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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 같이 안 가?”
그때, 플리타가 헤이번의 손을 잡고 몇 걸음 아장아장 나아가다 말고 멈춰 서서 로제를 돌아보았다. 로제가 흐뭇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 저는.”
둘만의 산책을 방해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녀가 서둘러 사양하려는 순간, 로제를 응시하던 푸른 눈의 남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같이 산책하지.”
“……예?”
“그러는 게 좋겠군요, 로제 양. 뭐 해요? 전하와 공녀님께서 기다리시는데.”
로제가 당황하여 눈을 깜빡이는데, 페드윈이 냉큼 다가와 그의 말에 동조했다.
“아, 저기…….”
그녀는 얼떨결에 떠밀리다시피 그들 부녀에게 다가가고 말았다. 그러자 플리타가 냉큼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어, 로제는 저도 모르게 그 손을 잡았다.
“헤헷.”
아이가 양손에 각각 헤이번과 로제의 손을 잡고는 신나서 폴짝폴짝 발을 굴렀다. 하지만 반대로 로제의 걸음걸이는 뻣뻣하기 그지없었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와 아이, 그들과 이렇게 손과 손을 마주 잡고 산책을 하게 되리라고는.
‘……마치 단란한 가족처럼.’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이 벅차올랐다. 로제는 지금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주변 풍경을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그저 맞잡고 있는 아이의 작은 손, 그리고 그 아이를 사이에 두고 함께 걷는 남자의 발소리만이 제 모든 감각을 차지했을 뿐.
“어? 토끼다!”
바로 그때, 플리타가 외쳤다. 서너 걸음 앞에 갈색 토끼가 가로질러 뛰어가는 게 보였다. 플리타는 냉큼 두 사람의 손을 놓더니 그대로 토끼를 향해 달려갔다. 요즘 즐겨 읽는 동화책 주인공이 토끼이다 보니 아무래도 아이의 관심을 더욱 끈 모양이었다.
“공녀님!”
로제가 제 손을 놓고 뛰어가는 플리타를 보고 놀라서 아이를 잡으려는 순간, 헤이번이 그런 그녀를 만류했다.
“그냥 잠시 놔두지. 별다른 위험은 없을 것 같은데.”
“하지만…….”
로제는 헤이번의 말에 망설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막았기에 어쩔 수 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시선만큼은 여전히 아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장 달려갈 것처럼 말이다.
그 모습을 본 헤이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비인 자신보다 더 아이를 염려하고 신경 쓰는 여자의 모습에 가슴속이 간지러운 탓이었다. 그 모습이 단순히 제게 잘 보이려고 꾸며낸 가식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는 피식 웃은 뒤, 그녀에게 농담조로 말을 건넸다.
“왜, 내가 아이 하나 지키지도 못할 정도로 무능한 아비 같은가?”
“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로제는 깜짝 놀라 서둘러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가 헤이번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보고서야 그가 제게 농담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어…….”
로제의 녹색 눈이 크게 뜨였다. 그와 동시에 바람이 갑작스럽게 불면서 치맛자락이 크게 부풀었다.
“앗!”
그녀는 깜짝 놀라 제 치맛자락을 붙들었다. 로제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흐흠.”
그리고 헤이번이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로제는 바람이 가라앉을 때까지 치마를 잡고 있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가 시선을 돌리고 있는 게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의 목덜미가 아주 조금, 붉게 물든 것도.
그 순간, 문득 그와 단둘이 있다는 게 의식되었다. 물론 진짜 단둘이 있는 건 아니었다.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를 수행하기 위하여 함께 온 인원이 수십 명이었다. 또한 몇 걸음 거리를 둔 곳에서는 플리타가 토끼와 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제는 헤이번의 존재가 너무나 크게 느껴져 황급히 몸을 돌렸다. 두 손을 모은 채 몸을 돌린 모습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탓할 수는 없었다.
헤이번 역시 로제와 비슷한 모습으로 반대편을 향해 돌아서 있었으니.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살짝 몸을 돌리기는 했어도, 서로에게 거리를 벌리거나 자리를 뜨려 하지는 않았다.
그때, 같이 놀던 토끼가 깡충깡충 뛰어 수풀 속으로 숨어버리자, 플리타는 인사도 없이 가버린 토끼를 보고 서운한지 입을 내밀었다. 그러나 금세 아쉬움을 털어낸 뒤, 쪼그려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 그리고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을 보았다.
“아!”
플리타는 저를 기다리듯 서 있는 둘을 향해 반색하며 달려왔다. 그렇지만 로제와 헤이번의 앞에 서더니 이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그러는 거지, 플리타?”
어색한 분위기도 털어낼 겸 헤이번이 아이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플리타가 고개를 재차 갸웃거리더니 그를 빤히 올려다보며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아빠, 로제랑 싸웠어요?”
“뭐?”
“예?”
