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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30화 (30/134)

30

헤이번의 낯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조금 전까지도 차갑고 무심하다고 여겼지만, 그것은 그저 장난에 불과했다는 듯 그의 얼굴 위로 한기가 감돌았다.

그것을 깨달은 공작 부인의 낯빛이 흐트러졌다. 언성을 높이며 한껏 분위기에 취하다 보니, 자제를 하지 못해 자신이 선을 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린 모습이었다.

“헤이번,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이구나. 나는 그저 염려스러운 마음에 그런 거란다. 아무래도 대공 저에 안주인이 없다 보니 고용인들을 관리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을 테고, 그러다 보면 제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행동하는 자들도 생겨날 수 있으니.”

“아, 그렇습니까.”

헤이번이 피식 웃었다. 비웃고 있다는 걸 누구나 짐작할 법한 냉소였다.

“그래서 공작 부인께서 몸소 보여주신 거로군요. 제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행동하는 게 어떤 것인지.”

“뭐, 뭐라고?”

공작 부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면전에서 모욕적인 말을, 더구나 조카에게서 들었으니 당연했다. 헤이번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다시 로제를 보았다. 로제가 플리타의 등을 토닥이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로제, 아이를 데리고 방으로 돌아가라.”

“……예, 전하.”

로제는 그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돌아서는 그녀를 이번에는 어느 누구도 막지 않았다. 외려 집사가 옆으로 비켜서며 문까지 열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집사님.”

“공녀님의 식사는 방으로 올리도록 하겠네.”

집사가 그녀의 인사를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 받은 뒤,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제는 플리타의 등을 토닥이며 공손히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탁.

등 뒤에서 문이 닫히자마자 로제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살벌하기 그지없는 자리였다. 타인도 아니고, 어찌 보면 가족이라 할 수 있는 세 사람인데…….

그녀는 저도 모르게 닫힌 문을 돌아보았다.

화려한 식탁.

산산이 조각 난 와인 잔.

……어째서인지, 입맛이 썼다.

* * *

이자벨라의 금안이 집요하다 싶을 만큼 로제의 뒷모습을 좇았다. 그러다가 로제가 플리타를 안은 채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시선을 돌렸다.

‘……로제.’

이자벨라는 무심코 입 속으로 그 이름을 중얼거리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천한 하녀의 이름 따위, 그녀는 제 입이 더러워진 것만 같아 앞에 놓인 물잔을 들었다.

건방진 하녀였다.

그녀는 방금 아이를 데리고 나간 그 하녀를 기억해냈다. 제 밑에 있는 하녀들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이자벨라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그 하녀가 제 눈에 거슬렸다는 뜻일 터.

「공녀님께서 다리를 다치셔서, 제가 공녀님을 업어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우스운 일이었다. 별것 아닌 일이었기에 이미 기억 속에서 지워진 줄 알았는데, 이렇듯 생생히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나다니 말이다. 더구나 한낱 하녀 따위가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말까지도 또렷하게 생각나다니.

이자벨라는 헛웃음을 삼키며 물을 마셨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싱긋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깜짝 놀랐어요.”

헤이번의 푸른 눈이 그녀에게 향했다. 이자벨라는 깨진 와인 잔을 치우고 물러가는 하녀들을 힐끗 보더니 다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고용인들에게 다정한 주인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요.”

“…….”

느닷없이 바뀐 화제에 헤이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더구나 그녀의 말 자체를 이해할 수 없는 탓이기도 했다. 공작 부인 역시 그러했는지 고개를 기울였다.

“다정한 주인이라고요?”

“예, 공작 부인.”

“우리 두 사람이 지금, 같은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게 맞지요?”

공작 부인이 헤이번을 힐끗 쳐다보고는 웃으며 물었다. 이자벨라가 눈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공작 부인도 들으셨을 텐데요. ……로제, 라고.”

헤이번은 다시 제 앞에 놓인 와인 잔을 들려다가 이자벨라가 덧붙인 이름에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이자벨라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금색 눈동자 깊숙한 곳에 열패감이 깃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그런 자신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짐짓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한낱 하녀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불러주다니 말이에요.”

‘그것도 두 번씩이나.’

이자벨라는 뒷말을 목구멍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런 점까지 지적하여 말하자니 자신이 구차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공작 부인은 이자벨라의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그녀의 질투 내지는 열패감을 눈치챈 듯 눈을 크게 떴다.

“……어머, 그랬나요? 저는 미처 몰랐는데……. 뭐, 아이의 하녀이니 다른 고용인들보다는 더 접할 일이 많았겠지요. 전담 하녀인 거니?”

공작 부인이 당황하여 말끝을 흐리다가 간신히 대꾸한 뒤, 헤이번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던 이자벨라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기억나네요. 그때 플리타를 구했던 여인이죠? 그 공을 인정받아 전담 하녀가 되었고.”

“그렇습니다.”

헤이번은 공작 부인을 보던 눈길을 돌려 이자벨라를 쳐다보았다. 그의 어조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무심했다. 아무런 관심도 없는 날씨 이야기에 화답하듯.

