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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26화 (26/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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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로제는 유모에게 들킬세라 소리를 내지 않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플리타가 방긋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어깨를 움츠리고는 다시 동화책을 읽는 시늉을 했다.

“……쯧.”

유모가 고개를 휙 돌려 그런 플리타를 보다가 혀를 한 번 차고는 뭐라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똑똑.

하지만 그보다 먼저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유모는 미간을 찌푸린 채 로제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로제가 냉큼 고개를 조아린 뒤, 문 쪽으로 다가갔다.

“하녀장님.”

문을 열자마자 보인 이는 하녀장이었다. 로제는 하녀장을 향해 인사를 하고는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나 하녀장은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로제를 잠시 쳐다보았다.

“……?”

저를 왜 쳐다보나 싶어 로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녀장을 보았다. 그러자 하녀장이 시선을 거두더니 그대로 그녀를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하녀장님께서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오셨는지…….”

유모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하녀장을 향해 말을 건넸다. 하녀장은 유모를 일별하며 눈인사를 보낸 뒤, 플리타에게 공손한 어조로 고했다.

“전하께서 오늘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셨습니다.”

“……어?”

플리타가 느닷없는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로제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방금 들은 게 맞는지 묻고 싶어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로제는 아이에게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닐 뿐만 아니라, 그녀 스스로도 얼떨떨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설마…… 내가 한 말 때문에?’

아니겠지. 아닐 것이다. 고작 하녀의 말에 대공이 냉큼 본인의 행동을 고쳤다고 하면, 누구나 다 웃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제의 얼굴은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제 말을 무심히 듣는 것 같더니, 그래도 나름대로 귀를 기울여 들은 모양이다.

아랫사람의 말이라고 무조건 무시하지도 않았고.

“아, 아빠랑 저녁 같이 먹어?”

그 순간, 플리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눈을 깜빡이며 하녀장을 향해 확인하듯 물었다. 하녀장이 평소의 엄격한 모습답지 않게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공녀님. 전하께서 직접 전하라 하셨습니다.”

“……와아!”

플리타의 연녹색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그제야 유모 역시 정신을 차린 것인지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맙소사,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요. 공녀님, 다시 몸단장을 하셔야겠어요! 로제, 거기 멍하니 서서 뭘 하고 있어? 당장 공녀님께서 갈아입을 드레스를 챙겨오지 못하겠니?”

“아…… 예! 예, 유모님!”

로제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유모의 지시에 따라 방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번졌다.

* * *

싱글벙글.

헤이번은 제 옆에 서서 시중을 드는 집사의 얼굴 가득 번지는 웃음을 보았다. 하지만 굳이 그것을 알아차렸다는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저 덤덤한 얼굴로 식당 출입문 쪽을 힐끗 쳐다보았을 뿐.

“크흠, 흠.”

그 순간, 집사가 웃음을 참느라 괴상한 소리와 함께 헛기침을 했다. 동시에 헤이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 전하. 저는 그저…….”

제 주인의 찌푸려진 얼굴을 본 집사가 해명을 하기 위해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출입문 밖에서 아이의 발소리가 들렸다.

“아! 공녀님께서 오셨나 봅니다.”

집사는 다행이란 표정으로 냉큼 출입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가 문을 열자마자 플리타가 유모의 손을 잡고 그 앞에 나타났다.

“오셨습니까, 공녀님.”

“네에.”

플리타는 늙은 집사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뒤,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아이의 모습을 본 헤이번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아이는 ‘완벽하게’ 공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침에 봤던 알록달록한 리본의 잔상이 아직까지 선명히 남아 있는데 말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아쉬움이 들어 혀를 찼다. 그러자 플리타가 흐읍,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헤이번은 놀란 토끼처럼 저를 보는 아이를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아침과는, 다른 모습이구나.”

“어, 네에. 저기…….”

“아침에는 제가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여 공녀님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전하. 송구합니다.”

플리타가 양손을 꼼지락거리며 머뭇머뭇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유모가 아이의 말을 가로막고 냉큼 끼어들었다. 헤이번의 푸른 눈이 아이에게서 유모에게로 옮겨갔다.

지금 플리타의 모습이 전적으로 제 작품이라는 듯 유모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비록 미천하기는 해도 어느 정도 안목이 있을 줄 알았는데, 하녀가 부족한 점이 많아서…….”

유모가 의도적으로 한숨을 내쉬며 로제를 힐끗 돌아보고는 말을 이으려 했다. 그 모습을 보던 헤이번이 로제를 향해 가볍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고는 다시 무심한 표정으로 플리타에게 물었다.

“답답하지 않으냐?”

“……예?”

“저녁을 먹기에는 너무 격식을 갖춘 차림새라서.”

헤이번의 시선이 재차 비뚜름하게 유모를 향했다. 유모가 의기양양하게 제 할 말을 이어가려다가 벙긋벙긋 입을 움직였다. 그러더니 그의 말뜻을 이해한 듯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이리로.”

