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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르르.
아이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헤이번이 페드윈의 보고를 듣다가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잠시 쉬어 가느라 멈춰 선 사이, 플리타와 로제가 수풀 아래에서 소꿉놀이를 하는 모양이었다.
“공녀님께서 예전에 비해 정말 많이 밝아지셨습니다.”
그때, 페드윈이 헤이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더니 흐뭇한 투로 입을 열었다. 헤이번은 아이와 로제를 보다가 제 호위 기사를 힐끗 돌아보았다. 하지만 딱히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침묵은 긍정이라 하였던가.
페드윈은 제 주인의 침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저 공녀님의 시중을 도맡아 하는 전담 하녀가 한 사람 들어왔을 뿐인데 말입니다. 그 변화가 정말 신기하지 않습니까, 전하? 그러고 보면 저 하녀가 공녀님과 큰 인연이 있었던가 봅니다. 처음에 공녀님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일도 그렇고…….”
페드윈이 다소 수다스럽게 말을 늘어놓다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아, 하고 외마디 소리를 뱉었다.
“게다가 공녀님과 저 하녀가 상당히 닮았고요.”
“……닮았다고?”
헤이번이 한 박자 늦게 물었다. 그러자 페드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눈동자 색도 비슷하고. 아니, 그걸 떠나서도 뭐랄까……. 두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게 비슷한 느낌이 듭니다. 마치 모녀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참 신기한 일입니다.”
헤이번은 페드윈의 말을 무심히 흘려들으며 다시금 제 아이와 아이의 하녀를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아이가 쪼그려 앉아 박수를 치며 웃고 있었다.
……페드윈의 말대로 아이가 많이 밝아진 건 틀림없었다.
아이답지 않게 늘 주눅 들어 있고, 뒤편에 숨어 있기 일쑤였던 아이가 저렇듯 환하게 웃고 있으니 말이다. 아이답게. 그 또래의 어린아이처럼.
뒤이어 그의 푸른 눈이 플리타의 맞은편에 비슷한 모습으로 쪼그려 앉아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에게 향했다. 꽃을 꺾어 뭔가를 만든 것인지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아이의 머리에 씌워 주는 게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 눈앞에 흐릿한 누군가의 모습이 떠오른 것은.
「……어, 이게 뭐예요?」
「당신한테 주는 선물.」
「화관 아니에요? 이런 것도 만들 줄 알아요? 어머나, 예쁘다!」
기뻐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다가 이내 바람결에 흩어졌다.
누군가와 관련된 흐릿한 잔상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기억 속에서 사라진, 플리타를 낳은 여인인지도 몰랐다. 아니, 틀림없이 그 여인의 잔상이었다.
‘놓쳐서는 안 돼. 조금만 더 떠올려!’
헤이번은 본능적으로 기억의 잔상을 움켜쥐려 했다. 금세 사라져버릴 흔적이라는 것을 알기에 어떻게든 그녀에 대한 것을 조금이라도 더 알아내고자 했다.
“으윽…….”
하지만 그가 기억해내는 것을 방해하겠다는 듯 머릿속을 헤집는 극심한 두통이 찾아왔다. 그 바람에 헤이번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전하!”
페드윈이 흐뭇한 표정으로 플리타를 보고 있다가 헤이번의 신음에 황급히 그를 부축하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헤이번이 페드윈의 부축을 거절하며 몸을 똑바로 세웠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갑자기 왜……. 주치의를 부를까요?”
페드윈이 당장이라도 주치의의 멱살이라도 잡아 끌고 오겠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러나 헤이번이 손사래를 치며 그를 막았다.
“소란 피우지 말게, 페드윈 경. 그저, 잠시 머리가 아팠을 뿐이야.”
“하지만!”
페드윈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다시금 입을 열려는 순간, 멀찍이 떨어져 소꿉놀이를 하던 플리타가 벌떡 일어나더니 곧바로 헤이번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아이가 괜히 겁을 먹게 하지 말게. 지금 자네 얼굴을 봤다가는 플리타가 울음을 터뜨릴 거야.”
헤이번은 조금 두통이 가라앉았는지 숨을 내쉬고는 가벼운 농담마저 덧붙였다. 그제야 페드윈이 안심했는지 덩달아 피식 웃더니 이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주치의에게 진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전하. 요즘 들어 자주 두통을 느끼시는 것 같은데.”
“내가 알아서 하지.”
헤이번은 그의 말에 간단히 대꾸한 뒤, 제게 다가오는 플리타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플리타가 뭔가 급한 듯 달려오다가 제 아비와 눈이 마주치자 멈칫하더니 그대로 멈춰 섰다.
“왜 그러지, 플리타?”
머뭇거리는 듯한 아이의 모습에 헤이번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플리타는 작게 으응, 하고 소리를 내더니 눈을 데굴데굴 굴리기만 했다. 그 모습에 헤이번의 미간이 좁아졌다.
