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저, 전하.”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유모가 아닌, 헤이번이었다. 예상치 못한 사람의 방문에 당황한 로제가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자 헤이번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입을 열었다.
“들여보내 줄 생각이 없나?”
“……예?”
“로제, 네 허락을 받고 들어가야 하는 건가?”
거듭된 말을 듣고 나서야 로제가 그 말뜻을 알아듣고 화들짝 놀라 옆으로 비켜섰다.
“아니요!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아니, 놀랄 일은 아니지만.”
로제는 그녀답지 않게 허둥대다가 입을 다물었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아비가 딸의 방에 찾아오는 게 신기한 일은 아니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플리타를 찾아올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어? 아, 아빠?”
그리고 그건 플리타 역시 마찬가지였나 보다. 아이가 더듬거리며 헤이번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로제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황급히 방 안으로 들어가 플리타의 뒤에 가만히 섰다.
“…….”
그 모습을 보던 헤이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자신이 찾아온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싶어 어쩐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억울하다니.’
그는 무심코 튀어나온 생각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어릴 때도 한 적 없던 생각을 하는 제 모습이 유치했다.
“……전하?”
그 순간, 조심스럽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헤이번이 시선을 들어 자신을 부른 여자를 보았다.
방에 들어오지 않고 헛웃음을 짓는 헤이번의 행동이 의아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쳐다보던 로제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몸을 움찔거렸다.
‘내가 뭘 어쨌다고.’
헤이번은 또다시 든 유치한 생각에 한숨을 삼킨 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몇 걸음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아직 치우지 못해서.”
방 안은 난장판이었다. 아니, 그 정도로 엉망이지는 않았다. 그저 테이블 위에 차려진 식사가 남아 있고, 바닥에 인형 몇 개가 떨어져 있을 뿐.
다만 모든 게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는 대공 저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러나 그는 딱히 하녀를 나무랄 마음이 없었다. 비위생적인 환경에 아이를 방치해둔 것도 아니고, 그저…….
「미안해요. 같이 치워, 으앗!」
「거기 가만히 있어! 깨진 조각 밟고 다치면 어쩌려고.」
환청일까. 환청일 터였다. 헤이번은 두통과 함께 찾아온 환청에 자신도 모르게 관자놀이 근처를 손으로 누르며 인상을 썼다. 그 모습을 본 로제가 깜짝 놀라 그에게 다가왔다.
“전하? 괜찮으신가요?”
“됐어. 별것 아니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한쪽에 놓인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그러고는 여전히 나란히 서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녁을 먹던 중인 것 같은데.”
“아니요! 다 드셨습니다.”
로제가 그의 물음에 서둘러 대답하고는 테이블 위를 치우려고 움직였다. 헤이번이 그녀를 향해 손짓을 하고는 다시금 말을 꺼냈다.
“아니, 플리타 말고 너.”
“예? 저, 저요? 어, 그게…….”
로제의 녹색 눈이 마구 흔들렸다. 헤이번은 당황하여 대꾸하지 못하는 로제를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려 테이블 위를 보았다.
아이가 저녁을 다 먹었다는 건 눈으로 봐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의 것으로 짐작되는 식기가 깨끗하게 비워져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맞은편에 놓인 요리는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는 굳이 물을 필요가 없었다. 자신이 이곳에 들어오기 전, 이 방 안에 있었던 사람은 제 딸과 이 하녀뿐이니까.
“……죄송합니다!”
그의 시선이 테이블로 향한 것을 보고 뭔가를 오해한 듯 로제가 새하얗게 질려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헤이번이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자 플리타 역시 얼굴이 창백해져 냉큼 로제와 그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마치 제 하녀를 보호하려는 듯 두 팔을 양쪽으로 벌린 채.
“로, 로제 잘못한 거 없어요! 제가 같이 먹자고 했어요!”
“…….”
“진짜예요! 진짜인데……. 흐잉.”
아이가 목소리를 높여 주장하는 듯싶더니 이내 말끝을 흐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헤이번이 그 광경을 가만히 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공녀님, 그러지 마세요. 제가 잘못한 거예요. 공녀님께서 잘못하신 게 아니라.”
그런 헤이번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이번에는 로제가 플리타를 끌어안더니 아이를 두둔하고 나섰다. 헤이번은 서로 제 잘못이다, 그렇게 우기는 두 사람을 가만히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그 한숨 소리에 로제와 플리타가 동시에 몸을 움찔거렸다.
‘도토리라도 쥐고 있었다면 놀라서 떨어뜨렸겠군.’
그는 언젠가 제 아이와 아이의 하녀를 두고 다람쥐 같다고 여겼던 것을 새삼 떠올렸다. 게다가 이번에는 어쩐지 자신이 다람쥐 모녀를 괴롭히는 악당이라도 된 것 같다고 해야 할까…….
“함께 식사를 했다고 뭐라 하려던 게 아니다.”
“그러니 공녀님을 나무라지 마시고……. 예?”
로제가 플리타를 안은 채 정신없이 말을 잇다가 뒤늦게 그의 말을 이해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자신과 플리타를 번갈아 보던 헤이번이 재차 한숨을 내쉬더니 일어나라며 손짓을 했다.
“그러니 그만 일어나도록.”
“예에…….”
