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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전하! 감사합니다.”
잠시 침묵하던 헤이번에게서 승낙이 떨어지자, 로제가 기쁜 마음에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미소 짓는 얼굴에 헤이번의 푸른 눈이 흔들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속 어딘가를 둔탁한 뭔가가 두드리는 것 같기도 하고, 손으로 꽉 움켜쥐어 저릿한 느낌이 드는 것도 같았다.
“로…….”
헤이번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어 로제를 부르려는 순간, 밖에서 급히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벌컥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얼굴이 평소처럼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저, 전하! 이 늦은 시간에 어찌…….”
플리타의 침실 안으로 거의 뛰어 들어오다시피 한 건 다름 아닌 유모였다. 유모는 어디선가 뒤늦게 소식을 접한 듯 숨을 고르지도 못한 채 헐떡이며 방 안을 살폈다. 그러더니 로제를 보고는 눈을 부릅뜨며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렸다.
‘전하께서 오셨으면 당장 내게 알렸어야지!’
직접 소리 내어 야단친 것이 아닌데도 유모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로제는 난처한 표정으로 그저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헤이번의 푸른 눈이 로제에게 향했다. 환하게 웃었던 모습은 금세 사라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어째서인지 그것이 못마땅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금 유모를 쳐다보았다. 그사이에 숨을 고른 것인지, 유모가 한결 진정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헤이번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아이를 두고 자리를 비웠더군.”
“아, 그, 그게…….”
그의 말을 들은 유모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유모는 뭐라 변명이라도 할 것처럼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변명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어디를 갔었나?”
헤이번은 유모의 말을 끊은 뒤,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유모가 눈을 좌우로 굴리며 치맛자락을 살짝 쥐었다가 놓았다.
“저, 어, 그게, 잠시 볼일이 있어서 자리를…….”
“아이의 저녁 식사를 돕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나? 그래서 아이와 하녀만을 남겨둔 채 자리를 비웠다는 건가?”
헤이번의 목소리가 한층 더 가라앉았다. 유모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변했다.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허둥지둥 해명조로 말을 꺼냈다.
“그, 그게 아니라, 선왕비전하와 공작 부인을 찾아뵈었습니다. 두 분께 공녀님에 대한 노여움을 풀어 주십사, 청을 드릴 겸…….”
“노여움을 풀어 달라?”
헤이번에게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덩달아 웃지 못했다.
로제가 제 치맛자락을 잡은 플리타의 손을 꼭 움켜쥔 채 그를 쳐다보았다. 유모를 바라보는 헤이번의 시선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서늘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녀는 그의 주변 온도가 뚝 떨어진 게 아닌가 생각했다. 물론 실제로는 그럴 가능성이 없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이번에게서는 한기가 느껴졌다. 주변의 모든 것을 얼릴 것만 같은, 혹독한 한기였다. 사람의 표정과 목소리만으로도 그게 가능하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저, 전하. 방금 제가 드린 마, 말씀은 그 뜻이 아니라…….”
유모의 얼굴이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변했다. 본인이 얼마나 큰 말실수를 했는지 그제야 깨달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제 주인의 분노 앞에 바들바들 떨다가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았다.
명백한 실수였다. 천한 피 운운하며 어린 공녀를 우습게 보고 함부로 대하던 버릇 때문에, 저도 모르게 대공의 앞에서 말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선왕비전하와 공작 부인께서 혹여 공녀님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볼까 두려워, 아니, 그것이 염려되어 제가 주제넘은 짓을 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왕실의 어른이신 두 분께 밉보이면 나중에 공녀님께서 사교계에 데뷔하실 적에도 불이익이 있을 것도 같고, 그래서…….”
유모는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사실 그 모든 건 그저 거짓말에 불과했다. 선왕비와 공작 부인을 찾아가기는 했지만, 그것은 단지 제 이득을 위해서였다.
그들의 눈에 들어 나중에라도 왕실에 들어갈 기회를 얻기 위해서.
그래서 되레 어린 공녀를 헐뜯고 조롱했다. 천한 피는 그렇듯 감춰지지도 않는다며 앞장서서 아이를 탓하고, 그러니 귀하신 분들께서 노여움을 푸시라 온갖 아부를 했다.
그러고 나서 어깨가 으쓱하여 돌아오던 길에 대공이 공녀의 침실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과 맞닥뜨린 것이다.
‘어떻게든 지금 이 상황을 모면해야 해. 그러고 나서 저것을 단단히 야단쳐 버릇을 바로잡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유모가 슬쩍 시선을 들어 로제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 독기가 서려 있었다.
이 모든 게 전부 저 하녀 탓이었다. 대공이 왔다고 즉각 제게 알리지 않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다.
어쩌면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대공의 방문을 숨긴 건지도 몰랐다. 아니, 틀림없이 그런 꿍꿍이가 있었으리라.
