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로, 흐흠, 내게 할 말이란 게 뭐지?”
헤이번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을 뻔했다가 가까스로 말을 돌렸다. 그의 낯빛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서늘했지만, 목덜미는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러나 집무실 안이 어둑한 터라 로제는 그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그보다는 바짝 긴장한 탓에 눈치챌 여력이 없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했다.
그녀는 두 손을 모아 잡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헤이번을 똑바로 보는 대신,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창밖의 풍경에 무심코 시선을 던졌다.
“아…….”
잔뜩 흐려 비가 계속 내리는 듯싶더니 어느새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춘 모양이었다. 로제는 창문 위쪽에서 톡, 떨어진 빗방울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걸 보다가 감탄했다. 하지만 곧바로 제 실수를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잠시 한눈을…….”
“……됐어. 그보다 나한테 할 말이란 게 뭔지 들어보지.”
헤이번은 로제가 봤던 창문 쪽으로 시선을 힐끗 던졌다. 하지만 그녀가 무엇을 보고 감탄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가늘어진 빗줄기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전부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로제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헤이번과 눈이 마주치자 두 손을 깍지 끼워 맞잡고는 심호흡을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저러나 싶어 헤이번의 미간이 좁아졌다.
솔직히 하녀와 이렇듯 대화를 나눌 일은 없었다. 모든 건 하녀장이나 집사가 알아서 처리할 일이니.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이례적이었다. 남들이 봤다가는 괜한 말을 들을 수도 있는.
‘어리석은 짓을 한 건가.’
헤이번이 충동적으로 허락했던 제 행동을 후회하려는 찰나, 로제가 다시 한번 숨을 깊이 들이쉬더니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공녀님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해 주셨으면 합니다, 전하.”
“……뭐?”
헤이번의 표정이 굳었다. 로제는 냉랭한 그의 시선을 마주한 채 재차 말을 이었다.
“공녀님과 함께하시는 시간이 너무나 적습니다. 아침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잠깐.”
그는 손을 들어 보이며 그녀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로제가 입을 달싹이다가 그대로 다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헤이번이 차가운 어조로 말을 건넸다.
“지금 내게 훈계라도 하려는 건가?”
“아니요, 저는…….”
“아무리 내가 너를 플리타의 전담 하녀로 고용했다고 하지만, 이런 권한까지 주지는 않았는데.”
헤이번의 목소리에서 불쾌감이 묻어났다. 감히 하녀가 훈계조로 말하였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불쾌했을 터였다. 로제는 손바닥에 땀이 나는 걸 느끼고는 모아 잡았던 두 손을 치맛자락에 닦았다.
“그런 월권은 꿈에도 생각한 적 없습니다. 저는 그저 공녀님을 모실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공녀님은, 정말 사랑스러운 분이거든요.”
바짝 긴장하여 굳어 있던 여자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헤이번을 의식하여, 그에게 일부러 보이려고 지은 거짓 미소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플리타를 사랑스럽다고 여기는 게 분명했다.
헤이번은 로제의 그 모습을 보자 불쾌했던 마음이 누그러드는 걸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표정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모두에게 익숙한, 대공의 얼굴이었다.
“전하께서도 틀림없이 공녀님의 사랑스러움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
“그걸 조금만 더 공녀님께 표현해 주시면 안 될까요?”
로제의 녹색 눈은 올곧았다. 냉랭한 헤이번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그를 피하지 않고, 외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했다. 그는 어찌 보면 당돌하다고 할 수 있는 하녀를 쳐다보다가 되물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예?”
“플리타가 네게 투정이라도 부렸나? 그래서 아이의 투정을 곧이곧대로 받아 주고, 나를 찾아온 건가?”
헤이번은 냉소를 지었다. 그의 말에 로제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소나기가 이제 완전히 그친 것인지 햇살이 가득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헤이번은 햇살이 아닌, 창틀에 고여 있는 빗물을 보았다.
문득 오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제 몸집보다 커 보이는 빨래 바구니를 들고 휘청대던 여자의 모습이 덩달아 기억났다.
미련한 여자였다. 또한 일관적인 여자이기도 했다. 이렇듯 제 주제도 모르고 행동하는 것 하나만큼은 말이다.
“그 아이는 평범한 어린아이가 아니다. 괸터스의 핏줄이자 하나뿐인 공녀, 그게 바로 내 딸이지.”
헤이번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제를 바라보는 푸른 눈은 지극히 귀족적이었다. 로제가 알지 못했던 그의 모습이었다. 저와 함께 약초를 캐고 흙투성이가 되어 웃던 남자가 아닌.
아이 역시 그러하다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네가 낳았어도 결코 네 아이는 될 수 없다고, 그렇게 선언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에 반발심이 일었다. 서운한 마음과 뒤엉킨 감정이었다.
“사랑스러운, ‘다섯 살’ 공녀님이시죠.”
