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아이는 그저 하루 종일 보지 못한 하녀를 보고 싶단 마음에 홀로 무서움을 이기고 고용인들의 숙소 근처를 기웃거렸을 테지만, 사람들은 삐딱한 시선으로 아이를 제멋대로 볼 테니까.
유모가 바로 그 대표적인 사람 아니던가.
“공녀님.”
“……응?”
플리타가 로제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르다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달빛 아래 아이의 연녹색 눈동자가 그저 맑기만 했다. 그런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정말 싫었다.
“앞으로는 아까처럼 그렇게 함부로 오시면 안 돼요. 특히 밤중에는, 아무리 저택 안이라도 막 돌아다니고 그러시면 절대 안 돼요. 아셨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재차 당부해야 했다. 아이가 그런 사람들의 편견 어린 시선을 받는 게 싫어서. 제 소중한 아이가 함부로 내뱉는 말을 듣는 게 싫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어둠 속을, 어린아이 홀로 걷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저랑 약속하시는 거예요?”
“으응……. 그치만, 로제 보고 싶으면 어떡해?”
플리타가 로제의 말을 듣고는 볼을 부풀린 채 대답하기를 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갈게요.”
“오늘은 안 왔잖아. 아침부터 쭉 기다렸는데.”
플리타의 입술이 삐죽거렸다. 애써 내색하지 않던 서운함이 저도 모르게 표출된 듯했다. 로제가 플리타의 앞에 무릎을 접고 앉아 다짐하듯 말했다.
“다음부터는 무조건 공녀님께 갈게요.”
‘잠든 얼굴이라도 보러 갈게, 아가. 엄마가 살아 있는 한은, 아니, 죽은 후에도…… 항상 네 곁에 있을게.’
로제는 입 밖으로 할 수 없는 말들을 속으로 삼켰다. 그러자 플리타가 동그란 눈을 좌우로 굴리더니 작게 말을 꺼냈다.
“진짜?”
“예. 약속해요.”
로제가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자 그제야 안심한 듯 플리타의 표정이 풀어졌다.
바로 그때였다. 계단 아래쪽에서 누군가의 발소리와 함께 불빛이 드리운 것은.
로제와 플리타의 고개가 동시에 그쪽으로 향했다.
“하, 하녀장님!”
계단 아래에서 올라오는 이의 얼굴을 확인한 로제가 황급히 일어섰다.
“거기, 누구……. 공녀님?”
하녀장이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등불을 높이 들더니 이내 깜짝 놀라 황급히 계단을 올라왔다. 평소 표정의 변화가 크지 않은 하녀장이기에 그 변화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이 늦은 시간에 어찌 주무시지 않고 나오신 겁니까. 로제, 어떻게 된 일이냐?”
하녀장이 나무라는 듯한 시선으로 로제를 쳐다보았다. 로제는 냉큼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녀장님. 제가…….”
“내가 로제 보러 갔었어!”
로제가 제 잘못이라 말하려는 순간, 플리타가 냉큼 그녀의 앞에 서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혹시 저로 인하여 로제가 야단을 맞으면 어쩌나 싶어 다급한 아이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닙니다, 하녀장님. 사실은 제가 공녀님을 오늘 한 번도 뵙지 못해서, 괜히 뵙고 싶은 마음에…….”
“아니야! 내가 로제 보고 싶어서 몰래 나왔어. 그래서 로제가 나 다시 방까지 데려다준다고 그런 건데.”
플리타와 로제가 서로 제 잘못이라며 우기는 광경을, 하녀장은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자 두 사람이 동시에 목을 쏙 집어넣었다.
“일단 침실로 가시지요, 공녀님. 계단에서 이러고 계시는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할까 걱정됩니다.”
하녀장이 서로를 닮아 있는 그 모습을 보다가 한층 누그러든 투로 입을 열었다. 플리타가 하녀장과 로제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어두우니 계단 조심하시고요.”
“으응.”
등불을 든 하녀장이 앞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니, 불빛 덕분에 계단이 조금 더 환해져 올라가는 게 수월했다.
‘등불을 생각 못 했어.’
로제는 제 실수를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아이를 침실까지 데려다주는 것만 신경을 썼지, 등불을 챙겨 나와야 한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녀가 민망함에 재차 얼굴을 붉히는 순간, 플리타가 로제의 손을 잡아끌더니 소곤대며 물었다.
“로제, 또 아파?”
“예?”
“손이 더 뜨거워졌어.”
“아……. 그런 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열이 더 오른 건 아니었다. 물론 여전히 열이 나고 있는 터라 어지럼증이 일기는 했지만, 지금 이것은 그저 민망함에 따른 반응일 뿐이었다.
“아닌데. 진짜 열이…….”
플리타가 웅얼거리며 다시금 반박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침실 앞에 다다른 것이다. 로제 역시 플리타와 소곤대는 걸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하녀장이 침실 문을 열고는 옆으로 비켜섰다. 플리타가 하녀장을 힐끔 보다가 냉큼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로제와 하녀장이 방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플리타가 홀로 빠져나왔던 침대 위는 이불이 반쯤 바닥으로 흘러내린 상태였다. 로제가 곧바로 침대로 다가가 흐트러진 이불을 정리하고 아이의 잠자리를 다시금 정돈했다.
