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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35화 (35/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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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나를 불편해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

“물론 긴장하여 그렇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공녀의 일에 먼저 나서서 배짱 좋게 대꾸하던 너답지 않은 모습이잖니? 그때 그 모습이 꽤 인상 깊었거든.”

선왕비의 목소리는 우아하고 상냥했다. 하지만 정작 로제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차디찼다. 로제는 그 시선에 눈을 내리깔았다.

트집.

그래, 사실은 트집이 맞을 터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으니 말이다.

이른 아침, 느닷없이 선왕비의 시중을 들라던 유모의 지시가 그 시작이었다.

선왕비가 직접 저를 지목하였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하녀장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일인지 급히 저를 찾아와 이런저런 주의를 주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것이 그저 고귀한 이가 부린 변덕의 일종이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로제는 결코 그런 단순한 이유로 자신이 지금 이곳에 불려온 것이 아니란 걸 직감했다. 방금 선왕비의 말을 통해서,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공녀의 일에 먼저 나서서 배짱 좋게 대꾸하던 너답지 않은 모습이잖니? 그때 그 모습이 꽤 인상 깊었거든.」

선왕비는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추모식 때의 일을.

한낱 하녀 따위가 본인에게 대꾸를 하고 무례하게 굴었으니, 저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하지만 이제 와서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자신은 ‘한낱’ 하녀일 뿐인데, 그런 저를 기억하고 트집 잡으려 한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됐다. 하도 배짱 좋게 굴기에 하녀로서의 능력이 좋은가 했더니……. 실망이구나. 헤이번은 어찌 저런 아둔한 것을 플리타의 전담 하녀로 두었는지 모르겠어.”

그 순간, 선왕비가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뒤편에 서 있던 하녀들이 가볍게 웃으며 선왕비의 말에 동조했다. 그 자리에서 로제만이 웃지 못했다. 저를 비웃는 이들 속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잠시 여인들의 가느다란 웃음이 이어지고, 선왕비가 다시금 손짓을 했다. 그 손짓의 의미를 재빨리 알아차린 하녀가 서너 걸음 뒤에 서 있다가 냉큼 다가오더니 로제를 밀어냈다.

“……!”

로제는 거칠게 저를 밀어낸 하녀의 행동에 휘청거리다가 간신히 균형을 잡고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저를 밀어낸 하녀가 선왕비의 머리를 매만지는 것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제 주관이 섞여 있으니 왜곡되어 보일 수 있기는 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매만졌던 머리 모양이 지금 저 머리보다 이상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기야 자신이 뭘 해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로제는 쓴웃음을 지은 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선왕비에게 멸시를 당하든 말든,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선왕비의 인정을 받고자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니까.

오히려 강압적인 명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플리타는 일어났을까. 시중을 드는 하녀가 아침에 따뜻한 수프를 먼저 가져다주었어야 할 텐데. 참, 오늘 정원에 같이 나가서 풀잎 인형을 만들어 주기로 약속한 건 어쩌지…….’

풀잎을 엮어 만든 인형 이야기에 잔뜩 기대를 했던 아이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그 약속을 지키기는 어려울 듯했다. 선왕비가 저를 하루 종일 부릴 것 같으니 말이다.

이렇게 하나하나, 사소한 것까지 죄다 트집을 잡으면서.

“다 되었어요, 선왕비전하. 마음에 드시나요?”

로제가 답답한 속을 풀 길 없어 속으로 삭이고 있는 사이에 이자벨라의 머리를 매만지던 하녀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정작 이자벨라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흠……. 뭐, 그래. 괜찮구나.”

괜찮기는. 아주 촌뜨기를 만들어 놨다.

이자벨라는 평상시였더라면 제 머리를 이런 꼴로 만든 하녀를 쥐 잡듯 잡았을 테지만, 억지로 화를 가라앉히며 대꾸했다. 그러고는 힐끗 시선을 돌려 로제를 쳐다보았다.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 채 서 있는 모습을 보자 그나마 화가 가라앉았다.

‘헤이번을 꾀러 가야 하는데 나한테 붙잡혀 있어서 불만인가 보지?’

로제를 바라보는 이자벨라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건방진 계집이었다. 자신의 주제도 모르고 남의 남자를 탐하다니 말이다. 어쩐지 제 자식이라도 되는 양 공녀의 편을 들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수준이 어느 정도 저와 맞아야 상대를 하지, 천한 하녀 따위와 헤이번을 두고 경쟁한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 주제를 알게 해 줘야지. 감히 누구를 욕심내는 건지, 네 스스로 깨닫게 해 주마.’

이자벨라는 속으로 중얼거린 뒤, 로제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거울 속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금 와락 얼굴이 구겨지려는 걸 애써 폈다.

솔직히 머리를 매만지는 솜씨는 지금 제 뒤에 서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녀보다 건방진 저 계집이 나았다. 결코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말이다.

* * *

“……그러고 보니 아침에 로제, 아니, 플리타의 전담 하녀가 안 보이던데.”