대공의 눈에 들려고 이런저런 수작을 부린 하녀가 한두 명도 아니었고.
‘영악한 계집 같으니라고. 순진한 얼굴로 공녀에게 접근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공녀를 앞세워 대공에게 잘 보이려 한다, 이거지?’
유모는 제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며 입술을 앙다물다가 이내 뭔가를 떠올리고는 눈을 크게 떴다.
‘잠깐만. 그럼,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선왕비전하께 이 사실을 알려야…….’
“변명은 됐네.”
그 순간, 헤이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유모의 생각도 끊어졌다. 유모는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가 슬그머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헤이번이 피곤한 듯 미간을 찌푸린 채 콧등을 누르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유모의 변명을 듣는 것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만 나가보도록 하게. 밤이 늦었으니 아이도 자야 하고.”
“공녀님의 잠자리를 봐 드려야…….”
유모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헤이번이 피식 웃더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차디찬 시선이었다.
“글쎄. 그건 하녀가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래서 자리를 비웠던 것 아닌가.”
“…….”
유모의 얼굴이 모욕을 받은 사람의 것처럼 붉어졌다. 하지만 헤이번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런 유모를 쳐다보다가 턱짓을 했다. 나가라는 뜻이었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전하.”
유모는 간신히 입을 열어 대답한 뒤,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그는 유모의 인사를 받는 대신 고개를 돌렸다. 저를 무시하는 그의 행동에 다시금 유모가 입을 꽉 다물고 몸을 돌렸다. 물론 그사이에 로제를 쏘아보는 건 잊지 않았다.
유모가 나가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로제는 플리타의 손을 쥔 채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아이의 유모가 제자리를 지키지 않았으니 불쾌한 게 당연했다. 저 역시 유모가 아이를 함부로 대하고 방치할 때마다 그런 기분을 느꼈으니 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은 그런 상황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반면에 그는 이렇듯 유모에게 화를 낼 수 있다는 것.
……어쩐지 자신이 초라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자신이 떠나더라도 헤이번이 아이를 지켜줄 테니…….
로제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눈앞이 희뿌옇게 흐려졌다. 그녀는 입술을 앙다문 채 북받쳐 올라오는 감정을 억눌렀다.
“차는 나중에 마시도록 하지.”
바로 그때, 헤이번이 침묵을 깨고 나직하게 말했다. 로제는 그제야 정신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헤이번과 아이의 티타임을 준비하려던 참이었다. 그녀는 급한 마음에 입을 열었다.
“아! 지금 바로 준비하겠…….”
“아니, 됐어.”
하지만 헤이번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플리타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이도 졸린 것 같고.”
“저, 저는 괜찮아요!”
플리타가 그의 말을 듣다가 냉큼 큰 소리로 외쳤다. 평소 소심하던 아이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이는 졸음이 묻어나는 눈가를 손으로 문지르더니 테이블로 후다닥 달려갔다.
“차 마실래요. 나 코코아, 로제!”
플리타는 초조한 듯 발까지 동동 구르며 로제와 헤이번을 번갈아 보았다. 제 아비와 모처럼, 아니, 처음으로 갖는 티타임을 이대로 놓칠 수 없다는 아이의 절박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전하.”
로제가 덩달아 간절한 마음으로 헤이번을 돌아보았다. 그가 미간을 좁히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은 플리타뿐만 아니라 그를 바라보던 로제도 어깨를 움츠렸다.
“……아이에게는 우유가 좋겠군. 꿀을 넣은.”
“……!”
그의 말은 허락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깨달은 로제와 플리타의 얼굴이 동시에 환해졌다.
* * *
“확실히 달라졌어. 보는 시선도 그렇고. 아이를 대하는 태도도…….”
선왕비, 이자벨라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앉더니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녀의 얼굴 위로 짜증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고작 한 달, 아니,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마지막으로 본 게 추모식 때였다. 변화가 생기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변화가 생긴 것이다.
헤이번과 플리타, 그들 부녀의 관계에.
“그래도 설마, 했는데…….”
이자벨라가 신경질적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재차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의 입매가 비틀렸다.
헤이번과 아이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건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방해가 될 터였다. 아이가 저를 따른다면 모를까. 지금처럼 자신만 보면 겁을 먹고 숨어버리기 일쑤인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 두 사람이 요 근래 가까워진 것 같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제 눈으로 확인하고자 급히 대공 저를 방문했다. 이곳에 심어 놓은 자의 보고를 받고도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그런데 실제로 본 그들 부녀의 모습은 추모식 때보다 확실히 가까워져 있었다. 물론 만찬 때 잠깐 본 것이니 자신의 착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애당초 아이를 자신들과 만나게 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부터가…….
“이게 다 공작 부인 때문이야. 그래, 그게 분명해. 페란테 공작 부인이 그 애를 싫어하는 걸 헤이번이 모르지 않았을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