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누구, 앗! 저, 전하…….”
역광 때문에 처음에는 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곧 그녀는 문 앞에 서 있던 이가 헤이번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기는 무슨 일로, 아, 저, 공녀님을 보러 오신…….”
예상치 못한 시간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를 마주한 탓일까. 로제는 당황하여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플리타는 잠들었나?”
헤이번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중간에 말을 가로챘다. 로제는 그의 물음에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예.”
그것이 전부였다. 헤이번은 마치 수문장이라도 되는 듯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로제를 보다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만약 유모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당장 아이를 깨우겠노라 호들갑을 떨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눈앞의 하녀는 그러지 않았다. 저보다는 플리타가 우선이라는 듯. 곤히 잠든 아이를 깨우지 않는 것이 세상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듯.
그러고 보니 조금 전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주 작은 소리조차 내지 않고 문을 열고 나오던 모습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조금 과장하여 추측하자면 전직 암살자가 아닐까 싶을 만큼.
“푸훗.”
그는 자신의 엉뚱한 생각에 어이가 없어 실소를 뱉었다. 그러자 로제가 눈을 크게 뜨더니 다시금 그를 쳐다보았다. 놀란 토끼처럼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저를 보는 여자와 다시금 시선이 마주쳤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것처럼 가냘픈.
‘이런 여자가 무슨…….’
아무리 제멋대로 뻗어 나간 망상일 뿐이라 해도 기가 막혔다. 헤이번은 고개를 저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입을 열려고 했지만 눈앞의 여자가 먼저 꺼낸 말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전하, 오늘은 그냥 돌아가시면 안 되겠는지요. 이러다가 공녀님의 잠을 깨울 것 같습니다.”
로제는 진심으로 신경이 쓰인다는 듯 침실 문 쪽을 돌아보며 작게 속삭였다. 한없이 약해 보이면서도 이럴 때 보면 당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지.”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 당돌함이 불쾌하지 않았다. 헤이번은 로제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이윽고 그의 등 뒤에서 안도하는 듯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두어 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로제가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것인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거기 계속 있을 건가?”
“아,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헤이번은 말끝을 흐리는 로제를 향해 턱짓으로 따라오라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 다시 복도를 걷기 시작하자 뒤쪽에서 머뭇거리다가 제 뒤를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발소리가 적막을 깼다. 헤이번과 로제, 그들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복도의 불빛만이 어둠을 밝히며 제 존재를 드러내고 있을 따름이었다.
플리타가 아직 어린 터라 이른 시간에 잠을 자니, 늦은 저녁 이후로는 공녀의 침실이 있는 층에 고용인들의 접근이 허락되지 않아서였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걷던 헤이번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로제는 그의 뒤를 따라 조용히 걷다가 덩달아 멈춰 서서 고개를 들었다. 복도와 연결되어 있는 테라스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
“들어와라.”
어리둥절해 하던 로제를 향해 명령조로 말을 건넨 헤이번이 테라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다가 뒤늦게 그의 말을 이해하고는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움켜잡았다.
“저는…….”
깊은 한밤중은 아니라 하지만, 그래도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이었다. 그런 시간에 헤이번과 단둘이 있는 건 곤란했다. 그와 자신의 관계가 주인과 하녀이기에 그랬다.
“괜찮으니 들어오도록 해. 플리타에 대해 물어볼 것도 있고, 그래서 그러는 거니까.”
로제의 염려를 눈치챈 것인지, 헤이번이 조금 더 길게 말을 했다. 로제는 잠시 주저하다가 천천히 테라스 안으로 들어갔다. 플리타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다고 하는데, 그런 그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사실 자신이 거절이란 걸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지만.
“말씀하십시오, 전하.”
로제는 테라스 안쪽 깊숙이 들어가는 대신, 입구 근처에 서서 입을 열었다. 헤이번이 테라스 한쪽에 놓인 의자에 앉아 그녀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굳이 그녀에게 다가오라는 강요를 하지는 않았다.
그 모습에 로제의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그 순간, 헤이번이 정원 쪽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가족이 있나?”
“……예?”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녀가 예상한 질문 중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저에 대한 질문이라니. 더구나 ‘가족’이 있느냐고 묻다니.
로제는 자신도 모르게 목이 메어 하녀복 앞섶을 꽉 움켜잡았다. 손끝이 차갑다 못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정작 그 질문을 던진 남자는 여유롭게 정원을 바라볼 뿐이었다.
“……물론, 있습니다.”
사실은 없다고 해야 했다. 플리타의 전담 하녀로 고용된 뒤, 하녀장에게 제 신상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그렇게 말했으니까. 국경 지대의 시골 마을에서 홀로 살았노라고. 그러니 당장 일을 시작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에게 ‘가족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한때 제 유일한 가족이었던 남자에게 그런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결혼은?”
