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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23화 (2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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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하녀들의 업무에 관한 건 전적으로 하녀장의 몫이기는 합니다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아니, 지금껏 대공을 모셔 온 집사로서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난생처음 받은 유형의 질문이라 할 수 있었다.

하녀들의 업무 분담이라니.

대공은 냉혹하면서도 무심한 주인이었다. 그는 고용인들에 대해 아주 약간의 관심조차 내보인 적 없었다. 하기야 대공이 아닌 다른 귀족이라 해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말이다.

“갑자기 그건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별것 아니니 신경 쓸 필요 없어.”

헤이번은 집사의 당혹감 가득한 얼굴을 보고는 그제야 제 실수를 깨달았다. 자신답지 않은 질문을 한 것이다. 그는 손사래를 치고는 방금 던져둔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눈치 빠른 집사가 더 이상 의문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시중을 들었다. 헤이번은 그게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어쩐지 가슴속이 답답해져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왜 그런지 짜증이 조금, 치밀었다.

* * *

“어머, 이를 어쩌면 좋아! 빨래한 게 죄다 비에 젖었잖아!”

붉은 머리의 하녀가 로제가 들고 온 바구니 안에서 세탁한 옷가지 하나를 꺼내더니 그녀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이게 빨래한 거예요? 응? 로제, 당신 눈에는 이게 빨래한 걸로 보이냐고요.”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로제는 무거운 바구니를 들고 있느라 부들부들 팔을 떨면서도 하녀의 말에 대꾸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하녀는 그녀의 말을 다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 옷가지를 다시금 바구니에 던져 넣으며 쌀쌀맞게 받아쳤다.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해요? 비가 올 것 같았으면 진작 걷었어야지. 사람이 왜 이렇게 미련한 거야?”

“정말 운이 좋았지. 할 줄 아는 건 하나도 없는데 공녀님의 전담 하녀라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하녀가 입을 삐죽거리며 비아냥거렸다. 로제는 저를 향한 비꼬는 말들에 항의를 하거나 화를 내는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어쨌든 다시 빨래나 제대로 해 놔요. 하녀장님 아시기 전에.”

붉은 머리의 하녀가 마치 자신이 상급자라도 되는 듯 로제에게 지시를 하고는 다른 하녀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로제는 그들이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들고 있던 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부당하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다. 본래 세탁 일은 저들의 몫이었고, 자신이 해야 할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제대로 따지고 들자면 본인들의 일을 내팽개친 저 하녀들의 잘못이라 해야 했다.

하지만…….

“수업 끝나기 전까지 해야 할 텐데.”

로제는 혼잣말과 함께 한숨을 내쉬고는 바구니를 보았다. 빨랫감이 잔뜩 들어 무겁던 바구니는 빗물까지 스며든 터라 더욱 무거웠다. 그러나 그보다는 플리타의 수업이 끝나기 전까지 빨래를 끝낼 수 있을까 하는 게 더 큰 걱정이었다.

‘어쨌든 하는 데까지는 최대한 하는 수밖에.’

그녀는 걱정하고 있을 바에야 몸을 움직이는 편이 낫겠다 싶어 다시금 힘을 내어 바구니를 들었다. 로제의 얼굴에 피로가 묻어났다.

대공 저에 들어온 이후 지난 며칠 동안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했다. 기존 하녀들의 텃세라고 할 수도 있었고, 갑자기 나타나 공녀의 전담 하녀가 된 로제에 대한 시기심에서 비롯된 일종의 괴롭힘이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로제에게 있어서 하녀들의 그와 같은 행동은 중요하지 않았다. 부당하다며 맞서 싸우거나 혹은 하녀장에게 이에 대하여 항의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묵묵히 그 모든 것을 감내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기에는, 제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 말이다.

로제는 바구니를 든 채 세탁실로 걸음을 재촉했다. 아이가 가정교사와의 수업을 마치고 저를 찾기 전에 돌아가야 할 터였다.

* * *

“로제, 어디 갔었어!”

서두른다고 했지만 늦은 모양이었다. 로제는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제 품에 뛰어든 작은 아이를 끌어안았다. 플리타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고 고개를 들었다. 잔뜩 볼을 부풀린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제게 삐친 것 같았다.

“죄송해요, 공녀님. 다른 일을 하느라…….”

“로제는 내 하녀인데.”

치이, 플리타는 로제의 말에 더욱 입을 삐죽이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로제가 그런 아이를 보고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자 아이 역시 언제 삐쳤냐는 듯 헤헤, 하고 웃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얼른 이리 와, 로제!”

“예?”

“얼른!”

플리타는 침실 문 쪽을 힐끗거리더니 급하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르며 재차 로제의 손을 끌어당겼다. 아이가 손을 잡아끄는 힘이 얼마나 셀까 싶지만, 로제는 플리타가 이끄는 대로 아이를 따라갔다.

“같이 먹으려고 기다렸단 말이야!”

플리타는 방 안쪽에 놓인 테이블 앞에 다다라서야 로제의 손을 놓아주며 외쳤다. 로제의 시선이 테이블로 향했다. 작은 테이블 위에는 플리타가 좋아하는 온갖 디저트가 차려져 있었다.

과일 젤리가 올라간 초콜릿 비스킷. 산딸기 잼과 곁들여 먹는 마지팬. 앙증맞은 모양의 슈크림 빵.