“……플리타?”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그의 표정이 저절로 굳었다. 아이가 뭔가를 감추고 있는 건지 양손을 뒤로 하고 있는 게 보였다. 헤이번이 플리타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가려는 순간, 아이가 눈을 굴리다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금세 반색하여 입을 벌렸다.
“로제!”
헤이번의 시선이 아이의 목소리를 따라 그 뒤편으로 향했다. 로제가 플리타의 뒤쪽에서 다가오다가 헤이번과 눈이 마주치자 역시 멈칫하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이와 비슷한 모습으로.
게다가 둘 다 화관을 만들어 쓴 터라 잔뜩 흐트러진 머리로.
‘……유모가 지금 이 모습을 봤더라면 난리를 쳤겠군. 저택에 남겨 두고 오기를 잘했어.’
헤이번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로제와 플리타가 서로 뭐라 작게 속삭이더니 다시금 아이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그는 제 앞에 가까이 다가온 뒤에도 한참 망설이는 아이를 그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음, 이거요.”
그리고 한참 후에야 아이가 그에게 내민 건 화관이었다. 양손을 뒤로 하고 있더니 화관을 감추느라 그랬던 듯했다.
‘……그런데, 화관?’
헤이번이 문득 의아한 마음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플리타가 우물쭈물하다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아빠, 선물이에요.”
“……뭐?”
“아빠도 우리랑 같이, 이걸 머리에 썼으면 좋겠어요.”
푸흡. 뒤편에 물러나 있던 페드윈에게서 웃음을 참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헤이번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미처 표정을 감출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그게, 무슨…….”
“하하! 한번 써 보시지요, 대공 전하. 전하께서야 워낙 미모를 타고나셨으니 화관을 쓰셔도 잘 어울리실 것 같습니다.”
헤이번이 황당한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에 냉큼 페드윈이 곁으로 다가오더니 짐짓 진지한 투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가득했다.
“…….”
헤이번은 제 호위 기사의 불경스러운 농담에도 뭐라 타박하지 못한 채 자신의 어린 딸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이는 헤이번이 받아줄 때까지 들고 있겠다는 듯 두 손으로 화관을 든 채 가만히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 모습에 말문이 막힌 헤이번의 시선이 이번에는 플리타의 뒤쪽으로 향했다. 로제가 뭐라 설명하기 힘든 표정으로 웃을 듯 말 듯 하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멀찍이 떨어져 휴식을 취하던 기사들과 병사들, 그리고 수행인들마저도 이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 모든 시선 속에서 헤이번은 암담함을 느꼈다. 그 누구의 앞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을, 제 어린 딸의 또랑또랑한 시선 앞에서 느낀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화관을 쓰다니.
대공인 자신이 그런 광대 흉내를 낼 것 같은가.
그저 거절하면 될 일이었다. 유모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서둘러 공녀를 야단치고 예의를 가르쳤을 것이다. 아이를 부추겨 함께 화관을 만들고 일을 꾸민 저 하녀처럼 행동할 것이 아니라.
하지만…….
“……후우.”
헤이번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그러자 플리타가 움찔거리며 화관을 든 손을 조금 아래로 내렸다. 조금 전 망설이고 머뭇거리던 아이의 모습이 그에 겹쳐졌다.
아이로서는 큰 용기를 내었을 것이다. 단 한 번도 제게 이런 선물이란 걸 한 적 없는 아이였다. 이렇게 기대 어린 눈으로 저를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였다.
“……그래, 고맙구나.”
저를 주려고 가져온 화관과 그것을 든 작은 손을 쳐낼 수 없었던 것은.
헤이번은 어색하게 대답하며 화관을 받아 들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플리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화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제가 씌워드릴게요.”
또다시 와락, 미간이 구겨졌다. 하지만 그는 재차 한숨을 내쉰 뒤, 애써 덤덤한 척 표정을 추스르고는 아이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플리타가 헤이번의 눈치를 살피다가 이내 환한 얼굴로 그에게 화관을 씌워 주었다. 그가 허리를 숙였음에도 아이의 키가 워낙 작은 터라 까치발을 하면서까지.
헤이번의 머리 위에 들꽃을 엮어 만든 화관이 살짝 얹히듯 씌워졌다. 크기도 맞지 않고, 아니, 맞지 않아서 다행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헤이번은 머리 위의 화관을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덤덤한 투로 플리타에게 말을 건넸다.
“다시 출발하기 전까지 시간이 좀 있는데, 같이 산책이라도 할까.”
“어……. 예!”
플리타가 제 아비의 머리 위 화관을 멍하니 보다가 이내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그러고는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
저를 향해 내민 작은 손에 헤이번의 눈길이 향했다. 그의 푸른 눈이 설명할 수 없는 감정으로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곧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산책을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로제가 뒤에 서서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완벽한 부녀의 모습은 아니었다. 때로는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어색해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저렇듯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아주 조금씩이나마 서로에게 다가가고 있는 저들의 모습이, 그래서 너무나…….
“로제, 같이 안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