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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그 아이가 우리를 보고 싶지 않다며 떼라도 쓴 거니? 너는 그런 아이의 철없는 투정을 받아준 거고?”
기가 막힌다는 듯 공작 부인이 혀를 찼다. 질문을 하기는 했지만, 굳이 대답을 듣고자 물은 게 아니라는 투였다. 그녀는 잔뜩 노한 표정으로 언성을 높였다.
“이래서 태생이 중요하다는 거다. 그 천한 피가 어디로 갔겠…….”
“공작 부인.”
선왕비, 이자벨라가 이때다 싶어 입을 열었다. 그녀는 헤이번을 힐끗 돌아보고는 다시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공작 부인을 향해 말을 이었다.
“노여움을 가라앉히세요, 부인. 아직 어린아이인데 어른인 우리가 이해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해할 게 따로 있지요, 선왕비전하. 제 앞에서 무례를 범한 것이라면 어떻게든 너그럽게 넘어갔을 겁니다. 하지만 선왕비전하께서 방문하셨는데 이런 식으로 불경을 저지르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가르치면 되죠. 괸터스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교육을 시키면 되는 일입니다. 안 그런가요, 헤이번?”
이자벨라는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헤이번은 서늘한 얼굴로 그녀를 일별한 뒤, 집사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자 집사가 차라리 잘됐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그에게 다가왔다.
헤이번의 앞에 놓인 잔에 붉은색 와인이 채워졌다. 그리고 집사는 제 할 일을 했다는 듯 다시 뒤로 물러섰다. 그 바람에 그들의 대화가 중단되고 두 사람의 시선이 전부 헤이번에게 집중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자벨라와 공작 부인, 두 사람 모두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 와인 잔을 살짝 돌려 그 향을 음미하는 데에 집중했다.
그의 그런 행동에 공작 부인이 인상을 쓰며 뭐라 하려는 순간, 헤이번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서늘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차가운, 짙푸른 시선이었다.
“……!”
페란테 공작 부인이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그러고는 그런 제 모습에 자존심이 상한 듯 입술을 깨물며 냅킨을 꽉 움켜잡았다.
“공녀를 불러오게.”
상처 입은 자존심을 회복시킬 셈일까. 공작 부인은 재차 집사에게 명령했다. 조금 전보다 더 단호한 투였다. 집사는 또다시 반복된 상황 앞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식사하시죠. 요리가 다 식겠습니다.”
“공녀가 오면 그때 같이 식사하마. 여기 잠깐 내려와 식사도 못 할 정도로 중병을 앓고 있는 건 아닐 터.”
공작 부인은 지지 않겠다는 듯 헤이번의 푸른 눈을 쏘아보았다. 헤이번이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차가운 웃음에 이자벨라와 공작 부인의 몸이 동시에 움찔거렸다.
“플리타를 데려오게, 야닉.”
“……예, 전하.”
집사는 제 주인의 말에 잠시 주저하다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공작 부인은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건방진 조카가 드디어 제게 굴복했다고 여긴 것이다.
물론 헤이번은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않았다. 그저 짜증이 조금 났을 뿐.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발소리가 들리는 듯싶더니 이내 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공작 부인과 이자벨라의 서늘한 시선이 동시에 출입문으로 향했다. 집사의 뒤편에 서 있던 작은 아이가 그 시선에 어깨를 움츠렸다.
그 모습을 본 공작 부인이 코웃음을 쳤다. 역시 근본은 못 속이는 법이란 말이 저절로 나오려는 순간, 아이의 곁에 있던 하녀가 아이를 향해 몸을 숙이더니 뭐라 속삭였다.
그러자 플리타가 으응, 하고 작게 대답하더니 이내 타박타박 걸어와 헤이번과 선왕비, 그리고 공작 부인의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아이가 양손으로 치맛자락을 잡고 무릎을 살짝 굽혔다가 펴며 인사했다. 애써 아닌 척하려 했지만, 미처 지우지 못한 긴장감이 아이의 작은 목소리에서 고스란히 묻어났다.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다섯 살밖에 되지 않는 아이가 어떻게 제 속내를 완벽히 감출 수 있겠는가. 더구나 저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어른들 앞에서.
바들바들 떨면서도 의연하게 서서 인사를 한 것만으로도 대견해야 할 터였다.
그러나 선왕비와 공작 부인, 두 사람 모두 그런 아이를 냉랭하게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들의 시선 어디에서도 온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외려 작은 흠이라도 잡아내겠다는 듯 아이를 보는 시선은 날카롭기까지 했다.
“……쯧.”
그렇게 잠시 플리타를 살펴보던 공작 부인이 혀를 찼다. 흠을 잡아내고자 했던 바람과는 달리 아이의 예법에는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다소 작기는 했지만, 굳이 지적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흠을 찾지 못한 아쉬움에 재차 혀를 차고는 아이에게서 뒤늦게 시선을 거두었다.
“저녁은.”
