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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34화 (34/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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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제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눈을 떴다. 그녀의 시야에 손끝이 잡혔다. 허공을 향해 휘젓던 손이 그 무엇도 쥐지 못한 채 그대로 툭, 침대 위로 떨어졌다. 요란한 잠꼬대였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키다가 이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머릿속을 날카로운 뭔가로 헤집는 것처럼 심한 두통이 일었다.

“우욱!”

그와 더불어 속이 뒤집히고 구역질이 나왔다. 로제는 황급히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지다시피 내려왔다. 그리고 침대 옆의 작은 탁자에 놓인 빈 그릇을 쥐고 고개를 숙였다.

“우욱, 욱!”

전날 먹은 게 별로 없어서인지 시큼한 위액만이 나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핏물이 섞인 위액이라 해야겠지만.

“…….”

로제는 붉은 핏물이 그릇 바닥으로 번지는 것을 보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벌써, 이렇게. 아니,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아직 시간이 남아 있는데.”

그녀는 공포에 잡아먹힌 사람처럼 사색이 되어 더듬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숨이 막힐 듯한 공포에 가슴속이 조여들었다. 잊은 건 아니었다.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잊고 살 정도로 둔감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며 지내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무서워서,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으니까.

죽기 전 사랑하는 남자와 아이를 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무작정 떠나온 길이었다. 하늘이 이런 저를 가련하게 여긴 것인지 뜻하지 않게 아이의 근처에서 있을 수 있게 되었고, 그와 같은 공간 안에서 숨을 쉬며 살 수 있게 되었다.

길을 떠나올 때의 마음이었다면, 제 바람을 다 이루었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어야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이를 곁에서 보면서 점점 더 욕심이 났다. 조금만 더 오랜 시간, 아이와 함께하고 싶다는 바람이 점점 더 크기를 키워갔다. 아이와 헤이번의 관계를 더 가까이, 돈독하게 만들어주겠다는 제 마음 이면에는 그런 욕심이 내재되어 있었다.

조금 더 오래, 그들의 곁에 머무르면서 그렇게 바꾸어가고 싶다는 욕심.

그런데 방금 토해낸 핏물은 그런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그게 가능할 것 같으냐고. 하늘이 그것을 허락할 것 같으냐고.

……꿈에서 그가 저를 비웃었던 것처럼.

실제 헤이번이 아닌 건 알고 있다. 오히려 꿈속에 등장한 그는 제 내면일 터였다. 자신을 비웃으며 조롱조의 말을 건넨 것 역시 제 자신일 게 틀림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아이의 주변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는 게 전부인.

무기력한 어미인.

“후우…….”

로제는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온몸이 축 처지는 느낌이 들었다. 잠들기 전까지는 이 정도로 몸이 나쁘지는 않았는데. 선왕비와 공작 부인의 방문으로 말미암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더니, 그게 뒤늦게 악화된 몸 상태로 되돌아온 모양이었다.

“정신 차리자. 나약하게 굴지 마.”

로제는 스스로를 다그치며 제 양쪽 뺨을 두드리고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자면서 식은땀까지 흘렸던 건지 잠옷이 눅눅했다. 서둘러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어야 할 터였다.

선왕비와 공작 부인이 갈 때까지 아이를 조금이라도 안심시키려면 자신이 곁에 있어야…….

바로 그때였다. 급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 것은.

다른 하녀들보다 일찍 아침을 시작하는 터라 누군가가 그녀의 방을 찾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로제가 멈칫했다가 이내 잠옷 위에 얇은 숄을 걸친 뒤, 문 쪽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세요?”

-나다, 로제.

“……유모님?”

문 너머에서 들린 목소리의 주인은 유모였다.

‘유모가 왜, 무슨 일로……. 혹시 밤사이에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로제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들이 스쳤다. 그녀는 아이에 대한 염려에 서둘러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신지요? 혹여 공녀님께 무슨 일이라도 있는…….”

로제는 문을 열자마자 유모에게 아침 인사조차 건넬 틈 없이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유모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공녀님께 무슨 일이 있으면, 네가 뭐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을 너더러 해결해 달라 이렇게 찾아왔을까 봐?”

유모가 로제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자른 뒤, 비웃음 섞인 투로 물었다. 지난 저녁의 앙금이 풀어지지 않은 듯 그녀를 보는 시선이 매섭기 그지없었다.

“아니요, 저는 그저…….”

“준비를 하고, 선왕비전하의 침실로 올라가거라.”

“……예?”

로제는 서둘러 해명을 하려다가 제 귓가에 들려온 뜻밖의 말에 의아한 눈으로 유모를 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유모님. 제가 왜 선왕비전하의…….”

“시키면 시키는 대로 따를 것이지, 무슨 말이 그리 많은 게야?”

“하, 하지만…….”

“오늘, 선왕비전하께서 시중을 들 하녀로 너를 지목하셨다.”

“……예?”

유모의 말을 듣던 로제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유모는 그녀의 눈이 흔들리는 걸 보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영광으로 알고 어서 서둘러라. 선왕비전하의 은혜가 아니라면 네가 어찌 감히 그 귀하신 분의 시중을…….”