“유모 오기 전에, 얼른 먹자! 빨리!”

플리타는 또다시 문 쪽을 힐끔 보더니 로제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그제야 아이가 왜 침실 문 쪽을 힐끗거렸는지, 로제는 알 수 있었다.

“공녀님, 저는 괜찮아요.”

로제는 플리타를 향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제게 디저트를 맛보여 주고 싶어 기다렸을 아이의 마음이 너무나 예뻤다. 하지만 그건 그저 마음으로 끝나야 했다. 아이 역시 그것을 알고 있기에 유모에게 들킬까 싶어 저를 재촉하는 것일 터였다.

“같이 먹어! 이거 진짜 맛있어! 지금은 유모도 없잖아. 응?”

그러나 플리타는 한번 먹은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는 듯 로제의 치맛자락을 마구 잡아당기며 졸라댔다. 로제는 난감한 표정으로 아이를 보았다. 그러자 플리타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입술을 삐죽였다.

“……예. 그럴게요.”

결국 두 손을 든 건 로제였다. 아이의 그 고운 마음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저를 위하여 디저트를 먹고 싶은데도 꾹 참고 기다렸을 텐데, 그런 아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로제는 한숨을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플리타가 그 모습에 까르르 웃더니 냉큼 그녀의 손을 잡고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녀는 아이를 자리에 앉히고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플리타가 신이 난 듯 앞뒤로 다리를 흔들더니 이내 포크를 들고 슈크림 빵 하나를 콕 찍었다.

“이건 로제 꺼.”

슈크림 빵을 먹으라며 제 쪽으로 내민 플리타의 앙증맞은 손에 로제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포크를 쥔 손은 하얗고 자그마했다.

……그 손이 더 작았던 날을 기억한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너무나 작았던 갓난아기의 손을.

그 작은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었던 날의 행복을.

「어떻게 이렇게 작을 수가 있지?」

아기를 사이에 둔 채 침대에 함께 누워 있던 헤이번이 신기하다는 듯 플리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던 날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침대 위에 내려앉았던 햇살의 포근함도.

보송보송 잘 말린 침대 시트의 보드라운 감촉도.

엄마와 아빠 사이에 누워 몸을 꼼지락거리다가 작게 입을 벌려 하품을 하던 플리타의 모습도.

“로제?”

“……아! 예, 잘 먹을게요.”

기억에 잠시 잠겨 있던 로제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는 황급히 포크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달콤한 슈크림 빵을 한입 베어 먹었다. 얇은 빵 껍질이 부서지면서 달콤한 크림이 새어 나왔다.

“우와, 정말 맛있네요. 입 안에서 곧바로 녹는 것 같아요.”

로제는 코끝이 시큰해지는 걸 애써 감추고는 두 눈을 크게 뜨고 호들갑스럽게 감탄했다. 그러자 플리타가 뿌듯해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지? 헤헤, 이거 더 먹어. 이 비스킷도!”

“예, 공녀님도요. 어서 드세요.”

신이 난 아이가 저 먹을 생각은 하지 않고 로제에게 이것저것 권했다. 로제는 그런 플리타를 말리며 장미 꽃잎이 올라간 컵케이크를 권했다.

“같이 먹으니까 진짜 좋다아아! 혼자 먹을 때보다 훨씬 맛있어! 진작 이렇게 같이 먹을걸!”

플리타가 입 주변에 크림을 잔뜩 묻힌 채 신이 나서 엉덩이를 들썩였다. 로제는 웃음기 어린 표정으로 플리타의 입가를 닦아주다가 아이의 말에 손을 멈췄다.

“로제, 왜?”

플리타는 로제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제가 다시금 미소를 지은 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이의 입가를 마저 닦아주고는 입을 열었다.

“항상, 이렇게 혼자 드셨어요? 저 오기 전에도요?”

그러고 보니 플리타는 언제나 혼자였다. 헤이번과 함께하는 아침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말이다. 점심과 저녁 식사는 물론이고, 이렇듯 디저트 시간도 혼자인 건 마찬가지였다.

“응? 어…… 으응.”

로제의 물음에 플리타가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로제는 아이가 눈을 빠르게 깜빡이는 걸 놓치지 않았다.

“나는, 우움, 아기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혼자서도 먹을 수 있어.”

플리타는 머뭇거리다가 두 주먹을 꼭 쥐고 씩씩하게 말했다. 다른 때였다면 그 모습을 보고 기특하다고 여겼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로제는 저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졌다.

“저, 정말이야. 정말인데……. 히잉.”

그런 로제를 본 플리타가 덩달아 얼굴을 찡그렸다. 로제는 황급히 표정을 고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플리타에게 다가가 아이를 품에 안고 달랬다. 하지만 아이를 간신히 진정시킨 것과 별개로 그녀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다.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였다. 아직 누군가의 다정한 손길이 필요한 나이였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부모가 우선이어야 했다.

그런데 플리타는 뭐든지 혼자 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다. 부모의 다정한 품도 알지 못했고, 함께 보내는 시간도 알지 못했다.

‘헤이번, 당신 도대체…….’

로제는 원망이 치미는 걸 억누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무리 기억이 없어졌다고 해도 어떻게 제 자식에게 이렇듯 무심할 수 있나 싶어 원망이 치밀었다.

“나한테 화난 거 아니지, 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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