그때, 헤이번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플리타가 저를 향한 말인 줄 모르고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돌려 아이를 향해 재차 물었다.
“저녁은 먹었느냐.”
“아……. 아니요. 아직.”
플리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방에서 로제랑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요. 집사 할아버지가 불러서…….”
제 아비가 건넨 질문이 그렇게 반가운 것일까. 플리타는 선왕비와 공작 부인 앞이라 겁을 먹었던 것조차 잊은 듯 뺨까지 붉게 물들인 채 상기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리 와서 앉아라.”
헤이번은 본인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이자벨라와 공작 부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집사를 돌아보고는 말을 이었다.
“아이의 식사를 가져오게.”
“예, 전하.”
집사는 고개 숙여 대답한 뒤, 서둘러 주방장을 찾았다. 플리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로제가 아이의 뒤편에 서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마음이 놓인 듯 플리타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이는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제 아비의 옆자리로 다가갔다. 그러자 헤이번이 무심한 표정으로 아이가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당겨 주었다.
“……보기 좋네요, 두 사람. 언제 이렇게 친해졌어요?”
그 광경을 가만히 보던 이자벨라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녀는 자리에 막 앉은 플리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도 플리타랑 친해지고 싶은데 말이에요. 당신은 초대도 해 주지 않고. 참 못됐어. 그렇지 않니, 플리타?”
이자벨라가 사르르 눈웃음을 지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더니 플리타에게로 말을 돌렸다. 아이는 마침 주방장이 가져온 요리가 앞에 놓이는 걸 보고 있다가 느닷없이 제 이름이 불리자 당황하여 눈을 깜빡였다.
“……어, 저, 저는.”
아이의 연녹색 눈이 불안한 빛을 띠며 흔들렸다. 플리타는 빠르게 눈을 깜빡이다가 뒤를 돌아 손을 뻗었다.
“로, 로제…….”
울먹이며 로제를 부르는 목소리가 가련했다. 로제가 그 부름에 냉큼 플리타의 곁으로 다가가려는 순간, 공작 부인의 날카로운 질책이 쏟아졌다.
“식사 자리에서 이 무슨 철없는 어리광인 게야!”
“……!”
히끅. 플리타가 언성을 높인 공작 부인을 보고 놀란 탓인지 딸꾹질을 하니, 공작 부인의 매서운 시선이 아이에게로 향했다. 아이는 황급히 제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지만, 한번 나온 딸꾹질은 쉽게 멈춰지지 않았다.
“이래서 천한…….”
쨍그랑.
공작 부인이 재차 혀를 차며 냉소 섞인 투로 말을 꺼낸 것과 동시에 유리 잔이 바닥에 떨어졌다. 바로 헤이번이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바닥에 떨어뜨린 것이었다.
“앗! 지금 당장 치우겠습니다.”
집사가 산산이 조각난 유리 조각을 보고 황급히 입을 열었다. 헤이번은 집사의 명에 따라 부지런히 움직이는 하녀들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놀라서 계속 딸꾹질을 하는 아이를 다독이는 여자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모두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와중에도 오로지 플리타에게만 집중해 있는 모습이었다.
“로제.”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로제는 플리타를 토닥이며 달래다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들었다. 속을 짐작할 수 없는 푸른 눈이 그녀를 직시했다.
“아이를 데리고 방으로 돌아가도록.”
“……예.”
로제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순순히 대답했다. 플리타를 위해서는 차라리 잘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냉랭한 시선 속에서 잔혹한 말을 듣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공녀님, 방으로…….”
“누구 마음대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냐! 당장 그 자리에 앉지 못해?”
공작 부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플리타가 로제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그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다시금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흐이잉…….”
플리타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울음이 새어 나왔다. 간신히 참고 또 참았던 두려움이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듯 터져버린 것이다.
“공녀님.”
로제는 울먹이는 플리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작은 아이가 바들바들 떠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방으로 돌아가요, 우리.”
“흐윽, 으응.”
플리타가 로제에게 안긴 채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두 팔을 뻗어 그녀의 목을 끌어안았다. 안아 달라는 의미였다. 로제는 제게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를 안았다.
“그만 가 보겠습니다.”
그녀는 플리타를 안은 채 헤이번에게 인사했다.
헤이번이 로제의 품에 안긴 아이를 잠시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가 다시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리는데.
“지금 누구 마음대로 가겠다고!”
그 순간, 공작 부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도대체 고용인들 교육을 어찌 시키는 거니. 버릇없이 제 마음대로 가겠다고 하는데, 헤이번, 너는 그걸 그냥 보고만 있…….”
“여기까지입니다, 고모님.”
헤이번이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더니 시선을 들었다. 날카로운 칼날처럼 서슬 퍼런 시선에 공작 부인이 바르르 떨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뭐가 여기까지라는 거니?”
“제가 고모님, 아니, 페란테 공작 부인의 무례를 용납할 수 있는 선이 여기까지라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