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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벨라는 스스로 세뇌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찌푸려진 미간은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렇게 공작 부인의 탓을 해도 헤이번의 행동에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괜히 공작 부인이랑 같이 왔나…….”
영지에 내려가 있다가 수도에 온 지 얼마 안 된 공작 부인을 부추겨 함께 대공 저에 방문한 데에는 목적이 있었다.
혼자 방문하면 몇 시간 있지도 못하고 내쫓기기 일쑤였기에, 조금이라도 더 오랜 시간 머무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만찬 때를 제외하고는 그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다. 아니, 만찬 때도 대화 한 번 제대로 나누지 못했으니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자벨라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다가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붉은 머리칼이 구불구불 허리까지 흘러내렸다. 그녀가 제 머리색과 닮은 와인을 한잔 마시기 위해 테이블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지? 내가 다 물러가라 했을 텐데?”
이래저래 짜증이 나서 하녀들을 모조리 물러가라 한 게 조금 전의 일이었다. 대공 저의 하녀들은 제 말조차 우습게 여기나 싶어 그녀의 목소리가 더욱 뾰족해졌다.
-저, 저입니다. 선왕비전하.
이자벨라의 목소리에 겁을 먹은 듯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자벨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문 쪽을 쳐다보았다. 문을 열고 모습을 보인 이는 다름 아닌, 플리타의 유모였다.
“네가 무슨 일로 온 거지? 더구나 이 늦은 시간에.”
이자벨라는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러면서도 유모를 내쫓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금안에 이채가 서렸다.
뭔가 제게 ‘할 말’이 있기에 온 것일 터였다. 늦은 시간, 이렇게 오는 게 무례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선왕비전하께 꼭 드…… 드릴 말씀이 있어서, 꼭 아셔야 할 일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이자벨라의 입술 끝이 비틀려 올라갔다. 거리가 꽤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모의 눈에 서린 탐욕을 읽어낼 수 있었다. 저를 볼 때마다 그러했으니 딱히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들어오려무나.”
이자벨라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허락의 말을 뱉은 뒤, 본래 가려던 테이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소파에 깊숙이 앉아 다시금 시선을 들었을 때, 유모가 대여섯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둔 채 다가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래. 내가 알아야 할 일이 있다고 했지. 그게 무엇이냐?”
“그게…….”
유모는 막상 말을 꺼내려고 하니 쉽지 않은 듯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였다. 이자벨라가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테이블을 손끝으로 건드렸다.
톡.
구태여 재촉하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테이블을 건드린 소리에 유모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황급히 입을 열었다.
“대, 대공 전하께 감히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하녀가 있습니다!”
유모로서는 심각한 일이라도 되는 양 목소리를 높여 말을 꺼냈지만, 듣는 쪽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이자벨라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그런 하녀가 어디 한둘일까. 대공을 눈앞에 두고 아무렇지 않을 여인이 없지. 비록 천한 것들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그런 천한 것들의 마음까지 내가 일일이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냐?”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보고하려나 싶어 잠시 흥미를 보였던 스스로가 한심했다. 가뜩이나 짜증이 나던 참인데. 이자벨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테이블을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그 소리에 이어 유모가 재차 입을 열었다.
“하, 하지만 이번에는 심상치 않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그 하녀의 수작에 조금씩 넘어가시는 것도 같고…….”
“가당치 않은 소리!”
이자벨라의 낯빛이 서늘해졌다. 그녀의 서슬 퍼런 시선에 유모가 벌벌 떨며 몸을 움츠렸다.
“기껏 나를 찾아와 네 주인을 모욕하고자 함이냐? 내 당장 그를 찾아가 너의 무례를 고할…….”
“정말입니다, 선왕비전하! 대공 전하께서 공녀님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시기 시작한 것만 봐도.”
유모가 기겁하여 서둘러 말을 이었다. 노한 탓에 그 말을 무심코 흘려들으려던 이자벨라가 손을 들어 유모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느릿한 어조로 방금 유모가 한 말을 따라했다.
“공녀와,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 시작했다?”
“예, 선왕비전하.”
“……하녀의 수작에 넘어가서?”
“그렇습니다.”
유모는 벌벌 떨면서도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이자벨라의 금빛 눈동자가 싸늘해졌다. 헤이번의 변화에 대해서는 이미 보고를 받아 알고 있는 바였다. 그러나 그 변화가 ‘하녀의 수작’ 때문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헛소리일 터였다.
그 냉정하고 무심한 남자가 고작 하녀 따위에게 휘둘릴 일도 없고.
“……그 하녀가 누구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모의 말을 들은 순간, 그들 부녀의 관계가 변했다는 사실에 느꼈던 찝찝한 기분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이자벨라는 저도 모르게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을 꽉 오므려 쥐었다. 붉게 칠한 손톱이 손바닥에 상처를 내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공녀님의, 아니, 공녀의 전담 하녀입니다.”
