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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움…….”
플리타가 잠꼬대를 하는지 작게 뭐라 중얼거리며 로제의 팔에 제 뺨을 비볐다. 로제는 그런 아이를 내려다보며 가만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
맞은편에 앉아 있던 헤이번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저를 보고 있었던 걸까. 괜히 가슴이 콩닥거리며 뛰었다.
“곧 도착할 것 같군.”
“……예? 아아, 예.”
그 순간, 헤이번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로제는 그의 말에 서둘러 대꾸하고는 마차의 작은 창을 통해 바깥을 보았다. 헤이번의 말대로 도시 근처에 다다른 것인지 마차와 사람들의 행렬이 많이 보였다. 그리고 멀리, 도시의 성벽도 언뜻 보이는 것 같았다.
‘……미들피온이라 했지?’
로제는 자신들이 도착할 곳의 이름을 떠올리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로서는 처음 듣는 생소한 지명이었다. 하기야 수도에 오기 전까지 국경 지대의 작은 마을에서 살았던 제게 어느 곳이든 낯설지 않은 데가 있을까 싶지만 말이다.
“속은 이제 괜찮은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바깥 풍경을 바라보던 로제의 귓가에 헤이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녀가 시선을 돌려 그를 보았다.
“오는 내내 멀미를 하지 않았나.”
“아……. 예, 이제 괜찮습니다.”
로제는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깜빡이다가 헤이번이 덧붙인 말을 듣고서야 황급히 대답한 뒤, 고개를 숙였다. 당황스러운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얼굴에 열이 오르고, 반대로 손끝은 잔뜩 긴장하여 차가워졌다.
그녀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맞은편의 남자에게 이런 제 반응을 들킬 수는 없었다.
따지고 보면 별것 아닌 질문에 불과했다. 울퉁불퉁한 숲길을 지나오느라 속이 좋지 않았던 고용인에게 별다른 생각 없이 건넬 수 있는, 그런 질문 말이다.
“글쎄……. 꼭 그런 것 같지는 않군.”
하지만 태연한 척하려던 로제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헤이번은 푸른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마부석 쪽의 벽을 두어 번 쳤다. 그러자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춰 섰다. 뒤이어 그를 호위하던 페드윈이 마차 가까이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여기서 잠시 쉬어 가겠다.”
-예.
조금 더 가면 미들피온령에 도착할 텐데 쉬어 가겠다 하니 의문을 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페드윈은 그 어떤 의문도 보이지 않고 헤이번의 명에 따랐다.
“저……. 전하.”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로제는 헤이번의 말 한마디에 멈춰 선 마차에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그녀의 기척을 느낀 것인지 플리타가 으응,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났다.
“……우리 도착했어?”
플리타가 로제의 팔을 끌어당기며 잠기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제야 로제가 당황한 속내를 진정시킨 뒤에 아이를 토닥이며 대답했다.
“아니요, 공녀님. 조금 더 가야 해요.”
“근데, 왜애…….”
아이가 조금 더 잠이 깬 건지 다시 한번 눈을 비비더니 로제의 품에서 몸을 일으켰다. 플리타의 연녹색 눈이 마차 창 너머로 향했다.
“잠깐 쉬었다가 가기로 했다.”
그 순간, 헤이번이 입을 열었다. 플리타는 제 아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러더니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네에…….”
아이는 헤이번에게 왜 쉬었다가 가느냐며 묻지 않았다. 그저 순순히 그의 결정을 받아들였을 뿐. 그 모습에 로제가 뭔가를 깨닫고 미간을 찡그렸다.
헤이번과 플리타의 관계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기야 서먹하게 지내 온 시간이 있는데, 식사 몇 번 같이 하고 시간을 조금 더 같이 보냈다고 사이가 금방 가까워지지는 않았겠지.’
이번 여행을 통해 두 사람이 더욱 가까워졌으면 좋겠다. 그녀가 그런 바람을 품으며 속으로 중얼거리는 순간, 헤이번이 로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잠시 내리겠나?”
“……예?”
“멀미가 날 때는 바깥바람을 쐬어 주는 게 좋아. 내리지. 플리타, 너도.”
“저도 내릴래요!”
플리타가 헤이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먼저 외쳤다. 그러고는 그런 제 자신에게 놀란 듯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헤이번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피식 웃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도 내리자.”
헤이번은 그 말과 함께 마차 문을 열었다. 그러자 밖에 있던 페드윈이 냉큼 다가왔다. 하지만 헤이번은 손을 들어 그를 저지시켰다.
“됐네, 페드윈. 자네도 쉬도록 해.”
“예, 전하.”
페드윈이 다가오려다가 그의 말에 멈칫하더니 그대로 돌아섰다. 그리고 헤이번이 가볍게 마차에서 내리고는 뒤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로제는 플리타를 데리고 마차에서 내리려다가 그가 내민 손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내 손을 잡지. 비가 왔었는지 땅이 질어.”