그런데 어째서일까.

……이렇게 찝찝한 기분이 드는 까닭은.

“운이 좋네요. 그 덕분에 대공 저의 하녀가 되다니 말이에요. 더구나 공녀의 전담 하녀라는 영광된 자리를 그렇게 쉽게 얻었으니까요.”

이자벨라는 오물 같은 뭔가가 가슴속에 들러붙는 기분을 애써 털어내며 미소를 지었다. 고작 하녀일 뿐이다. 비천한 하녀. 그런 하녀를 상대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게 다 그 계집애랑 비슷해서 그래.’

녹색 눈. 플리타보다는 색이 짙기는 하지만, 둘 다 녹음을 닮은 눈동자를 가졌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그러니 그 하녀가 제 눈에 거슬린 것이리라.

게다가 건방지게 제 눈을 똑바로 보고 아이를 두둔했던 전적도 있으니.

“플리타를 구하다니요?”

그 순간, 공작 부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당시 수도에 없었던 터라 그때의 일을 전해 듣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이자벨라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올리고는 공작 부인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었답니다. 선왕 폐하의 추모식 때 사고가 좀 있었는데…….”

아이의 목숨을 구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 가벼운 해프닝 정도로 깎아내렸다. 헤이번은 그런 선왕비의 치졸한 속내에 냉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문 쪽으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

탁. 탁.

그의 손가락이 식탁 위를 두드렸다. 스스로도 깨닫지 못할 만큼, 작게.

* * *

“고모할머니 시러어…….”

플리타는 로제의 품에 안긴 채 칭얼거렸다. 로제는 그런 아이를 억지로 떼어놓은 뒤, 젖은 눈가를 닦아주었다. 방에 돌아와서도 계속 울먹인 터라 아이의 눈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이러다가 우리 공녀님, 개구리 눈 되시겠어요.”

“흐잉……. 개구리?”

플리타가 눈을 비비며 재차 울먹이려다가 로제의 말에 호기심을 보였다. 아이다운 그 모습에 로제가 웃음을 터뜨리고는 손가락으로 더듬더듬 아이의 눈가를 쓸었다. 그러자 눈가가 쓰라린 듯 아이가 눈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이는 순순히 제 얼굴을 로제의 손에 맡겼다. 오히려 그녀가 더 만져주었으면 하는 듯 로제의 팔을 제 작은 손으로 끌어당기기까지 했다.

누군가의 온기를, 그리고 애정을 바라는 그 순진한 몸짓에 로제는 가슴이 미어졌다.

아이가 바라는 건 그다지 대단한 게 아니었다. 따스한 말 한마디, 다정한 시선, 그것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작은 것들조차 지금껏 받지 못하고 살았다.

그녀는 아이에게 내리꽂히던 차가운 시선들을 떠올렸다. 그에 앞서 집사가 헤이번의 명을 전하러 왔을 때, 플리타가 내보였던 행동도 기억했다.

「가, 같이? 고모할머니랑, 큰엄마랑?」

저와 단둘이 밥을 먹는 일이 뭐 그리 신난다고 까르르 웃어대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집사의 전언에 덜컥 겁을 먹고 말을 더듬었다. 제 아비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도 플리타는 내내 바들바들 떨었다.

그것이 말하는 건 명확했다.

그들의 냉대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을. 플리타가 ‘괸터스’의 이름 아래에 있는 이들 속에서 그런 대접을 받으며 살았다는 것을.

“개구리 안 되는데…….”

플리타가 제 눈을 양손으로 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이렇게 예쁜 아이를.’

로제는 울 것처럼 웃으며 플리타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아이가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비비며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 개구리야?”

“아니요. 이렇게 예쁜 개구리가 있나요?”

“그치만, 나 개구리 눈 된다고…….”

“자꾸 울면 눈이 붓잖아요. 개굴개굴, 개구리처럼요.”

“그, 그럼 안 되는데!”

플리타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이는 훌쩍거리며 제 눈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로제는 아이를 바라보며 웃었다.

“지금은 괜찮아요, 공녀님.”

“개구리 아니야?”

“예. 으음……. 사실, 공녀님은 개구리가 되어도 귀여우실 테지만요.”

“아니야! 개구리 안 할 거야! 아빠가 싫어하면…….”

플리타는 로제의 장난기 어린 말에 화들짝 놀라 두 손을 흔들며 말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에 로제가 다시금 염려 섞인 눈으로 아이를 보았다.

“아빠가 화났지? 나 때문에 창피해서.”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공녀님 때문에 왜 창피해요.”

“내가…… 내가 바보처럼 행동해서.”

플리타가 금세 시무룩해졌다. 로제가 그런 아이를 달래려고 입을 열려는데, 그보다 먼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로제와 플리타의 고개가 동시에 문 쪽으로 향했다.

“잠시만요, 공녀님.”

로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유모가 온 건가 싶어 문을 연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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