로제는 녹색 시선으로 헤이번을 똑바로 받아쳤다. 불손한 그녀의 행동에 그가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었다. 물론 그게 전적으로 반발심에서 비롯된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플리타가 우선이었다. 주눅 들어 타인의 눈치를 살피는, 아이답지 않은 모습의 제 딸이.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아침 일찍 일어나는 건 힘든 일입니다. 보통 아이라면 해가 하늘 높이 뜨고서야 간신히 눈을 비비며 일어나죠.”
“…….”
“그런데 공녀님은 졸음이 채 가시지 않아 눈이 떠지지 않으면서도 매일 이른 아침에 일어나십니다. 머리를 만져 드릴 때 꾸벅꾸벅 졸 때가 많으신데도요. 단 한 번도 늦게 일어나지 않으셨어요. 적어도 제가 이곳에 온 이후로는요. 아마 그 전에도 그러셨을 테지요.”
로제는 제 말을 묵묵히 듣고 있는 헤이번을 바라보았다. 젖어 있던 머리는 어느새 다 마른 상태였다. 하지만 평소처럼 단정한 모습은 아니었다. 젖었던 머리가 자연스럽게 마른 탓에 살짝 구불거렸다.
플리타의 머리처럼.
이 와중에도 그녀는 아이와 그에게서 닮은 점을 찾았다는 사실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공녀님께서 왜 그렇게 매일 일찍 일어나시는지 아시나요?”
“…….”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헤이번이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로제의 녹색 눈과 그의 푸른 눈이 교차했다.
“전하와 유일하게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라 그렇습니다.”
“…….”
“공녀님은 전하를 무서워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많이 좋아해요. 아버지이니까요. 하나뿐인 가족이니까요. 그래서 그 어린 분이 그만큼 노력을 하는데…….”
로제는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러운 침묵이었다. 하지만 보잘것없는 침묵이기도 했다. 하녀 따위의 침묵이 무슨 대단한 무게를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초조한 마음이 드는 걸까.
헤이번은 속으로 스스로에게 묻다가 그런 제 질문이 어이없어 미간을 좁혔다. 초조하다니. 마치 야단을 맞는 어린애라도 된 것 같았다.
아니, 어릴 때도 야단을 맞은 적은 없었다. 왕의 아들로 태어난 그를 어느 누가 감히 야단칠 수 있겠는가.
배짱 좋은 하녀라 할 수 있었다. 헤이번이 헛웃음을 삼키고는 이채 서린 눈으로 그녀를 본 것과 동시에 로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전하께서는 노력을 하지 않으시나요? 아니, 그보다…… 어째서 다섯 살 어린아이가 노력을 해야 하는 건가요?”
로제는 헤이번에게 따지듯 물었다. 집사가 그 광경을 봤더라면 기겁하였을 정도로 직설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로제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집사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헤이번은 제게 서슴없이 말을 건네는 이 하녀를 그냥 두고 보기만 했다.
“노력?”
“예, 노력요. 아이는 노력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건 어른의 몫이죠. 아이는, 그저 그 존재만으로도 사랑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
“그런데 공녀님은 언제나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고 계세요. 투정도 부리고 떼도 써야 하는데, 억지를 부리고 마구 졸라대야 하는데, 공녀님은 그 어느 것도 하지 않으세요.”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 플리타는 공녀…….”
“공녀이기에 앞서 그저 다섯 살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전하.”
로제는 헤이번의 말을 가로챘다. 그리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또한 전하께서는 대공이란 직위에 앞서, 공녀님의 아버지이시고요.”
“…….”
“그저 공녀님께 조금의 시간을 더 할애해 주세요, 전하. 그리고 아침 식사를 하실 때도 그저 묵묵히 식사를 하는 대신, 가벼운 인사를 건네주세요. 공녀님의 인사에 그저 살짝 미소를 지어주시기만 해도 공녀님은 하루 종일 행복하실 거예요.”
당돌한 하녀는 제 일이 아닌데도 말이 많았다. 헤이번은 제게 요구를 늘어놓는 로제를 쳐다보았다. 가냘픈 여자라 심성이 나약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고집스러운 면이 있는 듯했다.
그 고집이 본인이 아닌, 플리타를 위하여 발동된 것이 조금 희한하기는 하지만.
“공녀님께서 리본을 단 날은 예쁘단 말과 함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셔도 좋고…….”
“그 정도 했으면 된 것 같은데.”
헤이번은 로제의 말을 끊었다. 그러자 그를 쳐다보던 로제가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녀는 다시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전하, 목욕물을 준비했습니다.
집사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 * *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니는 것이냐?”
방 안에 들어간 로제에게 기다렸다는 듯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바로 유모의 목소리였다. 로제는 침실 문을 닫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잠시 자리를 비울 일이 있어서…….”
“공녀님의 시중을 드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나 보지?”
유모가 매서운 눈길로 로제를 쏘아보며 비아냥거렸다. 로제는 유모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입을 굳게 다문 채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든 순간, 유모의 옆에 앉아 동화책을 읽고 있던 플리타와 눈이 마주쳤다. 플리타는 유모의 눈치를 보며 읽던 동화책을 손끝으로 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로제의 편을 들어 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아이를 향해 로제가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플리타의 얼굴이 조금 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