헤이번의 말에 로제가 눈을 깜빡이다가 조심스럽게 마차 아래를 보았다. 그의 말대로 비가 내렸던 건지 땅이 젖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저, 그럼 공녀님을…….”
로제는 플리타를 헤이번의 품에 안겨주려 했다. 자신이야 진창을 밟아도 문제될 게 없었다. 신발이 흙투성이가 되기는 하겠지만, 그건 깨끗하게 닦으면 될…….
“앗! 저, 전하!”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헤이번이 플리타를 한쪽 팔로 안고는 다른 손으로 로제의 손을 잡은 것이다.
“이 소, 손을.”
“바로 밑을 디디지 말고 그 앞쪽을 밟아. 그쪽 땅이 좀 더 단단하니까.”
“저, 저기, 전하. 손…….”
로제는 헤이번이 제게 뭐라 하는 것을 하나도 듣지 못했다. 몸의 모든 감각이 전부 제 손으로 집중된 탓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헤이번에게 잡힌 제 왼손이라 해야겠지만 말이다.
“무슨 문제 있나?”
로제가 마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어 말을 더듬자 헤이번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잡혀 있는 손을 빼내려고 꼼지락거렸다.
“저, 저 혼자 내릴 수 있습니다. 손을 잡아주지 않으셔도요.”
“불쾌한가?”
당황하여 허둥대는 로제를 가만히 보던 헤이번이 불쑥 물었다. 다소 뜬금없는 그 물음에, 로제가 어쩔 줄 몰라 하다 말고 그를 쳐다보았다.
“내 행동이 불쾌한지 물었다. 나는 그저, 땅이 진창이라서 손을 잡아주려 한 건데…….”
헤이번이 난감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놓은 뒤에 단호한 목소리로 덧붙여 말했다.
“다른 뜻으로 손을 내민 건 아니다. 내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
“아…….”
로제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헤이번이 제 행동에 오해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난처해하며 나름대로 제게 해명하려 하고 있다는 것도.
졸지에 그를 여인을 희롱하는 파렴치한으로 만들어버렸다는 당혹감에 로제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뒤늦게 고개를 흔들었다.
“저 또한 그런 나쁜 뜻으로 전하를 오해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저에게까지 손을 내밀어주시는 것이 당황스러웠을 뿐이에요.”
기억 속 헤이번이 내민 손이었다면 당연히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제 기억 속의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헤이번 괸터스였다.
국경 지대의 작은 마을에 정착한, 유쾌한 방랑자 헤이번이 아니라.
다정하고, 때로는 짓궂게 웃던 그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했고, 자신을 그보다 더 사랑해 주었던 그 남자가 아니라.
이 나라, 괸터스의 대공.
저로서는 감히 넘볼 수조차 없는 고귀한 존재.
저를 안아주던 따스한 체온은 기억 속에서 여전히 생생하지만, 더 이상 제 곁에 없는 사람이 바로 헤이번, 이 남자였다. 이렇게 가까이 있어도, 더는 제 남자가 아닌.
그러니 더 이상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었다. 이미 충분히 욕심을 냈고, 그 이상은 제게 미련으로 남을지도 몰랐다. 그저 아주 작은 흔적처럼, 먼지처럼, 그렇게 머무르다가 떠나야 할 터였다.
로제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는데,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쁜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니 다행이군. 그럼 손을 잡아도 괜찮겠지?”
“예, ……예에?”
로제가 과거의 기억 속에서 그리움을 좇다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제 눈앞에 들이밀어진 남자의 손을 보고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헤이번이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향해 재차 손을 내민 채 기다리고 있었다.
“……저.”
로제는 입이 마르는 걸 느꼈다. 그러다가 문득 느껴진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플리타가 어느새 잠이 다 달아난 것인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저와 헤이번을 번갈아 보다가 배시시 웃었다.
티 없이 맑은 웃음이었다.
복잡한 사정 따위는 알 리 없는.
아이는 그저 모든 게 재미있는 것 같았다. 아비의 품에 안겨 있는 것도. 자신과 그가 손을 잡느니 마느니 하며 옥신각신하고 있는 것도.
그 해맑은 웃음을 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제 모습이 우습단 생각이 들었다. 헤이번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인지 피식 웃고는 그녀에게 눈짓을 건넸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전하.”
로제는 망설이다가 어색한 표정으로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헤이번의 손에 제 손끝을 살짝 얹었다. 그 순간, 헤이번이 움찔하는 것 같더니 이내 그녀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땅이 젖어 미끄러우니 조심하도록.”
“……예.”
로제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간신히 열어 대답했다. 하지만 다시 곧바로 입술을 앙다물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기억 속의 체온이었다. 지난날, 저를 안아주었던 그 온기였다.
마차에서 내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그녀의 눈가가 순간 붉게 물들었다.
기억 속의 남자가 더 이상 아닌데, 그 체온만큼은 여전히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는 남자의 것이란 사실이 서글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