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애틋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글펐다.

* * *

“어서 오세요, 공녀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플리타는 저를 반기는 백작 부인에게 어색한 투로 인사했다. 백작 부인이 그런 아이를 위아래로 빠르게 훑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

너무나 익숙한 시선이었다. 또한 그렇기에 숨 막히는 시선이기도 했다.

누구인지도 모를 평민 어미를 두었다는 이유로, 언제나 저를 평가하려는 시선들.

아이는 입을 꾹 다문 채 저도 모르게 로제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러자 로제가 플리타의 긴장을 풀어주듯 그 손을 다정히 맞잡아 주었다.

괜찮아요, 공녀님.

부드러운 로제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무서운 꿈을 꾸고 일어나 훌쩍일 때, 유모한테 야단을 듣고 침울해할 때, 그럴 때마다 로제는 저를 다정히 안아주며 그렇게 말했다. 괜찮다고.

지금은 직접 소리 내어 말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제 손을 맞잡아준 것만으로도 그 말을 들은 것만 같았다.

플리타가 로제를 향해 살짝 웃은 뒤, 어깨를 펴고 테이블로 향했다. 로제가 조금 전보다 씩씩해진 아이의 모습에 미소를 짓고는 바로 뒤편에 시립했다.

“이쪽은 제 딸아이랍니다. 아델라, 공녀님께 인사드리렴.”

백작 부인이 곁에 있던 소녀를 플리타에게 소개시켰다. 마차에서 내려 처음 인사를 나누었을 때 언뜻 보았던 기억이 났다. 플리타는 저보다 몇 살 많아 보이는 소녀를 동그란 눈으로 보았다. 그러자 소녀가 턱을 살짝 치켜들더니 양손으로 치맛자락을 잡고 무릎을 굽혔다.

“안녕하세요, 공녀님. 아델라 뷔렐이라고 해요.”

“……어, 저는 플리타예요.”

플리타는 백작 영애, 아델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보다는 나이가 많지만, 그래도 어찌 되었든 저처럼 어린아이였으니까. 늘 어른들 틈에서 살던 플리타에게 아델라의 존재는 낯설고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친해지고 싶은 존재였다.

하지만 아델라는 그렇지 않은 듯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백작 부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본 플리타의 얼굴이 아주 살짝 침울해졌다. 그 순간, 백작 부인이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공녀님.”

“……예.”

플리타는 백작 부인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로제가 그 뒤에 서서 테이블 위에 차려진 다과를 살펴보았다. 혹시 아이가 먹지 못하는 것이 있을까 하여 미리 살펴보았지만, 다행히 문제될 만한 것은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티타임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플리타는 어리기는 하지만 예법에 맞게 행동했고, 그런 아이의 모습이 의외였는지 백작 부인이 살짝 눈썹을 치켜올리기는 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문제는 아델라에게서 생겼다. 아델라가 앞에 놓인 푸딩을 한 스푼 뜨려다가 그대로 툭, 떨어뜨리고 만 것이다.

“아델라!”

백작 부인이 은 주전자를 들어 직접 차를 따르다가 그 광경을 보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아델라를 불렀다.

“어린 공녀님께서도 실수하지 않으시는데, 어쩌자고 그런 실수를 저지른 거니? 당장 사과드리려무나.”

“어, 저는 괜찮은데…….”

“죄송합니다, 공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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