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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40화 (4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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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제 병은 남에게 옮지 않는다. 또한 지금 당장 앓아누운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병을 숨긴 채 아이와 헤이번의 곁에 있는 저를 나무라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이기심을 탓하는 것처럼 들려서 가슴속이 답답해졌다.

그런 탓에 로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여행을 간다는 말에 붉게 상기되었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빠져나간 모습이었다. 하녀장이 그런 로제를 보더니 혀를 찼다.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보니 그냥 조금 피곤한 건 아닌 듯하구나.”

“아, 저기, 하녀장님…….”

“마침 내게 열을 내리게 하는 약이 남아 있으니, 내 방에 와서 가져가거라. 그리고 내일 아침에 약재 창고에 가 보도록 하려무나. 그곳에 가면 약제사가 있을 테니 증세를 상세히 말하고.”

하녀장은 로제의 말을 중간에 끊은 뒤, 명령조로 말했다. 로제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몸 아픈 고용인들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니 딱히 인사를 할 필요는 없다.”

하녀장이 로제의 감사 인사를 무뚝뚝하게 넘긴 뒤, 다시금 몸을 돌리려 했다. 그 순간 로제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저도 모르게 그녀를 불렀다.

“저, 하녀장님.”

“왜? 뭐가 더 궁금하니?”

하녀장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물었다. 하지만 로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

하녀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람을 불러놓고 곧바로 아무것도 아니라 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외려 실없는 행동을 한다며 질책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하녀장은 굳이 로제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채근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갔을 뿐.

탁.

문이 닫히는 소리에 로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 얕은 생각으로 자칫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요 근래 몸 상태가 조금 더 안 좋아진 것 같아, 혹시 그에 대한 약을 받을 수 있는지 물어보려 했던 것이다.

안 될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곧바로 하녀장을 통해 집사에게 제 얘기가 들어갈 테고, 자신이 중병에 걸렸다는 것을 들킬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럼 이곳에서 쫓겨나는 건 기정사실이나 다를 바 없을 터였다.

‘안 돼. 아직은, 곁에 있어야 해.’

로제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대공 저 안에서 약을 받는 건 결코 안 될 일이었다. 미리 외부에서 약을 받아 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런데…… 외출이 될까?’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외출은 두 달에 한 번 허락한다고 했던 하녀장의 말이 떠올랐다. 로제가 문득 든 걱정에 미간을 좁힌 순간, 뒤편에서 하품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후아암.”

플리타가 낸 소리였다. 가족 여행을 간다며 신나 하더니 금세 졸음이 온 모양이었다. 하기야 본래 자던 시간을 한참 지났으니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로제는 걱정을 잠시 접어두고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플리타가 억지로 잠을 참는 것인지 하품을 하며 눈을 비비고 있었다.

“이제 주무셔야죠, 공녀님?”

“으응? 아냐, 나 여행 갈 준비할 건데.”

플리타가 잠기운이 묻어나는 눈을 억지로 뜨려고 애를 쓰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로제가 그 모습에 가만히 웃은 뒤,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준비는 내일부터 하시면 되죠.”

“안 돼. 나, 챙길 거 많아. 토끼 인형도 넣어야 하고. 저기, 노란색 리본이랑 파란색 리본도 갖고 가야 하고. 그리고 다람쥐 그려진 담요도 가져갈 거고.”

“내일 저랑 같이 챙겨요, 공녀님. 오늘은 이만 주무시고요.”

“우움…….”

플리타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대답하기를 미루었다. 로제가 무릎에 손을 짚고 허리를 숙인 채 웃었다.

“지금 가방을 챙기고 싶으세요?”

“응!”

“그럼 어쩌죠? 하아암, 저도 같이하고 싶은데…… 자꾸 졸려서. 공녀님이랑 짐을 같이 싸면 재미있을 텐데, 아쉽네요. 저는 자러 갈게요.”

로제가 일부러 입을 벌려 하품을 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플리타의 연녹색 눈이 흔들렸다.

“로제, ……졸려?”

“예. 오늘 좀 피곤했거든요.”

로제는 눈을 찡그리며 제 어깨를 주물렀다. 그 모습을 보던 플리타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열이 나고 아프다는 걸 그제야 다시 기억한 모양이었다.

“그럼 자러 가야지!”

“하지만 공녀님께서 짐을 챙기신다고…….”

“내일! 지금 코오, 자고 내일 할래!”

아이는 짐을 싸고 싶어 졸음까지 참았던 게 무색할 정도로 냉큼 말을 바꿨다. 그러더니 두 손으로 이불을 끌어당기고는 그대로 드러누웠다.

“나 잘 거야. 그러니까 로제도 얼른 가서 자.”

“……정말 그러셔도 돼요?”

“응! 푹 자야 안 아파. 그러니까 빨리 가서 자.”

아이의 고운 마음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로제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저 하고 싶은 걸 꾹 참으면서까지 배려하는 마음이 너무나 예뻤다.

‘엄마가 곁에 있어주지도 못했는데, 우리 아기 어쩜 이렇게 예쁘게 잘 자랐을까.’

로제는 플리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러자 플리타가 두 눈을 꼭 감더니 이내 다시 실눈을 뜨고 뭔가를 망설이듯 우물쭈물 입을 달싹였다.

