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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37화 (37/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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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이 호들갑스럽게 이자벨라를 찬양했다. 이자벨라는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며 인사를 하고는 다시 로제를 향해 손짓을 했다.

“이리 좀 가까이 오려무나.”

“……예?”

“가까이 오라는데 뭘 그리 놀라니? 생각난 김에 줄 것이 있어서 그래.”

이자벨라가 상냥한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로제는 저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깔린 한기를 느꼈다. 물론 그렇다 하여 그녀의 부름을 거역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로제는 어쩔 수 없이 이자벨라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이자벨라가 제 팔에 차고 있던 팔찌를 풀더니 로제의 팔을 끌어당겼다.

“서, 선왕비전하!”

로제가 깜짝 놀라 팔을 빼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이자벨라가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에 제 팔찌를 채웠다. 이자벨라의 붉은 머리만큼이나 새빨간 루비가 묵직한 무게감을 자랑하며 반짝였다.

“네 손목이 가늘어서 잘 어울리는구나.”

“선왕비전하, 이, 이 팔찌는…….”

“플리타의 목숨을 구한 상으로 주는 것이니 받도록 하려무나.”

“……예?”

이자벨라의 말을 듣던 로제가 눈을 크게 뜨더니 황급히 팔찌를 풀려 했다.

“과분합니다, 선왕비전하. 게다가 대가를 바라고 공녀님을 구한 것도 아니었고요. 저는 그저 공녀님께서 무사하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가를 바란 게 아니라니. 하지만 너는 이미 헤이번에게서는 대가를 받았잖니?”

이자벨라가 손을 들어 로제의 행동을 막은 뒤, 우습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녹색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덧붙여 말했다.

“플리타의 전담 하녀가 되었으면서 말이야. 따지고 보면 이런 팔찌 하나보다 공녀의 전담 하녀 자리가 더 과분한 것 아니니?”

“그건 아니지요, 선왕비전하. 진짜 고귀한 핏줄의 전담 하녀라면 모를까. 반쪽짜리 공녀의 전담 하녀 자리를, 어찌 선왕비전하께서 아끼시는 팔찌와 비교하겠습니까.”

그때, 공작 부인이 끼어들어 말을 얹자, 이자벨라는 공작 부인을 향해 손사래를 쳤다.

“공작 부인이야말로 제게 과분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이런 팔찌가 뭐 대단한 것이라고요.”

“대단하지요. 선왕비전하를 위하여 우르트너 공이 특별히 선물한 것 아닙니까? 늙은 눈으로 보기에도 확연히 알아볼 수 있는데요. 그 루비의 선명한 색깔과 광채를 말이에요.”

공작 부인의 시선에 순간적으로 탐욕이 스쳤다. 한낱 하녀가 하기에는 너무나 귀한 물건이었다. 공작 부인은 저도 모르게 입이 말라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자벨라가 그런 공작 부인의 속내를 짐작하고는 조소가 나오려는 걸 애써 감췄다. 그러고는 다시 로제를 향해 상냥한 투로 입을 열었다.

“어쨌든 받도록 하렴. 헤이번의 아이를 구한 것만으로도 너는 그 팔찌를 가질 자격이 있으니까.”

“그, 그렇지만 선왕비전하.”

할 수만 있다면 당장 팔찌를 풀어버리고 싶었다. 자신이 받을 물건이 아니었다. 로제는 입술을 깨물며 이자벨라를 쳐다보았다.

“왜, 헤이번이 주는 건 잘 받았으면서. 내가 주는 건 받기 싫은 거니?”

웃으며 건네는 물음이었지만, 그 말 속에서 날카로운 가시를 느낄 수 있었다. 로제는 고개를 저으며 서둘러 해명하려 했다.

“그런 게 아니라.”

헤이번이 제게 제시한 것은 플리타의 곁에 있을 기회였기에 그랬다. 죽기 전, 아이의 옆에서 잠시나마 있을 수 있어서. 아이를 조금이라도 돌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그래서 제게 과분한 자리라는 걸 알면서도 전담 하녀가 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이건, 제게 아무런 의미도 될 수 없었다. 화려한 보석 따위를 욕심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더구나 선왕비가 주는 것이기에 더욱 그랬다.

로제는 팔찌를 찬 손목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꽁꽁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선왕비가 저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걸 알면서도, 제 손목에 채워진 이 팔찌가 자신을 옥죄는 것만 같아 두려움이 엄습했다.

들키는 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 들켜서 쫓겨날 일이 두려웠다. 헤이번과 플리타를 더 이상 보지 못하고 내쫓기게 될까 봐. 그래서…….

“쯧, 선왕비전하께서 주시는 것이다! 어찌 그것을 감히 거절하려 드는 게야? 넙죽 엎드려 감사하다 인사는 올리지 못할망정.”

로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걸 못마땅한 시선으로 보던 공작 부인이 매섭게 나무랐다. 그와 동시에 로제가 체념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감사, 합니다.”

“뭘, 별것도 아닌데.”

이자벨라가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미간에는 살짝 주름이 잡혀 있었다.