“……!”
“아, 내 질문을 불쾌하게 듣지 않았으면 좋겠군. 나는 그저, 네가 어린아이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아서. 혹시 아이가 있는 건가 해서 물어본 것뿐이다. 대답하기 곤란하면 하지 않아도 돼.”
정원을 바라보던 헤이번이 고개를 돌려 로제를 쳐다보고는 손을 내저었다. 로제는 머뭇거리다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입을 굳게 다물었다.
헤이번의 푸른 눈이 그런 로제에게 잠시 머무르다가 정원으로 되돌아가려는 순간이었다. 로제의 입이 열린 것은.
“……아이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도 있었고요.”
“그런가. 있었…….”
헤이번이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다가 미간을 좁혔다. ‘있다’고 말한 게 아니라 ‘있었다’고 말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내가 실례했군.”
“아니요, 전하. 괜찮습니다. 이미…… 오래전의 일인걸요.”
거짓말이다. 그는 여자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묻어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녀가 제 하녀라 하더라도 그 개인사까지 시시콜콜 추궁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럴 생각으로 그녀에게 따라오라 한 것도 아니고…….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녀가 한 말이 거슬렸다. 아이. 그리고 남편. ……사랑하는 남편.
톡톡.
헤이번은 저도 모르게 테이블을 손끝으로 두드리다가 이내 그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하녀는 여전히 테라스 입구 근처에 두 손을 모은 채 공손히 서 있었다.
……아이도, 남편도 모두 잃은 걸까.
어쩌다가 그런 일을 겪었을까. 살던 곳에 전염병이라도 돌았던 걸까. 아니면 무슨 사고라도 겪었던 걸까.
그는 로제를 처음 보았던 날을 떠올렸다. 물에 빠진 플리타를 구했던 여인을. 새파랗게 질린 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몰골로 아이에게 끊임없이 숨을 불어넣고 있던 그 여자의 모습을.
‘혹시 그 절박함이 본인의 아이를 잃었던 일에서 비롯된 걸까.’
그렇게 본다면 당시 그녀의 행동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아이를 잃은 어미이기에, 위험에 빠진 다른 아이에게도 그토록 간절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는 이유 없이 술렁대는 속을 털어낸 뒤, 화제를 돌렸다.
“……플리타가 너를 잘 따르더군. 네가 아이에게 잘해 주는 모양이야.”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전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로제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주인이 치하하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서는 기뻐하는 기색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본인이 말한 그대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듯이.
헤이번은 그녀의 덤덤한 태도에 외려 흥미가 생겼다. 타인에게 별다른 관심을 가진 적 없던 그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물론 그의 앞에 있는 여자는 그런 사실조차 알지 못할 테지만 말이다.
“어쨌든, 앞으로도 아이를 잘 부탁하지.”
그는 곧바로 그녀에게서 흥미를 거두었다. 술렁대는 속 따위, 달빛의 변덕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기며.
그것이 헤이번, 그다운 행동이었기에.
* * *
그렇게 평범한 날들이 흘러갔다. 그사이에도 헤이번은 플리타와 아침뿐만 아니라 점심, 혹은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둥 아이와의 시간을 아주 조금씩 늘려갔다.
사소한 변화였다. 하지만 대공 저의 고용인들에게는 놀라운 변화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누군가에게 그 소식이 전해진 건 며칠 뒤였다.
똑똑.
헤이번은 책을 읽다가 급히 달려온 누군가의 노크 소리에 미간을 좁혔다.
집사가 제 주인의 표정을 살피고는 냉큼 문 쪽으로 다가갔다. 조심성 없는 하인이 그런 거라면 마땅히 야단을 쳐야겠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뭐?”
그러나 집사는 하인이 가져온 전갈에 저도 모르게 와락 인상을 구겼다. 예상치 못한 소식 때문이었다.
“무슨 일인가, 야닉?”
집사의 등 뒤에서 헤이번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집사는 황급히 표정을 고치고는 서둘러 그에게 돌아가 방금 전해 들은 소식을 보고했다.
“선왕비전하께서 곧 도착하신다고 합니다. 페란테 공작 부인께서도 함께 방문하신다고…….”
“…….”
헤이번은 말없이 집사를 쳐다보았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만이 그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고모님께서 방문하신다고? 공작령에 내려가신 걸로 알고 있었는데.”
“죄송합니다, 전하. 그에 대하여 미처 알지 못하였습니다.”
집사는 송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왕실의 친인척에 대한 제반 상황을 언제나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으니, 이것은 명백히 제 실수였다.
“됐네. 노부인의 행적까지 감시할 수는 없지. 그럴 이유도 없었고. 괜히 스스로를 탓하지 말게.”
헤이번은 그런 집사를 향해 덤덤히 대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