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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24화 (24/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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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로제의 품에 안겨 있던 플리타가 고개를 쏙 내밀며 물었다. 진정되기는 했지만, 아직 걱정이 남아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로제는 답답한 속을 추스르고는 애써 미소 지었다.

“물론이죠. 제가 왜 공녀님께 화를 내겠어요? 이렇게 씩씩하신데.”

“응! 나 진짜 씩씩해!”

플리타는 로제의 말에 고개를 냉큼 끄덕였다. 로제는 그런 아이의 뽀얀 뺨을 어루만지다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같이 먹는 게 더 즐거우시죠?”

“응? 으응…….”

플리타의 동그란 눈이 좌우로 흔들렸다. 로제가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손에 우유가 담긴 컵을 쥐여 주었다. 그러자 플리타가 두 손으로 컵을 받아 들고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저도 그래요, 공녀님. 혼자 먹으면 심심하고 외롭잖아요.”

“……로제도?”

로제는 동그래진 눈으로 저를 보는 플리타를 향해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공녀님이 아기라서 혼자인 게 심심하고 외로운 게 아니에요. 어른도 혼자 있으면 그래요.”

“……우웅.”

플리타가 로제의 말을 듣다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이의 연녹색 눈이 흔들렸다.

“유모는, 아기처럼 굴지 말랬는데. 그럼 아빠가 싫어할 거라고.”

“……싫어할 거라고요?”

로제는 저도 모르게 말문이 막혀 가까스로 물었다. 아이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한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아이에게 무심했던 헤이번뿐만 아니라 유모도 문제였다. 이제 겨우 다섯 살에 불과한 어린아이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한 것일까.

아이의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상처 입히고.

그러니 플리타가 어린아이답지 않게 남들의 눈치를 살피고, 주눅 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로제의 바람은 그저 소박했다. 죽기 전, 멀리서나마 사랑하는 남자와 아이를 보고 싶다는.

그 바람은 이미 이루었다. 아니, 그들의 곁에 가까이 머무를 수 있게 되었으니 분에 넘칠 정도로 이루었다고 해도 될 터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로제에게는 또 다른 바람이 생겼다. 반드시 이루어야 할 목표라 할 수도 있었다.

자신이 떠나기 전까지 헤이번과 플리타, 두 사람을 가까워지게 하겠다는.

플리타에게 아빠의 사랑을 알려주고, 헤이번에게 아이를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겠다는.

로제는 굳은 다짐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절대 아니에요. 대공 전하께서 왜 공녀님을 싫어하시겠어요?”

“나는, 아빠한테 흠만 된다고. 엄마가…… 천해서.”

엄마, 그 단어를 입에 담은 플리타가 울먹였다. 로제는 그런 아이를 재차 품에 안고 토닥였다.

“세상에 제 자식을 싫어하는 부모는 없어요, 공녀님.”

“아빠는 항상 무서운데? 나 볼 때마다 웃지도 않고.”

“대공 전하는…… 그냥 어색해서 그러셨을 거예요.”

로제는 아이의 연녹색 눈을 마주한 채 짐짓 웃었다.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색해?”

“공녀님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잘 모르셔서요.”

“……진짜?”

“어른도 다 잘 아는 건 아니거든요.”

로제의 말에 플리타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그런 아이를 보며 다시금 마음을 굳게 먹었다.

* * *

“……?”

대공의 집무실로 향하던 집사의 발걸음이 늦추어졌다. 그는 복도 한가운데에 서서 눈을 가늘게 떴다. 집무실 바로 앞에서 서성대는 하녀를 본 탓이었다.

“공녀님을 모시는 하녀가 아닌가?”

집사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공녀의 전담 하녀가 대공의 집무실 앞에서 저렇듯 서성댈 이유가 없는 까닭이었다.

“흠…….”

나이든 집사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는 곧 표정을 고치고 헛기침과 함께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로제가 그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가 집사를 보고는 황급히 인사했다.

“집사님.”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건가? 혹시 공녀님께 무슨 일이라도…….”

집사는 로제의 인사를 받은 뒤, 빠른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로제는 그의 말이 다 끝나기 전에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왜 온 거지? 이곳은 대공 전하의 집무실 앞일세. 아무나 이렇게 와도 되는 곳이 아니야.”

집사가 그녀의 대답에 못마땅한 기색으로 충고하듯 말했다. 이제 겨우 일주일이 되었으니 대공 저에서의 생활에 익숙하지 못하여 실수를 저지른 것이리라, 그리 여기며 말이다.

그렇지만 집사의 추측과 달리, 로제는 떨리는 목소리로 제 용건을 꺼냈다.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뭐라고?”

집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는 본인이 제대로 들은 건가 싶어 미간을 찡그리다가 이내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금세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돌아가게.”