‘팔찌 하나 정도로는 안 된다, 그건가. 생긴 것과 다르게 욕심이 꽤 많네. 착한 척, 욕심 없는 척 굴면서. ……그런 순진한 표정으로 헤이번을 꾀려 한다, 그거지?’

이자벨라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로제를 바라보다가 플리타의 유모가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제 하녀였다면 당장 저 순진한 척하는 얼굴 가죽을 긁어 벗겨내었을 터였다. 혹은 기분 나쁜 저 녹색 눈을 파버렸든가.

이곳이 대공 저라는 사실이, 그리고 저 건방진 하녀가 대공 저의 고용인이라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뭐, 그래도 자꾸 눈에 거슬리면 어떻게든 치워버리면 될 일이고.’

그래 봤자 하녀에 불과하니까. 이자벨라는 로제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찻잔을 들었다. 천한 계집을 치워버리는 값으로 팔찌 하나 버리는 셈 쳤다고 하면 될 일이었다.

* * *

어느새 창밖이 캄캄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저녁노을이 붉게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새 어둠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로제는 계단을 내려가다가 중간쯤에 문득 멈춰 서서 어두운 창밖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온 달빛이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그래서일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그녀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 보였다.

실제로 고된 하루이기도 했다. 몸도, 그리고 마음도.

아니, 몸보다는 마음이 더 힘들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터였다. 트집을 잡으며 괴롭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과한 관심을 보이며 친절을 베푸는 선왕비의 변덕에 하루 종일 휘둘렸으니 말이다.

거기에 다른 대공 저 하녀들의 질시 어린 시선까지 받았다. 물론 그들의 마음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선왕비의 지목을 받아 그 시중을 드는 건 영광스러운 일일 테니까. 그것을 제게 빼앗겼다고 생각한 이들의 시선과 말이 곱지 않은 건 너무나 당연했다.

……자신은 결코 바라지 않은 영광이었지만.

“후우…….”

하루 종일 선왕비의 시중을 들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탓일까.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옆머리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그러나 그녀의 발걸음은 계단을 하나 남겨둔 채 다시금 멈췄다.

‘……플리타는 자고 있을까?’

로제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위층으로 향했다.

오늘 단 한 번도 아이를 보지 못했다. 그럴 새도 없었다. 선왕비는 사소한 것까지 전부 저를 시키고, 본인의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으니 말이다.

‘보러 가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겠지.’

아주 늦은 밤은 아니지만, 어린아이에게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그러니 지금 가 봤자 아이를 보지 못할 터였다. 자칫 곤히 잠든 아이를 깨울 수도 있고.

로제는 미련이 남은 눈으로 플리타의 침실이 위치한 층을 잠시 올려다보다가 억지로 시선을 거두고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숙소로 향하는 로제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아침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던 몸이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는 듯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로제는 축축 늘어지는 몸을 억지로 끌고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제 팔을 내려다보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팔에 채워진 팔찌를.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하지.”

로제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선왕비와 공작 부인의 강요로 인해 그냥 팔찌를 차고 올 수밖에 없었다.

“후우…….”

로제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고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눌렀다. 지금으로서는 제게 어떤 선택지가 없었다. 아니, 앞으로도 있을지 미지수였다.

아랫사람에게는 ‘거절할 자유’조차 없으니까.

“……나한테는 너무 과한 물건인데.”

그래서인지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뚜렷한 형체는 없지만, 언젠가 제게 좋지 않은 일을 불러올 것만 같은 예감.

‘……괜한 생각이야.’

로제는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그 예감을 애써 털어냈다. 그리고 팔찌를 풀어 치마 주머니에 넣은 뒤, 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때였다.

우다다다,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달려오더니 냉큼 로제의 두 다리를 끌어안았다. 작은 몸이 주는 따스한 체온이 금세 그녀에게 전달되었다.

“……공녀님?”

굳이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제 아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 이곳에 플리타가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로제는 깜짝 놀라 무릎을 굽히고 앉아 아이와 눈을 맞추었다. 플리타가 로제와 시선이 마주치자 반달 모양으로 눈을 접으며 웃었다.

“여기는 어떻게 오신 거예요? 더구나, 지금 주무셔야 하는 시간인데.”

“로제 보고 싶어서 몰래 왔어. 유모 나갈 때까지 자는 척하고 있다가.”

플리타는 태연한 표정으로 헤헤, 하고 웃더니 이불을 눈 아래까지 끌어올려 덮고 자는 시늉을 했다. 그 장난스러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로제는 덩달아 웃지 못했다.

로제의 굳은 표정을 본 플리타가 서서히 웃음을 그치고는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입에 문 채 로제의 눈치를 살피다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한 거야? 난 그냥, 로제 못 봤으니까. 오늘 하루 종일. 그래서, 우웅, 보고 싶어서.”

“저도 보고 싶었어요.”

로제는 울먹이는 아이를 다독였다. 그러자 플리타가 입을 삐죽거리다가 다시금 물었다.

“그런데 왜 화났어?”

“화난 거 아니에요. 다만…… 여기는 공녀님께서 오실 곳이 아니라서 그래요.”

“로제 방에 온 건데?”

“고용인들의 숙소에 공녀님께서 이렇게 오시면 안 되거든요. 게다가 어두컴컴한 밤이잖아요. 무섭지 않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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