아이의 뜬금없는 질문에 헤이번과 로제가 동시에 황당하다는 투로 물었다. 그러자 플리타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아빠랑 로제랑 둘이 서로 반대쪽만 쳐다보고……. 게다가 둘 다 얼굴이 새빨개요. 화나서 빨개진 거 아니에요? 유모가 나한테 화났을 때, 얼굴이 막 그렇게 변하던데.”
플리타가 말을 하다가 정말 화가 난 거면 어쩌나 싶었는지 울상을 지었다. 헤이번과 로제가 그 말을 듣고는 무심코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물론 아이에게 해명을 하는 건 잊지 않았다.
“그런 거 아니다.”
“아니에요, 공녀님.”
“……근데 왜 얼굴이 빨갛게 됐어?”
플리타는 의아한 눈으로 로제에게 물었다. 로제가 아이의 맑은 눈을 마주하고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냥…….”
하지만 뭐라 대답할 수 있을까. 그녀는 아이에게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난처해하다가 말끝을 흐리며 헤이번을 보았다. 저 대신 말해 달라는 듯 간절한 시선이었다.
그 시선을 외면하지 못한 헤이번이 미간을 모은 채 아이의 주의를 끌며 말을 꺼내려는 순간, 페드윈이 다가왔다.
“전하, 이제 다시 출발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마침 다행이었다. 헤이번은 페드윈의 말에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출발하도록 하지. ……그만 가자, 플리타.”
그는 이 기회다 싶어 냉큼 말을 돌렸다. 플리타가 얼떨결에 로제의 손을 잡고는 헤이번을 따라 마차가 서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헤이번은 마차에 먼저 오르지 않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고는 아이를 안아 마차에 태운 뒤, 이번에도 몸을 돌려 그녀에게 손을 건넸다.
“…….”
로제의 얼굴이 다시금 붉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순순히 그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그 모습에 헤이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러나 그 역시 내색하지 않고 덤덤히 그녀가 마차에 오르는 것을 도운 뒤, 맞은편에 앉았다.
마차 문이 닫히고, 밖에서 출발을 알리는 페드윈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마차가 흔들리는 듯싶더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말발굽 소리에 로제의 가슴이 비슷한 박자로 두근거렸다.
* * *
“어서 오십시오, 대공 전하. 이렇게 방문하여 주셔서 영광입니다.”
헤이번의 일행을 맞이한 건 미들피온의 영주이자 대공의 가신이라 할 수 있는 뷔렐 백작이었다.
“그간 격조하였습니다, 백작.”
헤이번이 그와 악수를 하며 나직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뷔렐 백작이 거듭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더니 이내 시선을 옮겨 헤이번의 곁에 서 있던 플리타를 보고는 입을 열었다.
“오호! 이분이 바로 공녀님이시군요! 이렇게 사랑스럽고 어여쁜 분이시라니. 안 그렇소, 부인?”
“정말 그렇군요. 공녀님, 안녕하세요.”
뷔렐 백작의 아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오더니 플리타를 향해 허리를 살짝 숙인 채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그들의 호들갑에 기뻐하는 대신, 플리타는 잔뜩 겁을 먹은 표정으로 로제의 치맛자락을 잡고는 뒤편으로 숨었다. 그 바람에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아…….”
백작 부인의 표정 역시 어색하게 굳었다. 뷔렐 백작이 그런 아내를 보다가 부랴부랴 박수를 치고는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피곤하실 텐데, 제가 전하와 공녀님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요. 하하! 이보게, 제이든. 전하와 공녀님을 객실로 안내해 드리게나.”
백작의 명에 집사가 정중하게 예를 표하고는 다가왔다. 헤이번이 그의 안내를 받으며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플리타는 뭐가 그렇게 무서운지 로제의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공녀님.”
“……으응.”
플리타는 로제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쉽게 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런 아이의 행동에 나란히 줄을 서 있던 고용인들 사이에서 작게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1층의 홀로 막 들어가려던 헤이번이 멈춰 서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플리타.”
그는 아이를 야단치지 않았다. 그저 덤덤한 투로 아이를 불렀을 뿐.
그러나 그 목소리에 플리타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천천히 발을 떼었다. 로제가 아이의 뒷모습을 보다가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플리타가 저택으로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헤이번이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공녀님께서 머무르실 객실은 이쪽입니다.”
플리타가 제 아비를 따라가려는 순간, 하녀장으로 보이는 중년 여자가 다가왔다. 아이는 흠칫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려 로제를 보았다. 로제가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된 듯 아이가 하녀장을 따라 방향을 틀었다.
하녀장이 안내한 객실은 2층 서편에 위치한 곳이었다. 로제는 플리타의 옷가지가 든 가방을 챙겨 방 안으로 들어갔다. 플리타는 방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로제가 들어오자마자 냉큼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목욕부터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시장하실 텐데 가벼운 디저트부터 준비하도록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