헤이번이 검토하던 서류에 서명을 하여 집사에게 건네며 질문했다. 집사는 조심스럽게 그 서류를 받아들다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일개 하녀의 이름이 제 주인의 입에서 나온 까닭이었다.

하지만 집사는 본인이 느낀 놀라움을 겉으로 내색할 만큼 어리숙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주인의 물음에 공손히 대답했다.

“선왕비전하께서 그 하녀를 오늘 시중들 사람으로 선택하셨다고 합니다.”

“……선왕비가?”

헤이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예상치 못한 이가 중간에 언급된 탓이었다.

“그럼 그 하녀는 지금 선왕비에게 가 있는 것인가?”

“예, 전하.”

“그래서 아이가…….”

헤이번은 혀를 찼다. 아침 식사 내내 플리타가 시무룩한 모습으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아이의 하녀가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고 여기기는 했지만, 딱히 신경 쓸 일은 아니었기에 그냥 흘려 넘겼는데 말이다.

헤이번이 미간을 좁힌 채 조금은 짜증스러운 투로 집사에게 재차 질문을 던졌다.

“선왕비는 언제까지 여기에 머무를 거라던가?”

“예? 아, 그건 아직 확답을 듣지 못하여…….”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헤이번이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선왕비의 속셈을 모른 척하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이토록 훤히 보이는 속내를 눈앞에 두고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겠는가.

“공작 부인을 앞세워 아예 대공 저에 눌러앉기라도 할 모양인가 보군. 식충이가 따로 없어.”

“대, 대공 전하! 어찌 그런 말씀을…….”

헤이번이 빈정거리는 투로 중얼거리자 집사가 기겁하여 입을 열었다. 식충이라니. 선왕비를 ‘식충이’라 불렀다는 것에 늙은 집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잔뜩 겁을 먹은 표정으로 집무실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제 주인과 자신, 단 두 사람 외에 아무도 없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말이다.

대공 저의 집사로서 때로는 강단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항상 소심하고 유약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보이는 게 그의 단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오랫동안 집사로 두고 있는 건 그의 충성심 때문이었다. 오랜 세월 대공 저를 지켜온 그 충성심을 믿어 의심치 않으니 말이다.

비록 우유부단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제 곁에 남아 있을 사람이었다. 겁이 많아 부들부들 떨다가 주인을 지키기는커녕 그 앞에서 기절할지는 모르지만.

늙은 집사가 기절하는 모습을 저도 모르게 상상한 헤이번이 가볍게 웃은 뒤, 다시 집사를 향해 물었다.

“그래, 선왕비는 지금 뭘 하고 있다 하던가?”

“선왕비전하께서는…….”

집사가 헤이번의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연 순간, 노크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헤이번이 집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는 대답을 마무리하는 대신, 몸을 돌려 문 쪽으로 향했다.

“차를 가져왔습니다, 전하.”

노크를 한 이는 하녀장이었다. 헤이번이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예.”

하녀장이 작은 트롤리를 끌고 그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능숙하게 찻잔을 책상 위에 올리고 찻주전자를 들었다. 잠시 찾아든 고요 속에서 차를 따르는 소리만이 들렸다.

“선왕비전하께서 공작 부인과 티타임을 갖고 계십니다.”

묻지도 않은 말에 대답하듯 하녀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마치 문밖에서 자신이 집사에게 건넨 질문을 듣기라도 한 사람처럼 말이다. 그가 하녀장의 말에 집사를 힐끗 쳐다보았다. 집사 역시 그게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에 앞서 전하께 티타임에 참석해 달라는 말씀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희한하군. 나는 듣지 못했는데.”

헤이번은 하녀장이 따라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피식 웃었다. 하녀장이 공손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송구합니다, 전하.”

“자네 멋대로 내 대답을 꾸며내어 전한 것이로군.”

하녀장의 입에서 나온 건 간단한 사죄의 말뿐이었지만, 헤이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상황을 파악하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녀장은 융통성 없이 고지식한 성격이면서도 이렇듯 예상을 뒤엎는 행동을 할 때가 있다.

“대공을 사칭하다니. 들키면 자네 한 사람으로 끝날 일이 아닐 텐데도 배짱이 참 두둑해. 집사를 보게. 지금 이 말만 들었을 뿐인데도 사색이 되지 않았나.”

헤이번이 집사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농담조로 말했다. 그러나 하녀장은 집사를 일별하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굳이 전할 말씀은 아니라 판단하였을 뿐입니다. 전하의 귀한 시간을 헛되이 쓸 수는 없으니까요.”

“뭐, 어쨌든 잘했네. 차도 오늘따라 더 향긋하고 좋군.”

헤이번은 찻잔을 들어 보이며 하녀장에게 치하의 말을 건넸다. 그러고는 차를 다시 마시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미간을 좁혔다.

“……그럼 티타임에 시중을 드는 이도 로, 플리타의 전담 하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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