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어두컴컴한 밤이잖아요. 무섭지 않으셨어요?”
“……조금. 그래도 꾹 참았어!”
플리타가 연녹색 눈을 굴리다가 용감하게 말했다. 로제는 그런 아이를 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안심한 듯 아이의 표정이 풀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금 표정을 굳히고는 당부조로 말했다.
“다음부터는 이러시면 안 돼요, 공녀님. 어두운데 계단을 잘못 딛고 넘어지시기라도 했으면 어떡해요.”
“조심했어. 진짜야. 그러니까 화내지 마. 로제 보고 싶어서 왔는데.”
플리타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더니 로제의 팔을 꼭 잡고 흔들었다. 로제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무릎을 펴고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가셔야죠. 침실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히잉. 벌써?”
플리타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을 내밀고는 잡고 있던 로제의 팔에 매달렸다. 그러다가 이윽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그녀의 팔을 잡았던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
“왜 그러세요?”
“로제 팔이 따끈따끈해.”
“예?”
“이리, 얼굴 좀. 이리로.”
플리타가 까치발을 하고는 손을 위쪽으로 뻗었다. 로제가 영문을 몰라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아이가 하라는 대로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아이가 장난기를 거두고는 나름대로 진지하게 로제의 이마에 제 손을 가져갔다.
“열이 나잖아! 이마가 뜨거워!”
플리타가 깜짝 놀라 손을 떼더니 발을 동동 굴렀다. 로제는 그제야 자신이 열이 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 상태가 좋지 않더니 열이 나는 모양이었다.
“내가 지금 당장 주치의를 불러올…….”
“아니요, 공녀님! 괜찮아요.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로제는 플리타가 당장이라도 주치의를 부르려는 듯 몸을 돌리려고 하자 화들짝 놀라 아이를 만류했다.
“그냥 푹 자고 일어나면 돼요.”
“아니야! 열나면 치료해야 돼. 아픈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피곤해서 열이 나는 거예요.”
“……진짜?”
플리타가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채 물었다. 로제가 일부러 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이 정도 열은 이불 덮고 푹 자고 일어나면 내려가는걸요. 그러니까 공녀님, 이제 그만 침실로 가실까요?”
로제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플리타는 눈물이 맺힌 상태로 로제를 빤히 올려다보더니 제 손을 뒤로 감추며 외쳤다.
“아니야!”
“공녀님.”
“아니야. 안 가.”
플리타는 입을 꾹 다물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고는 다부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로제 방에 들어가. 내가 코오, 해 줄게.”
“예?”
“코오, 하고 토닥토닥해 줄게. 푹 자면 낫는다며. 이렇게 토닥토닥하면 잠 잘 오잖아. 로제가 나한테 해 준 것처럼.”
플리타가 뒤로 감췄던 손을 내밀어 로제의 허리 주변을 조심스럽게 다독거렸다. 그 손길에 눈물이 왈칵 나오려 했다.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품에 꼭 안고 싶었다.
‘어쩌면 좋을까. 우리 아이. 내 아기. 이 예쁜 마음을 어떡하면 좋아.’
아이는 간절한 표정으로 로제를 올려다보았다. 그 간절한 마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 저 역시 아이와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은 건 사실이었다. 로제는 간신히 눈물을 참은 뒤,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음……. 그럼, 잠깐만 들어왔다가 가시는 거예요.”
“응.”
“약속하시는 거죠?”
“응, 약속할게! 새끼손가락 걸고.”
아이는 단풍잎을 닮은 제 손을 내밀었다. 로제는 아이와 손가락을 걸어 약속한 뒤, 방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우와아.”
플리타가 문이 열리자마자 작은 방 안으로 냉큼 뛰어 들어갔다. 볼 것 하나 없는 썰렁한 방인데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아이는 신이 나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방 안 곳곳을 탐험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창틀을 짚고 까치발을 하더니 밖을 내다보며 우와아, 하고.
화장대 겸 책상으로 사용하는 작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엎드리더니 또 우와아, 하고.
침대로 다가가 이불 위에 제 뺨을 문지르며 또다시 우와아, 하던 플리타가 그제야 방에 들어온 목적을 떠올렸는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침대 위를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리며 로제에게 말을 건넸다.
“로제, 여기 와서 누워.”
로제는 사랑스럽다는 듯 눈웃음을 지으며 아이를 바라보다가 아이의 말에 순순히 침대로 다가갔다.
“여기, 이렇게 침대에 누워.”
플리타가 로제의 손을 잡아끌었다. 로제는 살짝 웃은 뒤, 아이가 하라는 대로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그러자 플리타가 이불을 낑낑대며 끌어다가 로제의 몸 위에 어설프게 덮어주더니 이내 작은 손으로 그녀를 토닥이기 시작했다.
“코오, 자. 아프지 말고.”
아이의 다정한 말에 또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나오려 했다.
행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글펐다. 떨쳐내려 해도 자꾸만 들러붙는 욕심 때문이었다.
