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선왕비와 페란테 공작 부인의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생각만으로도 두통이 일었다. 그렇지만 불편한 속내와 달리 그의 표정은 평소처럼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언제나 그렇게 살아왔기에 기분을 드러내지 않는 건 익숙했다.
헤이번은 건조한 시선으로 잠시 창밖을 보다가 집사를 돌아보았다.
“불청객이기는 하지만 손님은 손님이지. 손님을 맞이하는 일은 자네와 하녀장이 알아서 잘할 거라고 믿네.”
“성심껏 준비하겠습니다.”
집사는 허리를 숙이며 공손히 대답하고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가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헤이번이 다시금 그를 불러 세웠다.
“플리타는…….”
“예?”
“아이는 가급적 그들과 마주치지 않게 했으면 좋겠군.”
헤이번의 말은 냉랭했다. 어떻게 들으면 제 아이를 내보이기 창피하니 숨기라는 의미 같기도 했다. 하지만 집사는 자신의 주인이 어떤 뜻으로 한 말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충직한 노집사의 얼굴에 은근한 미소가 번졌다. 아이가 선왕비나 공작 부인을 무서워한다는 걸 제 주인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이를 배려하여 이 같은 지시를 내렸다는 것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집사는 거듭 공손히 예를 갖추어 인사한 뒤, 밖으로 나갔다.
헤이번이 그를 힐끗 돌아보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서늘하기만 하던 얼굴에 조금은 멋쩍은 기색이 스친 것도 같았다.
* * *
히이잉.
창밖에서 말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정문 안으로 들어오는 마차가 보였다.
“전하께서는 어찌 이런 말도 안 되는 명을 내리셔서…….”
로제는 마차 안에서 내리는 화사한 차림새의 여인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유모가 자수를 놓던 것을 테이블 위에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플리타가 보던 그림책을 슬그머니 덮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로제에게 다가와 그녀의 치맛자락을 꽉 움켜잡았다.
명백히 주종관계가 뒤바뀐 광경이었다. 주인의 입장인 플리타가 저를 모시는 유모의 눈치를 살피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들뿐만 아니라 로제에게도 이 같은 광경은 익숙했다.
……익숙하다 하여 속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로제는 유모의 눈치를 보는 아이가 안쓰럽고 한편으로는 아이를 이렇게 만든 유모가 원망스러웠다. 또한 아이를 보듬어 주지 않은 헤이번에게도 화가 났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무력한 제게 화가 났다. 이 모든 걸 보면서도 어미로서 그 무엇 하나 해 주지 못하는 자신에게. 그저 이렇게 제 치맛자락을 움켜쥔 아이의 손을 가만히 감싸 잡아주는 것 외에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 자신에게.
“안 되겠어.”
유모가 초조한 듯 입술을 짓씹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플리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공녀님,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응?”
“저라도 선왕비전하와 공작 부인께 인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어요? 전하께서 공녀님이 두 분께 실수를 범할까 염려스러워 밖에 나가지 말라는 명을 내리신 것 같은데, 그럴 때일수록 제가 더 신경을 써야죠.”
유모의 말에 플리타가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주눅 든 표정을 지었다. 로제는 그런 아이를 보고 입을 열려다가 꾹 참았다. 그사이에 유모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어쨌든 제가 자리를 비워도 절대 방 밖에 나가시면 안 돼요, 공녀님. 아시겠어요?”
“으응.”
“로제, 네가 책임지고 공녀님을 모시고 있어라. 괜히 방 밖으로 나가지 말고.”
“예, 유…….”
로제가 대답을 끝낼 새도 없이 유모는 냉큼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마음이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쾅, 닫힌 문 쪽을 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선왕비와 공작 부인이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유모는 줄곧 저런 모습이었다. 게다가 집사가 전한 헤이번의 명을 들은 뒤에는 더욱 그랬다.
「왜 공녀님을 두 분께 인사조차 드리지 못하게 하는 건가요!」
「대공 전하의 명이오, 미겔 부인.」
집사는 유모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전하의 명’이라는 말만을 일관되게 했다. 결국 지쳐버린 유모가 먼저 두 손을 들고 포기할 때까지 말이다.
“……유모, 화난 거야?”
그 순간, 플리타가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로제는 시선을 돌려 플리타를 보았다. 플리타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니요.”
“화난 것 같은데. 아까부터 계속 뭐라고 했잖아. 나 때문에 나가지도 못한다고.”
플리타는 로제를 올려다보다가 입을 삐죽이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아빠는…… 내가 창피한 걸까?”
로제는 플리타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고개를 숙인 아이의 얼굴이 시무룩했다. 요 며칠 제 아비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 밝아졌던 얼굴 위에 다시금 그늘이 졌다.
“내가, 우웅, 큰엄마 앞에서 바보처럼 굴어서. 고모할머니도 무서워하고. 그래서…….”
“지금 그 말씀, 전하께서 들으시면 서운해하시겠어요.”
로제가 웃으며 아이의 말을 끊었다. 그러자 플리타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빠가 서운해?”
“그럼요, 서운하시죠. 아빠 마음도 몰라준다고 내심 속상해하실지도 몰라요.”
“……!”