로제는 그의 한숨 소리에 다시금 몸이 움찔거리려는 걸 꾹 참은 뒤, 천천히 일어났다. 플리타 역시 눈치를 살피더니 냉큼 로제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그저, 네가 아이의 시중을 드느라 식사를 마치지 않은 것 같아서 한 말이었다. 그런 거라면 마저 먹어도 돼.”
“아닙니다, 전하. 다 먹었는걸요.”
꼬르륵.
로제의 강한 부정과 함께 어디선가 가련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헤이번의 한쪽 눈썹이 비틀려 올라간 것과 동시에 플리타가 고개를 휙 돌려 로제를 보았다.
“로제, 배고파? 나 때문에 밥 못 먹어서.”
플리타의 눈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로제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공녀님. 이건, 음, 그러니까 소화가 되는 소리예요.”
“소화?”
“예, 음식을 먹으면 속에서 소화가 되느라고…… 어, 으음.”
꼬르륵.
설명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던 로제의 얼굴이 새빨개진 건 그 직후였다. 헤이번은 그녀를 손으로 가리키고는 뒤이어 테이블을 가리켰다.
“거기 앉아서, 식사하지.”
“하지만 저는…….”
“식사하면서 대화하는 편이 낫겠어. ‘그 소리’를 들으며 대화하는 것보다는.”
‘이 소리요?’하고 묻듯이 헤이번의 말과 함께 로제의 배에서 다시 한번 꼬르륵 소리가 났다. 로제는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정도로 새빨개진 얼굴을 숨기지도 못한 채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플리타가 헤이번과 로제를 번갈아 보더니 머뭇머뭇 로제에게 다가갔다.
아비보다 하녀를 따르는 모습에 화가 날 법도 하지만, 헤이번은 어쩐지 웃음이 나오려 했다.
희한한 일이었다. 흐트러진 방 안의 모습을 보고도, 하녀와 마주 앉아 밥을 먹은 딸을 보고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웃음이 나오려 한다는 것이.
「나는 당신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부르더라.」
「뭐예요, 그게!」
바로 그때, 또다시 환청이 찾아들었다. 다정하고 쾌활한 두 남녀의 웃음 섞인 목소리였다.
……기억에 존재하지 않음에도 아주 오랫동안 그리워한 것만 같은.
헤이번은 저도 모르게 팔걸이를 꽉 움켜잡았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런 그의 눈에 다시금 로제가 들어왔다.
동그란 빵을 입에 막 넣으려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놀란 녹색 눈의 여자.
「……나는 당신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부르더라.」
다시금 귓가에 들린 목소리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마치 제 것처럼. 그럴 리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는데 말이다.
그렇듯 누군가에게 웃으며 말하는 법을 잊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그런 식으로 농담조의 말을 하지 못한다.
하다못해 제 딸에게조차 그러지 못하는데.
“……!”
헤이번은 움켜잡았던 팔걸이를 놓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빵을 든 채 두 눈을 깜빡이며 헤이번을 보던 로제의 시선이 그를 따라 위쪽으로 올라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조금은 허둥대는 투로 말을 꺼냈다.
“음……. 마저 식사하도록 하지. 나는 이만 가 볼 테니.”
“예? 아니요, 전하. 저는 괜찮습니다!”
이대로 나가려는 건지 헤이번이 몸을 돌렸다. 로제는 멍하니 그를 보다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앞뒤 생각할 새도 없이 헤이번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
헤이번의 푸른 눈이 커졌다. 그는 제 팔을 잡은 여자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로제가 그제야 자신의 행동을 알아차리고는 마치 불에 덴 사람처럼 황급히 그를 놓았다.
“죄, 죄송합니다! 저는…… 저는 그저…….”
로제는 말을 더듬었다. 그에게 할 말이 전부 뒤엉켜 쉽게 나오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당황하다가 문득 제 치맛자락이 당겨지는 느낌에 정신을 차렸다.
‘……플리타.’
그녀는 자신의 치맛자락을 잡은 채 매달리다시피 하고 있는 작은 아이를 보았다. 그 연녹색 눈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한결 진정되었다. 로제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쉰 뒤, 시선을 돌려 헤이번을 보았다.
서늘하던 남자의 얼굴 위로 당혹스러운 기색이 엿보였다. 아마도 그의 팔을 잡은 제 행동 때문이리라. 로제는 제 손을 괜히 오므려 쥐었다가 펴 보았다.
단단한 팔의 감촉이 제 손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한때는 저를 다정히 안아 주었던 팔이다. 그녀는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꾹 참은 뒤, 입을 열었다.
“모처럼 오셨는데…… 공녀님과 차라도 한잔하시면 어떠신지요. 시간이 늦기는 했지만, 그렇게 해 주신다면 공녀님께도 소중한 시간이 될 겁니다.”
“…….”
로제를 바라보던 헤이번의 시선이 느릿느릿 플리타에게로 향했다. 플리타가 한 손으로 로제의 치맛자락을 잡고 있다가 제 아비와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그녀의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그를 멀리한다거나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의 연녹색 눈은 방금 로제의 말을 이해한 듯 은근한 기대로 반짝이고 있었다.
재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아비와의 티타임이 뭐 그리 기대된다고.
“……그렇게 하지. 차를 준비해 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