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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의 입에서 또다시 하녀의 이름이 나오려 했다. 집사는 그 사실에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 그러나 하녀장은 표정의 변화 없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예, 전하.”
“……그렇군.”
뭔가 못마땅한 듯 헤이번이 한 박자 늦게 대꾸하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톡, 톡.
손끝으로 책상을 두어 번 두드리던 헤이번이 고개를 흔들더니 화제를 돌렸다.
“참, 그나저나 시찰을 위한 준비는 잘 되고 있나?”
“아! 예, 전하. 차질 없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호위를 위한 병력 역시…….”
집사가 기다렸다는 듯 보고를 했다. 하녀장이 그 옆에 서서 집사의 보고가 마무리되기를 기다렸다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입을 열었다.
“전하, 한 가지 말씀을 드려도 되겠는지요.”
“물론.”
헤이번이 하녀장을 쳐다보더니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하녀장은 그의 승낙에도 불구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답지 않은 태도에 헤이번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 하녀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번 시찰 때 공녀님도 데리고 가시면 어떠신지요.”
“……플리타를?”
뜻밖의 말에 헤이번이 미간을 좁혔다. 집사 역시 의외의 말이었는지 눈을 크게 뜨고 하녀장을 쳐다보았다. 하녀장은 두 사람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말을 이었다.
“예, 전하. 공녀님께서 지금껏 여행 한번 가 보신 적이 없지 않습니까. 다양하게 보고 듣고 느끼며 경험을 쌓으셔야 할 나이에 너무 대공 저 안에서만 갇혀 지내시는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이를 가두어두라고 지시한 적 없는데.”
하녀장의 말을 듣던 헤이번이 눈을 찡그렸다. ‘갇혀’ 지낸다는 말에 불쾌해진 게 틀림없었다. 하녀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더구나 감히 어느 누가 공녀님을 가두어둘 수 있겠는지요.”
아무렴. 집사가 하녀장의 말을 듣다가 그렇게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녀장이 그 모습을 힐끗 보더니 말을 덧붙였다.
“다만.”
“……다만?”
헤이번의 시선이 하녀장에게 향했다.
“공녀님은 어리십니다. 보호자인 어른의 허락 없이는 마음대로 밖을 나갈 수 없으시지요. 아니, 허락뿐만 아니라 어른이 동행하지 않는 이상 외출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건 당연한 일 아닌가. 플리타가 평범한 어린아이도 아니고.”
대공의 딸. 왕위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아비를 두었으니, 그만큼 보호받아야 할 터였다. 온갖 사람들이 아이에게 접근할 테니 말이다. 제 덕을 보기 위해서든, 혹은 저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에서든.
“그러니 마땅히 감수해야 할 부분이야. 어리다고 하여 예외일 수는 없지.”
그렇게 말하던 헤이번이 쓴웃음을 삼켰다. 자유롭게 살고 싶다며 반항하던 자신에게 부모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오른 탓이었다.
「괸터스의 피가 네 몸속에 흐르는 이상, 네가 왕의 자식으로 태어난 이상, 너에게는 지켜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것을 저버릴 수도, 그것에서부터 도망칠 수도 없다는 걸 어찌 모르는 것이냐.」
왕궁을 몰래 빠져나가 바깥 구경을 하고 돌아온 철부지 아들을 나무라며 모친이 했던 말이다. 그 말이 너무나 지긋지긋해서 반항도 많이 했었다.
그런데 지금 제 모습이 당시의 그들과 닮아 있지 않은가. 그에 비하면 제 딸은 자신과 달리 얌전하고 온순한 편이라 할 수 있었다.
하녀장 역시 그런 플리타를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리신데도 불구하고 그 점을 알고 계시니 공녀님께서 지금껏 투정을 부린 적이 없으셨겠지요. 하지만 전하, 요 근래 공녀님께서 조금 더 아이다워지셨다는 걸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
헤이번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하녀장의 말을 부정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하녀장이 가만히 미소를 지은 뒤, 말을 이었다.
“로제가 공녀님의 전담 하녀가 된 뒤로 공녀님께서 더욱 아이다워지셨습니다. 호기심도 많아지셨고, 바깥세상의 이야기에도 관심을 보이십니다. 유모는 그런 공녀님을 보고 천한 하녀에게 물이 들었다며 저를 붙들고 하소연을 하기도 했습니다만……. 글쎄요, 저로서는 그게 꼭 나쁘다고는 생각되지 않더군요.”
“…….”
“전하께서도 그 변화를 직접 체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변화가 싫으셨다면 공녀님과의 저녁 식사를 위하여 업무를 서둘러 처리하거나 일정을 미루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으셨겠지요.”
하녀장의 말에 도무지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헤이번은 미간을 찡그린 채 잠시 침묵했다. 그런 그에게 쐐기를 박듯 하녀장이 재차 덧붙여 말했다.
“이번에 시찰 목적으로 방문하실 미들피온에서는 마침 그 시기와 맞물려 축제가 열린다고 하더군요. 꽤 규모가 큰 축제인 터라 인근 영지에 사는 사람들도 이맘때가 되면 그곳으로 몰려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어린아이들이 좋아하는 길거리 공연도 수시로 열리고요.”