로제의 말을 가만히 듣던 플리타의 눈이 흔들렸다. 놀란 마음이 고스란히 보일 정도로 동그래진 눈을 여러 번 깜빡이던 아이가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저 입만 달싹일 뿐, 아이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로제는 묵묵히 아이를 기다려 주었다. 그러자 플리타가 몇 번 더 입을 달싹이다가 간신히 작은 소리로 물었다.
“정말, 그럴까?”
아이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그러나 로제는 플리타의 목소리에 담긴 기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단언하듯 대답했다.
“물론이죠. 전하께서 공녀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데요.”
“……그, 그치만.”
“못 믿으시겠어요?”
“……아니.”
긍정적인 변화였다. 로제는 가슴속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끼며 플리타를 바라보았다. 잠시 망설이기는 했지만, 아이는 분명 제 스스로 믿음을 표현했다.
그는 알고 있을까.
자신이 행한 그 사소한 변화가 아이에게 이토록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는 걸.
“그러엄…… 아, 아빠가 왜 그런 거야?”
플리타가 손가락을 꼬물거리다가 다시금 물었다. 로제는 가만히 미소를 지은 뒤, 입을 열었다.
“공녀님이 걱정되어서 그러셨을 거예요.”
“……걱정?”
“예. 공녀님께서 마음 편히 계시기를 바라셨을 테니까요.”
“…….”
플리타는 입을 꾹 다문 채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맞잡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인사를 해야 하잖아. 유모가 그게 예의라고 했는데.”
“물론 그게 예의이기는 하죠. 집에 온 손님을 맞이하는 거니까.”
로제의 말에 플리타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울먹였다. 그런 아이를 토닥이며 로제가 말을 이어 나갔다.
“그렇지만 전하께는 공녀님이 우선이거든요.”
“……?”
“예법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하께서는 공녀님을 더 중요하게 여기신 거예요.”
옳은 결정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아이에게 기본 예법을 가르치는 건 중요한 일이니 말이다. 그러나 로제는 유모와는 달리 헤이번의 결정을 환영하는 쪽이었다.
누군가는 헤이번의 이 결정을 탓할 수도 있다. 어린아이라 하여 무조건 과보호하면 버릇만 나빠진다고 할 수도 있고, 아이를 나약하게 키우는 것이라 비난할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제 겨우 다섯 살이다. 자신과 그의 아이는.
더구나 부모의 사랑이라고는 느껴보지도 못한 채 자랐다. 엄마의 품에 안겨 자장가를 들으며 잠이 든 적도 없고, 아빠의 무릎 위에 앉아 까르르 웃으며 장난을 쳐본 적도 없다.
같이 인형 놀이를 하지도 못했고, 정원에 나가 소꿉놀이를 하지도 못했다. 아빠의 목말 한 번 타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든든한 어깨 위에 앉아 제 눈높이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세상을 보지도 못했을 것이고…….
플리타를 바라보는 로제의 눈빛이 안쓰럽다는 듯 흔들렸다.
어리석은 어미라 해도 어쩔 수가 없다. 부모의 다정한 품을 알지 못하는 어린 딸에게 이 정도 과보호를 하는 게 뭐 어떤가. 버릇 좀 없이 자라면 어떤가. 버릇없이 자라기를 바라도 주눅 들어 있는 아이가 그렇게 될 리 없다는 걸 잘 아는데.
그래서 그 사실이 이토록 제 가슴속을 저릿하게 만드는데.
“우리, 그림 그릴까요?”
‘……그러니까 괜찮아, 아가.’
로제는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목구멍 깊숙이 삼킨 뒤, 말을 돌렸다. 그런 로제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아이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덩달아 웃으며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꺼냈다.
* * *
선왕비와 공작 부인을 위한 만찬이 이른 저녁부터 준비되었다. 화사한 꽃들로 장식된 식탁 위에 주방장이 솜씨를 부려 만든 요리가 가득 올라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요리에 손을 대지 않았다. 상석에 앉아 있는 헤이번도, 그리고 선왕비와 페란테 공작 부인도.
“지금 당장 공녀를 불러오라 하지 않았나.”
그 대신, 공작 부인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식탁 위를 채웠다. 집사는 난처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공녀님께서 몸이 아프신 터라…….”
“그래서 손님이 방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사도 하러 나오지 않고, 저녁 식사에도 오지 않았다? 지금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는 건가?”
공작 부인이 매서운 눈길로 집사를 쏘아보며 비아냥거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휙 돌려 헤이번을 쳐다보았다.
“헤이번, 네가 말해보렴. 변변치 않은 집안의 아이라 할지라도 이런 식의 무례는 저지르지 않을 게다. 그런데 하물며 대공의 딸이 이렇게 예의 없이 군다고? 이건 헤이번, 네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기도 해. 도대체…….”
“제가 방에서 나오지 말라 했습니다, 고모님.”
헤이번은 서늘한 시선으로 제 고모, 페란테 공작 부인을 쳐다보며 말을 꺼냈다.
“나오지 말라 했다고?”
“예, 그렇습니다.”
너무나 태연한 대답에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벙긋거리던 공작 부인의 눈꼬리가 올라간 건 그 직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