이대로 하룻밤만이라도 아이와 잤으면 하는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아이를 품에 끼고 누워서 아이에게 옛날이야기도 들려주고, 하품을 하는 아이에게 자장가도 불러주고, 그러다가 아이가 잠이 들면 쌕쌕거리는 그 숨소리를 들으며 저도 잠을 청하는, 그런 하룻밤이 너무나 간절했다.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닌, 아이와의 평범한 일상이.
결코 제게 허락될 수 없는 욕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침대 위로 올라오라고 할까. 아주 잠깐만 품 안에 재운다면, 아이와 나, 단둘만의 비밀로 한다면 아무도 모를 텐데.’
로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가는 욕심을 억누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그녀를 토닥이던 플리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머나, 정말 아픈 게 나았어요.”
“정말?”
플리타가 더욱 눈을 크게 뜨더니 직접 제 손으로 확인하겠다는 듯 침대 위로 잉챠, 하고 소리를 내며 올라왔다. 그리고 손을 들어 로제의 이마를 만져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뜨거운데?”
“아니에요. 열이 조금 내렸어요. 이거 보세요. 이마가 조금 차가워진 것 같지 않으세요?”
로제가 일부러 호들갑스럽게 제 이마에 손을 대며 웃었다. 그러자 플리타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로제의 이마를 만져 보았다. 꼬물꼬물 움직이는 손가락의 감촉에 이마가 간지러웠다.
“우웅…….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확신할 수 없다는 듯 아이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더니 한 번 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제 이마와 로제의 이마를 번갈아 만져보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로제의 말이 거짓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이가 제게 보내는 그 신뢰에 가슴이 먹먹해진 로제가 입을 꾹 다물었다가 뒤늦게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공녀님. 공녀님께서 토닥토닥해 주셔서 열이 금방 내렸어요.”
“어, 우움. 다음에도 열나면 나한테 말해, 로제. 괜히 혼자 아프지 말고.”
플리타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더니 이내 뿌듯한 표정으로 덧붙여 말했다. 가슴을 쫙 편 채 어깨까지 으쓱이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
“예, 그럴게요.”
로제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힘든 하루였다.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였다. 아마 플리타가 저를 보겠다고 이곳까지 오지 않았더라면, 기절하듯이 침대 위에 쓰러져 그대로 잠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잠을 자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온몸에 힘이 생겼다. 언제 지쳤던가 싶게 활력이 넘쳐흐르는 느낌이었다.
아이가 전한 온기가, 그 다정한 마음이, 제게는 그 어떤 약보다도 효과 좋은 약이기에.
로제는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침대 위에 엉거주춤 엎드려 있던 플리타가 덩달아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럼 이제 약속대로 침실로 돌아가셔야죠?”
“……으응.”
플리타의 눈꼬리가 아래로 처졌다. 로제가 그런 아이를 다독이고는 제 새끼손가락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약속하셨잖아요.”
“……알아. 나 약속 지켜.”
플리타는 로제와 약속을 했던 새끼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아쉬운 듯 입술을 삐죽이다가 엉금엉금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로제 역시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플리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럼 방까지 손 잡고 갈래.”
“예, 공녀님.”
로제가 웃으며 플리타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서려는 순간, 플리타가 아쉬운 마음에 방을 다시금 돌아보다가 뭘 발견했는지 침대 위를 가리켰다.
“어, 저거 뭐야?”
“예? 뭘, 아…….”
이런. 로제는 침대 위를 보고는 눈을 찡그렸다. 하녀복 주머니 속에 넣어둔 팔찌가 조금 전 눕는 과정에서 밖으로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저거, 큰엄마 거…… 아니야? 맞지?”
플리타가 팔찌만 보고도 겁을 먹은 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로제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데 저게 왜 로제한테 있어?”
“그러게요. 돌려드려야 할 텐데……. 잠시만요, 공녀님.”
로제는 침대 위의 팔찌를 주워 테이블 옆의 작은 수납장으로 다가갔다. 플리타가 로제의 손을 놓지 않고 졸졸졸 따라와 고개를 내밀고 그것을 구경했다.
“여기 넣어두는 거야?”
“예. 선왕비전하께 돌려드리기 전에, 일단 보관해둬야 할 것 같아서요.”
“왜 지금 못 돌려줘?”
“제게 과분한 물건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그래도 가지고 있으라 하시네요.”
로제는 재차 쓴웃음을 지은 뒤, 팔찌가 든 서랍을 닫았다. 그러고는 다시 돌아서서 플리타를 향해 말을 건넸다.
“자, 그럼 이제 진짜로 가셔야죠?”
“……에휴, 으응.”
플리타가 머뭇거리다가 이내 작은 입을 벌려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 흉내를 내는 것 같은 모습에 로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귀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아이가 안쓰러웠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아이가 바라는 대로 해 줄 수는 없었다. 저 역시 바라는 일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안 되는 일이었다.
자신이 아이의 어미로서 당당히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상.
그녀는 플리타의 자그마한 손을 쥔 채 방을 나섰다. 모두가 각자 숙소에 들어가 있는 탓인지 복도는 고요했다. 그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고 플리타가 누군가의 눈에 띄었더라면 괜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아이에게 상처가 될 말을 하였을지도 모른다.
역시 천한 핏줄이라 그런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