“왜요, 공녀님?”

“……자장가 불러줄 수 있어?”

로제더러 얼른 가서 자라고 해 놓고 자장가를 불러 달라고 말을 하는 게 창피했나 보다. 로제는 아이의 새빨개진 얼굴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죠.”

숲 속의 새들이 모두 날개를 접고 둥지로 돌아갔어요.

해님은 저 산 뒤편으로 쏘옥 숨었고요.

새하얀 구름도 양 떼 노니는 들판으로 내려앉아 잠을 청하네요.

아기는 엄마 품에 안겨 하늘을 보아요.

새들도 해님도 구름도 모두 잠을 자러 간 사이,

달님과 별님이 아기의 꿈속에 함께 놀자 찾아왔어요.

“……으응.”

로제가 가만히 노래를 부르다가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자장가를 듣던 플리타가 어느새 쌔근쌔근 잠이 들어 있었다. 꿈속에서 먼저 여행이라도 하는 건지 아이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있는 게 보였다.

“……잘 자렴, 아가.”

로제는 플리타의 뽀얀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다가 아주 작게,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 * *

-새하얀 구름도 양떼 노니는 들판으로 내려앉아 잠을 청하네요. 아기는 엄마 품에 안겨 하늘을 보아요.

“…….”

자장가를 부르는 목소리는 꽤 듣기에 좋았다. 아주 높지도, 그렇다고 낮지도 않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였을까.

헤이번은 문에 기대어 자장가를 부르는 목소리를 듣다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감았다. 늘 굳어 있던 입가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달님과 별님이 아기의 꿈속에 함께 놀자 찾아왔어요.

그러나 그 순간, 여자의 목소리가 끊겼다. 아마도 플리타가 잠이 든 모양이었다. 한 박자 늦게 헤이번이 감고 있던 두 눈을 떴다. 마치 깊은 잠이라도 자고 일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따사로운 아침 햇살에 기분 좋게 눈을 뜨면 제 곁에는 언제나 소중한 누군가가…….

무심코 뻗어나가려던 생각이 문 너머에서 다가오는 발소리에 중단되었다. 헤이번은 황급히 문에서 서너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고 로제가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아이의 잠을 깨우지 않겠다는 듯 까치발을 한 채 밖으로 나오다가 제 앞에 서 있는 구둣발을 보고 시선을 들었다.

“대, 대공 전…….”

로제가 헤이번을 보고 깜짝 놀라 그를 부르려다가 잠든 아이를 떠올리고는 두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헤이번이 조용히 고갯짓을 했다. 그녀는 서둘러 문을 닫은 뒤, 그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플리타는 잠들었나?”

“예, 전하.”

“평소 이 시간에 자는 건가? 어린아이에게는 늦은 시간인데.”

헤이번이 침실 쪽을 돌아보며 미간을 좁혔다. 아이가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은 게 은근히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로제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가 겉으로는 무심해 보여도 속은 그렇지 않다는 걸 확인할 때마다 어쩐지 안도감이 들었다.

비록 저에 대한 기억을 잃었지만, 눈앞의 남자가 여전히 자신이 알던 그 남자라는 걸 확인하는 것만 같아서.

“로제?”

그 바람에 헤이번의 질문에 곧바로 대꾸하지 못했다. 그녀는 저를 보는 푸른 눈에 그제야 미소를 짓다 말고 서둘러 대답했다.

“아, 아니요. 평소에는 이보다 훨씬 전에 잠자리에 드십니다. 오늘은…….”

“……?”

“오늘은, 여행을 간다는 소식에 들뜨셔서.”

플리타가 저를 보겠다고 몰래 침실에서 빠져나왔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로제는 헤이번이 아이를 데리고 시찰을 떠나기로 한 결정에 대하여 말하고 싶어 입을 열었다.

“여행?”

“시찰에 공녀님도 대동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래. 하녀장이 얘기한 모양이군.”

헤이번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그를 향해 말했다.

“공녀님께서 그 소식을 들으시고 정말 많이 기뻐하셨습니다.”

“플리타가 기뻐했다고?”

“예. 첫 가족 여행이라고…….”

그녀의 말을 듣던 헤이번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찌 보면 민망한 것도 같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안타까워하는 것도 같았다. 또한 어딘지 모르게 미안해하는 기색도 있었다.

그 모든 감정을, 로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비가 되어 아이와 여행 한번 가지 않았다는 민망함, 그리고 그런 아이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것일 터.

‘괜찮아요, 헤이번. 앞으로 좋은 아빠가 되어주면 돼요. 내가 주지 못한 사랑까지 당신이 전부 줘요. 아이가 엄마의 빈 자리를 느끼지 않도록. 당신이 그렇게 해 줘요.’

그녀는 그를 향해 속으로 간절한 바람을 전했다. 자신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라면 잘할 테지만.

“……그렇군.”

헤이번이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마치 그녀가 소리 없이 전한 바람에 대한 대답을 하듯이. 물론 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는 걸 그녀 스스로 너무나 잘 알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맞춰 나온 그의 대답에, 로제는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달빛이 복도 창문을 지나 그와 그녀의 머리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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