유모는 선왕비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고쳤다. 선왕비가 공녀를 못마땅해하는 걸 모르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자벨라는 그런 유모를 신경 쓸 새 없이 생각에 잠겼다.
플리타의 전담 하녀라…….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더니.’
이럴 줄 예감했기에 그랬던 걸까. 여러모로 눈에 거슬리는 여자였다. 무엇보다도 그 무심한 남자가 이름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그랬다. 게다가 하필이면 플리타와 비슷한 녹색 눈까지, 아이의 생모였던 계집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물론 그 천한 계집의 생김새를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니 비슷하다고 느끼는 건 그저 제 착각일 터였다. 그래도 그 하녀를 볼 때마다 기분이 나쁜 건 사실이었다. 눈앞에서 당장 치워버리고 싶을 만큼.
이자벨라는 신경질적으로 입 안쪽 살을 잘근잘근 씹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바로 표정을 고치고는 태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공녀를 구하였던 그 하녀 말이로구나?”
“예, 그렇습니다. 분에 넘치는 자리를 받은 것으로도 부족한 건지 이제는 대공 전하께 삿된 마음을 품고…….”
유모는 이자벨라의 관심에 신이 난 듯 고개를 들더니 어깨까지 으쓱이며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하지만 이자벨라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만.”
“……예?”
“네 충심은 잘 알겠다만, 한낱 하녀를 대공과 엮는 것은 과한 상상이구나.”
“하, 하지만 전하…….”
“또한 그런 말이 네 주인을 모욕하는 것임을 모르는 것이냐.”
이자벨라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 변화에 유모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냉큼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선왕비전하! 저는 그저, 선왕비전하께 이 사실을 알려드려야 한다는 충정으로 말씀을 드렸을 뿐입니다. 누구보다 두 분의 혼인을 바라는 터라…….”
유모는 사색이 되어 진심으로 몸을 떨었다. 지금 이 상황은 자신이 예상한 것과 전혀 달랐다.
선왕비가 제 얘기를 들으면 분명 화를 낼 거라 생각했다. 그녀가 대공을 원하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으니까. 그러니 대공에게 수작을 부린 건방진 하녀에게 화를 내고, 반대로 그 소식을 가져온 저를 치하할 거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푸훗.”
유모가 두려움에 덜덜 떠는데, 가벼운 웃음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그러더니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옅은 향수 냄새가 났다. 이자벨라가 유모의 앞에 다가와 허리를 숙인 것이다.
“……서, 선왕비전하!”
갑작스러운 이자벨라의 행동에 당황한 유모가 눈을 크게 뜨더니 냉큼 엎드리려 했다. 그러나 이자벨라는 싱긋 웃으며 그런 유모를 일으켰다.
“알고 있다. 너의 충정을 내가 어찌 모를까. 그러니 이 늦은 시간에 나를 찾아온 것이겠지.”
“……선왕비전하.”
유모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울먹이며 그녀를 불렀다. 이자벨라는 그런 유모의 손을 잡고는 다독였다.
그러나 유모가 미처 보지 못한 그녀의 시선은 차디찼다. 반쪽짜리 공녀를 돌보는 유모 따위, 필요할 때 쓰고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얼마 동안은 유모의 존재가 제게 필요할 터였다. 적어도 헤이번과 혼인할 때까지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네 충정 어린 마음을 믿으마.”
“성심을 다하여 선왕비전하께 충성하겠습니다!”
“그래. 나 또한, 그런 너를 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이자벨라의 약속 아닌 약속에 유모의 눈이 금세 욕심으로 번들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자벨라의 금안이 호를 그리며 휘어졌다.
* * *
『……엄마.』
『엄마.』
『엄마!』
‘……응, 아가. 엄마, 여기 있어.’
로제는 저를 부르는 어린아이의 목소리에 대답하려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목이 막혀 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안 되는데. 우리 아기가 나를 기다릴 텐데.’
로제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그녀는 아이를 찾기 위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하지만 아이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짙은 안개에 갇혀버리기라도 한 것인지 눈앞이 희뿌예서 바로 앞에 아이가 있어도 알아보지 못할 것만 같았다.
『엄마! 엄마!』
‘그래, 아가. 걱정하지 마.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엄마가 갈 테니…….’
『그럼 뭘 할 수 있는데?』
그 순간 조소 섞인 목소리가 그녀에게 물었다. 로제는 그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어느 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살날이 겨우 1년 남짓 남은 네가 아이를 위해 뭘 할 수 있지? 네가 아이에게, 아니, ‘우리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있기는 한가?』
푸른 시선이 서늘함을 품고 그대로 날아와 박혔다. 저를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의 시선이었다.
‘……헤이번.’
로제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웠다고, 보고 싶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헤이번은 안개 너머에 서서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헤이번, 나는요.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