“자, 잠깐만요, 유모님!”

로제는 유모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느릿하게 젓다가 이내 빠르게 흔들었다.

“죄송합니다만 그건 곤란합니다. 공녀님께서 일어나시면 세숫물도 대령해야 하고, 아침 시중도 들어야 하는데.”

“참으로 오만하구나.”

유모가 로제의 말을 듣다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그녀의 이마를 검지 손가락으로 꾹 밀어내며 말을 이었다.

“이 대공 저에 너 외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느냐? 공녀님의 시중을 들 하녀가 너 하나뿐일까.”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니라.”

“공녀님의 전담 하녀가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네 콧대가 하늘을 뚫고 치솟겠어.”

유모는 비아냥거리며 다시 한번 검지로 로제의 이마를 힘주어 눌렀다. 그 바람에 로제가 휘청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새하얀 이마에 금세 붉은 손자국이 남은 것을 본 유모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새하얀 피부는 모든 여인들이 꿈꾸는 것이었다. 늙든 젊든, 아름답기를 바라는 건 누구나 그러하듯이. 그렇기에 유모는 로제의 새하얀 피부에 새삼 질투를 느꼈다. 저런 피부는 비천한 하녀 따위가 가질 게 아니었다.

‘그러니 대공 전하께도 수작을 부린 거겠지. 제 반반한 얼굴 하나 믿고.’

로제를 보는 유모의 눈길이 더욱 사나워졌다. 그녀는 조금 전보다 더 거친 어조로 명령했다.

“공녀님은 신경 쓸 필요 없으니, 너는 내 말을 따르기나 해.”

“하지만 유모님.”

로제는 재차 거부하려 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 누구보다 중요한 사람은 플리타, 제 아이뿐이었다.

선왕비, 아니, 그보다 더 고귀한 사람이 시중을 들라 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은 아이의 머리를 빗기고 몸을 씻기는 일이 더 좋았다. 아이의 식사를 도우면서 그 작은 입이 오물거리는 걸 지켜보고 입가에 묻은 음식물을 닦아주는 게 그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내 말이 우스운 게야? 아니, 선왕비전하의 말씀을 어길 참이냐?”

그런 로제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유모의 언성이 높아졌다. 사실 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을 테지만 말이다.

로제는 저를 향해 쏟아지는 다그침에 소리 없이 입을 몇 번 달싹이다가 이내 그대로 다물었다. 그녀의 가냘픈 어깨가 그대로 축 늘어졌다.

선왕비.

그 이름이 언급된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선왕비가 직접 저를 지목하였다는데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알겠습니다.”

“흥! 진작 그럴 것이지. 어쨌든 빨리 준비하고 선왕비전하의 침실로 가도록 해라. 선왕비전하께서 일어나시기 전에 미리 시중들 준비를 끝내야 하니까.”

유모는 콧방귀를 뀌며 기세등등한 투로 말을 잇더니 제 할 말을 전부 끝냈다는 듯 몸을 돌렸다. 로제가 그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 * *

붉은색 곱슬머리를 가늘게 땋아 늘어뜨리고 리본을 묶으려는 순간, 냉랭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죄송합니다.”

로제는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땋은 머리를 다시금 풀어 내리던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어 뜻대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를 풀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주물렀다.

“머리 하나 제대로 만질 줄도 모르면서, 무슨 공녀님의 전담 하녀라고.”

뒤편에서 누군가가 수군거리는 말이 들려왔다. 선왕비의 시중을 들기 위하여 대기 중인 다른 하녀의 목소리였다. 전날은 그 하녀가 선왕비의 시중을 직접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느닷없이 그 역할을 자신이 담당하게 되었으니, 하녀로서는 본인의 일을 빼앗겼다고 생각이 될 것이다.

로제는 적의 어린 눈으로 저를 노려보던 하녀를 떠올리다가 한숨을 삼켰다. 가뜩이나 대공 저의 고용인들에게 배척당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더욱 그러리란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는 쓴웃음을 삼키고는 손을 마저 주무른 뒤, 재차 선왕비의 머리를 땋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선왕비의 나른한 목소리가 또다시 그녀를 중단시켰다.

“이런,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다시 하렴.”

“……예.”

이번에는 그나마 리본을 묶기 전에 다시 하라 한 게 다행일까. 아니, 어차피 앞으로도 몇 번이고 더 반복할 일이니 그런 게 중요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제는 어쩐지 속이 답답해져 한 박자 늦게 대답하고 말았다.

“대답이 이상하구나. 왜, 하기 싫으니?”

그 찰나의 머뭇거림을 알아차린 것인지, 거울 속 선왕비가 본인의 뒤에 서 있는 로제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로제는 선왕비의 금안과 마주치자마자 곧바로 고개를 조아렸다.

“아닙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내가 괜한 트집을 잡는다고 불만을 품은 것 같은데?”

“아,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로제는 선왕비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러나 선왕비는 거울 속 로제를 가만히 보다가 입술 끝을 비틀어 올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나는 네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아무리 봐도 나를 불편해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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