“하지만…….”

“전하께서 지금 이곳에 계시지도 않지만, 설령 계시다 하여도 자네가 만나 뵙고 싶다 하여 그렇듯 뵐 수 있는 분이 아닐세.”

집사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더 엄해졌다. 로제가 다시금 말을 꺼내려는 순간,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집사와 로제가 그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공 전하!”

발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이 저택의 주인이 아니고서야 어느 누가 감히 그의 집무실 근처에서 이렇듯 당당히 제 존재감을 드러내며 다가오겠는가.

로제는 다가오는 헤이번을 보고 황급히 옆으로 비켜서서 허리를 숙였다. 헤이번이 성큼성큼 다가오다가 그녀의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로제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푸른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희미하게 뭔가가 일렁였다. 본인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정체불명의 감정이었다.

헤이번이 저를 향해 고개 숙이고 있는 여자를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좁힌 것과 동시에 집사가 입을 열었다.

“연무장에 다녀오신 겁니까, 전하.”

집사의 물음에 헤이번이 로제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

젖은 머리칼이 그의 이마 위에 달라붙어 있었다. 땀에 젖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비를 맞아 젖었다고 해도 될 터였다. 소나기인 줄 알았던 비가 지금껏 추적추적 내리고 있으니 말이다.

“목욕하실 준비를 하겠습니다.”

“부탁하지.”

헤이번은 집사를 향해 간단히 대꾸한 뒤,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집사가 로제를 향해 그만 가라는 듯 눈짓을 보냈다. 로제는 우물쭈물하다가 집사의 눈짓에도 불구하고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헤이번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들어오도록.”

“……!”

로제의 녹색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집사 역시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보았다. 헤이번만이 덤덤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게 할 말이 있는 것 같던데.”

“…….”

당황한 로제가 눈을 깜빡이며 대답을 하지 못하자 헤이번이 미간을 살짝 좁힌 채 물었다.

“아닌가?”

“아, 아니요!”

로제는 그의 물음에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감히 대공 전하의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다며 집사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헤이번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채 재차 그녀를 향해 질문했다.

“내게 할 말이 있었던 게 아니라고?”

“아, 아니요. 아니, 그러니까…….”

로제는 그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금 뭐라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마음이 급한 탓인지 말이 꼬여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눈앞의 남자에게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린 건.

“……?”

지금 이 순간, 들릴 리 없는 웃음소리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기억이기도 했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크고, 더 유쾌하게 웃기까지 하던 그였으니까.

그래서였을 것이다. 로제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헤이번을 쳐다본 것은.

‘……아.’

로제의 입매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일그러졌다. 그녀는 무심히 저를 바라보는 푸른 눈과 마주하자마자 곧바로 고개를 숙여 그의 시선을 피했다.

깊은 상실감이 가슴속 한가운데를 베어낸 것처럼 저릿한 통증이 찾아들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느낌을 받는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상실감이라니. 이제 와서 잃을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자신은 이미 오래전 그를 잃었는데.

그도. 아이도.

제 앞의 남자는 자신이 알던 그가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저를 보며 쾌활하게 웃던 남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미련하게, 삶의 끝자락에 그의 근처를 맴돌기로 한 건 자신이었다.

‘더 뭘 욕심내려고. 플리타를 생각해.’

로제가 서러워지는 마음을 억지로 털어내려는데, 헤이번의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위에서 들렸다.

“할 말이 있으면 들어오고, 그게 아니라면 가도록 해.”

“……!”

잠시 가라앉았던 마음이 다시 출렁였다. 로제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허락이나 다름없는 말을 남긴 헤이번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로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집사를 보았다.

집사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에게 말했다.

“뭐 하고 있는가. 전하께서 들어오라 허락하셨는데.”

“아, 예! 예, 감사합니다!”

로제는 냉큼 헤이번의 뒤를 따라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을 닮아 서늘한 향기가 가장 먼저 그녀에게 찾아들었다.

* * *

헤이번은 집무실 안에 들어서자마자 무심코 손바닥으로 제 입과 턱 주변을 문질렀다. 그러고는 헛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는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누군가가 봤더라면 외려 본인의 눈을 의심했을 것이다. 대공이 웃는 걸 보다니 내 눈에 이상이 생긴 게 틀림없어, 하고 말이다.

헤이번은 다시 한번 손으로 입매를 문질렀다. 굳은 입매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게 당연했다.

‘그런데 왜…….’

그가 본인의 행동을 납득하지 못하고 고개를 기울이는 순간, 등 뒤쪽에서 여자의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제 아이의 전담 하녀가 자신의 뒤를 따라 들어오며 낸 기척이었다.

로제. 그 이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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