그는 유모에게서 시선을 거둔 뒤, 플리타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플리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데구루루 굴리다가 간신히 헤이번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래서야 뭘 먹어도 체하기 십상이겠군.”

헤이번의 손이 플리타의 드레스로 향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목 위까지 철저히 잠근 단추로 말이다. 그는 아이의 목을 조이던 단추 몇 개를 풀었다.

“어, 우웅…….”

당황한 플리타가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이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그의 손길이 낯설기는 하지만, 그렇다 해서 싫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오히려 기뻐하는 기색이 홍조 띤 얼굴 위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제야 좀 낫구나.”

헤이번은 플리타의 목 부분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집사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집사가 그 뜻을 알아차리고는 정중히 입을 열었다.

“그럼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전하. 공녀님도 어서 자리에 앉으시지요.”

집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기 중이던 하인과 하녀들이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 * *

“헤헤!”

“그렇게 좋으세요?”

로제가 플리타의 옷을 갈아입히다가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플리타가 양팔을 번쩍 든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응! 아빠가 오늘은 말도 많이 걸어줬어! 빵도 많이 먹으라고 그러고. 유모는 뚱뚱해지면 안 된다고, 항상 조금만 먹으라 했는데.”

플리타는 유모가 없는데도 괜히 눈치가 보이는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로제는 평소보다 반짝이는 눈으로 저를 보는 아이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사소한 변화였다. 대단한 일은 아니라 할 수 있었다. 그저 저녁을 함께 먹고, 아주 조금 대화를 나눈 것뿐이니까. 하지만 그 사소함이 아이에게는 커다란 기쁨으로 되돌아왔다.

‘……그에게도 기쁨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문득 헤이번이 궁금했다. 그 남자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고 싶었다. 아이와 함께한 시간이 행복했는지 묻고 싶었다.

“아빠가 나를 좋아하는 걸까?”

플리타가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 위에 앉아 다리를 앞뒤로 흔들다가 다시금 조심스럽게 물었다. 로제는 플리타가 입었던 드레스를 정리하고는 아이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럼요.”

“진짜?”

“물론이죠.”

플리타의 연녹색 눈에 서린 기대와 설렘이 고스란히 보였다. 로제는 침대로 다가가 플리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자 아이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 아래쪽으로 살짝 내려갔다.

“공녀님은 대공 전하의 하나뿐인 따님이세요.”

“응.”

“세상의 그 어떤 부모도 자기 자식을 싫어하지 않아요. 오히려 본인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아이를 지킬 수 있다면…… 망설임 없이 그 길을 택할 정도로 사랑하죠.”

로제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조금은 떨려 나왔다. 플리타는 그 떨림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아이는 그저 해맑게 물었다.

“엄마도?”

“……예?”

순간적으로 로제의 눈이 크게 뜨였다. 플리타가 저를 엄마라 부른 것만 같았다.

“엄마도 나를 사랑했을까?”

“……물, 론이죠. 너무나 사랑하셨을 거예요. 지금도 그렇고요.”

로제는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꾹 눌러 참은 뒤, 아이의 잠자리를 정돈했다. 그 와중에도 플리타는 제 아빠와 저녁을 함께 먹고 대화를 나눈 게 즐거운지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제 주무셔야죠.”

“응! 로제도 잘 자.”

“예.”

그녀는 플리타의 목 위까지 이불을 끌어다가 덮어주고는 침대 옆의 램프를 껐다. 금세 새근새근 잠이 든 아이의 얼굴 위로 달빛이 은은하게 스쳤다.

……우리 아가.

로제는 조심스럽게 플리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손끝이 아이의 머리칼과 뺨 위로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직접 아이를 쓰다듬지는 못했다.

로제의 손이 애틋한 감정을 품은 채 몇 번이나 멈칫거렸다.

단 한 번이라도 아이를 오롯이 품에 안을 수 있다면.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보드라운 뺨을 쓰다듬을 수 있다면.

허망한 바람이 작게 내쉰 한숨을 타고 새어 나갔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은 뒤, 아주 작게 속삭였다.

“좋은 꿈 꾸세요, 공녀님.”

“우웅…….”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플리타가 웅얼거리더니 베개 위에 제 머리를 비벼댔다. 로제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며 미소를 짓고는 숙이고 있던 허리를 폈다. 그리고 침실 안을 다시 한번 둘러보고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이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하여 로제는 문을 조심히 열었다. 복도 양편의 램프 불빛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단 하나, 제 그림자 위에 다른 누군가의 그림자가 겹쳐진 것만 제외하면.

“……!”

로제는 소리 없이 문을 닫고 돌아서다가 그런 제 눈에 들어온 그림자를 보고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문 바로 앞에 커다란 형체의 누군가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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