하녀장의 말에 헤이번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간을 좁힌 채 고민하는 주인을 보던 하녀장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집사 역시 제 주인을 보다가 슬그머니 웃음을 지었다.
지금만큼은 그가 대공이 아닌, 그저 어린 딸을 둔 젊은 아빠로 보인 탓이었다.
모든 게 서툴고 어색해 쩔쩔매는, 젊은 아빠.
“흠…….”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른 뒤, 헤이번이 어색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고는 하녀장을 쳐다보았다.
“그 축제란 것에 대해 꽤 많이 알아본 것 같군. 마치,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그럴 리가요.”
하녀장이 순간적으로 움찔거렸지만 이내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본 헤이번이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뭐……. 하녀장의 말대로 하지. 플리타도 같이 가는 것으로 해. 어린애 하나 더 데려간다고 해서 문제될 일은 없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플리타를 돌볼 사람으로는 아이의 전담 하녀만 데려가도록 하지.”
“……유모는 남으라고 할까요?”
하녀장이 헤이번의 지시를 듣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헤이번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유모까지 함께 갈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어제도 유모가 자리를 비웠는데, 아이가 딱히 불편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고.”
오히려 유모와 있을 때보다 로제와 있는 걸 아이가 더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녀장이 그의 말을 듣고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전하.”
“손님들이 가고 나면 바로 다음날이라도 출발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놓게.”
집사와 하녀장에게 지시를 하는 헤이번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조금 상기되었다. 정기적으로 떠나던 시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 *
“대공도 함께하면 좋았을 텐데요.”
공작 부인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이자벨라가 기다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처연한 표정으로 힘없이 대꾸했다.
“그러게요. 그렇지 않아도 티타임에 앞서 하녀장에게 말을 전하라 하였는데…….”
“또 거절했군요.”
말끝을 흐리는 이자벨라를 본 공작 부인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대공이라 하여도 그렇지, 어떻게 선왕비전하께 이런 무례를 저지를 수 있답니까. 제가 다 낯이 뜨겁고 민망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어제저녁 만찬을 제외하고는 얼굴조차 보이지 않고. 아니, 만찬 때도 그 무례라니…….”
“그러지 마세요, 공작 부인. 대공이 보기에 제가 한참 부족하니 그런가 보죠.”
이자벨라가 재차 한숨을 내쉬고는 억지로 웃는 것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모습을 본 공작 부인이 고개를 흔들며 반박했다.
“선왕비전하께서 무엇이 부족하시다고요. 이렇게 아름답고 당당한 여성이신데요. 대공, 아니, 헤이번 그 애가 괜한 고집을 부리느라 선왕비전하만 마음고생을 하시는 거죠. 형제 사이에 무슨 의리를 지킬 게 남았다고. 더구나 이미 죽어버린 형…….”
“공작 부인, 잠시만요.”
이자벨라는 공작 부인의 말을 듣다가 한 손으로 가슴 위쪽을 꾹 누르고는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눌렀다. 그러더니 다시금 손수건을 말아 쥔 채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선왕 폐하 이야기는 안 했으면 좋겠어요. 아직 슬픔을 온전히 털어낸 게 아니라서요.”
“이런, 제가 실수를 했군요.”
공작 부인은 이자벨라의 말에 황급히 사과했다. 그에 적당히 대꾸하면서 두어 번 더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은 이자벨라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리비어스.
제 손으로 죽인, 자신의 남편 이야기를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죽은 자가 산 사람에게 뭘 어떻게 할 수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가급적 그에 대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다.
이자벨라가 다시금 미소를 지으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고치려는데, 공작 부인이 차를 마시다 말고 시중을 들던 로제를 힐끗 보고는 흥미를 보였다.
“참, 네가 공녀의 전담 하녀라고?”
“예? 아, 예, 그렇습니다.”
로제는 조용히 서서 그들의 차 시중을 들다가 갑작스럽게 질문을 받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공작 부인이 그런 로제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보더니 재차 입을 열었다.
“공녀를 구하였다고 들었다.”
“……예.”
“큰일을 하였구나. 비록 반쪽짜리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괸터스의 핏줄인데 자칫 잃을 뻔하였으니.”
공작 부인의 말 속에서 플리타에 대한 멸시가 묻어났다. 그 순간, 굳게 다물려 있던 로제의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이자벨라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입꼬리를 슬쩍 비틀고는 냉큼 끼어들었다.
“그렇죠. 제 자식이라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하기는 힘들 텐데 말이에요. 네가 참 대단한 일을 했어. 이름이…… 로제, 라고 했던가?”
“……예.”
로제가 선왕비의 물음에 당황하여 눈을 크게 떴다가 그대로 내리깔며 대답했다. 선왕비가 제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건가 싶어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혹시 저를 알아보기라도 했나 하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 순간, 공작 부인이 놀랍다는 듯 이자벨라를 향해 말을 건넸다.
“한낱 하녀의 이름도 기억하시는지요. 더구나 왕궁의 하녀도 아닌데.”
“플리타의 목숨을 구한 은인이자 전담 하녀잖아요. 이 정도는 기본으로 알아야지요.”
“세상에……. 헤이번이 선왕비전하의 이런 마음을 알아주어야 하는데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