“공녀님.”
“응!”
플리타를 부르자마자 아이가 침대 위로 올라왔다. 하녀장이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아, 하고 외마디 소리를 내더니 입을 열었다.
“이건 내일 알려드려도 될 소식이기는 한데…….”
“응?”
플리타가 얌전히 로제가 덮어준 이불 속에서 눈만 깜빡이고 있다가 문득 들려온 하녀장의 말에 호기심을 보였다. 하녀장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플리타를 향해 말을 이었다.
“내일 선왕비전하와 공작 부인께서 떠나실 예정입니다.”
“……?”
플리타의 침대 옆에 서 있던 로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녀장을 보았다.
하루 종일 선왕비의 시중을 들었지만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공작부인과의 티타임에서도 전혀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는데, 선왕비가 언제 그런 결정을 내린 건가 싶었다. 물론 자신이 모든 걸 알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정말?”
그래도 다행이었다. 로제는 하녀장의 말에 반색하는 아이를 보며 안도했다. 또다시 선왕비의 부름을 받아 시중을 들 일도 없을 테고, 아이 역시 선왕비와 공작 부인의 눈치를 보느라 마음고생 하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로제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는데, 하녀장이 또 다른 소식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모레, 대공 전하께서 시찰을 떠나실 예정입니다.”
‘……시찰?’
로제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플리타는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로서는 딱히 놀라워할 만한 소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 아비가 정기적으로 영지를 시찰하는 것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하녀장의 이야기에는 로제뿐만 아니라 플리타조차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번 시찰에는 공녀님도 함께 가시게 되었습니다.”
“……어엉?”
“……예?”
플리타의 연녹색 눈이 크게 뜨였다. 그와 동시에 로제가 비슷한 표정으로 하녀장을 보았다. 하녀장은 별것 아니라는 듯 덤덤한 얼굴로 로제에게 지시했다.
“그래서 네가 공녀님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제, 제가요?”
“그래. 또한 유모는 대공 저에 남게 되었으니, 공녀님을 따라가는 네 책임이 더욱 막중해졌음을 유념하거라.”
“……!”
로제의 눈이 더욱 커졌다. 그녀가 뭐라 말을 하려고 입을 열려는 순간, 그보다 먼저 플리타가 이불 속에서 나오더니 냉큼 일어나 앉은 채 말을 꺼냈다.
“로제, 그럼 우리 놀러 가는 거야? 아빠랑 나랑 로제랑, 다 같이?”
“놀러 간다기보다는, 시찰의 목적으로…….”
로제가 어리둥절한 와중에도 플리타의 물음에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플리타는 신이 나서 로제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짝짝, 박수를 치며 외쳤다.
“우와! 가족 여행이다! 그치? 나, 가족 여행 처음 가는 거야!”
평소 소심하고 얌전하던 아이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의외였는지 하녀장마저도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표정을 가다듬은 뒤, 로제를 돌아보았다.
“…가족, 여행.”
아이가 말한 것을 따라 하듯 중얼거리는 로제가 보였다. 정신을 빼놓기라도 한 것인지 멍한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내심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는지 평상시 창백하던 얼굴이 상기되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아니, 단순히 설레는 마음에 상기되었다기에는…….’
하녀장은 로제의 눈가가 붉어진 것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관심을 거두고는 당부조로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런 줄 알고 미리 준비하거라. 공녀님께서 여행 도중에 불편함을 느끼시지 않도록 필요한 것들을 꼼꼼히 챙기도록 하고.”
그제야 로제가 정신을 차리고는 제 눈가를 손으로 문지른 뒤,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녀장님. 그리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공녀님, 밤이 깊었으니 이만 주무시지요.”
하녀장은 플리타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몸을 돌렸다. 하지만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에 뭔가를 떠올리고는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다.
“참! 로제.”
“아, 예?”
로제가 또다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하녀장의 부름에 황급히 표정을 고치고는 그녀를 보았다. 하녀장이 로제를 위아래로 살피다가 미간을 좁힌 채 물었다.
“열이 난다고 한 것 같던데.”
“……?”
로제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한 모습에 하녀장이 설명을 덧붙였다.
“아까 공녀님과 네가 나눈 대화를 들었다. 일부러 들으려던 건 아니지만.”
“아…….”
침실로 오는 도중에 플리타가 제 걱정을 하며 물었던 말을 들은 모양이다. 로제가 민망함에 뺨을 문지르다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냥 조금 피곤하여…….”
서둘러 해명하려는 로제의 말에 하녀장이 무뚝뚝한 투로 입을 열었다.
“스스로 제 몸을 잘 돌보는 것 역시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의무라 할 수 있다.”
“…….”
“조금 피곤하다, 그렇게 가볍게 생각했다가 혹여 네가 앓아눕기라도 하면 네가 모시는 공녀님의 시중은 누가 들겠느냐? 또한 전염될 수 있는 병에 걸렸는데 그것을 모르고 있다가 공녀님께 옮기기라도 하면?”
하녀장의 말에 로제가 말문이 막혀 입을 꾹 다물었다. 모아 잡은 두 손이 가늘게 떨렸다. 하녀장이 제 몸 상태를 알아차리고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그 말이 마치 비수처럼 가슴속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