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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22화 (2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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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번은 눈을 어지럽히는 아이의 알록달록한 리본을 보다가 하녀장에게 시선을 던졌다. 하녀장이 그 시선에 담긴 무언의 질문을 알아차리고는 냉큼 대답했다.

“공녀님께서 리본을 많이 달고 싶으셨답니다.”

“흠…….”

헤이번이 의미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플리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제 아비가 단정하지 못한 모습을 나무랄 것이라 여긴 탓인지, 아이는 한껏 냈던 용기를 전부 잃어버린 채 잔뜩 겁먹은 얼굴로 로제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대공 전…….”

로제는 플리타의 손을 감싸 잡으며 입을 열었다. 타인의 눈치를 살피는 아이를 보고 싶지 않아서 자신이 벌인 일이었다. 비록 사소한 것일지라도 제 스스로 선택하게 하고 싶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가게 하고 싶었다.

“대공 전하, 공녀님의 전담 하녀 문제는 재고하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전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보답을 해도 부족할 텐데 이렇듯 건방지게 제 천박한 취향을 공녀님께 속닥여 괸터스의 명예를 한순간 떨어뜨리다니요.”

그 순간, 유모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서서 로제의 말을 끊었다. 헤이번이 식탁에 다가가 앉으려다가 그 말을 듣고 멈칫했다. 그와 동시에 집사와 하녀장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헤이번은 곧바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식탁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집사 역시 냉큼 표정을 고치고는 그의 식사 시중을 들기 위해 곁에 섰다.

“저, 전하?”

예상치 못한 무반응에 당황한 유모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그리고 다시금 입을 열려는 순간, 하녀장이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저었다. 유모는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것처럼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앉으시지요, 공녀님.”

하녀장은 그런 유모에게서 시선을 뗀 뒤, 어린 공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자 플리타가 흠칫 몸을 떨더니 불안한 시선으로 유모를 보다가 제 뒤쪽을 돌아보았다.

로제가 그런 아이를 다독이기 위해 작은 소리로 말을 건네려는 순간, 헤이번의 무심한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괸터스의 명예라…….”

흡사 조소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물론 본인의 가문, 더 나아가 이 나라의 왕실을 조소할 리 없으니 그건 그저 듣는 이들의 착각일 터였다. 헤이번을 제외한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한낱 리본 몇 개로 떨어질 명예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낫겠군.”

“……!”

하지만 착각이 아니었다. 그들은 주인의 목소리에 서린 냉소를 읽어낼 수 있었다. 유모 또한 제 말실수를 깨닫고는 사색이 되어 허둥지둥 변명을 하려 했다.

“전하, 저는…… 괸터스를 모욕하려던 것이 아니라!”

유모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과 동시에 헤이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녀장이 황급히 유모를 잡아끌었다.

“그만해요. 어찌 소란을 피우는 겁니까.”

“그, 그렇지만…….”

“전하께서 뭐라 하지 않으신 일을 재차 입에 담을 거예요? 이 소란을 피우면서까지?”

하녀장이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날카롭게 물었다. 유모는 파르르 떨며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던 집사가 쯧, 하고 혀를 찼다.

“공녀님.”

하녀장은 유모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플리타를 향해 공손히 입을 열었다. 플리타가 잔뜩 얼어 있다가 로제가 살짝 등을 떠밀자 어색하게 식탁으로 다가왔다.

그 뒤를 따라온 로제가 플리타의 의자를 빼주었다. 그리고 플리타가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도왔다.

헤이번과 플리타, 두 사람이 모두 자리에 앉자 식탁 위에 음식이 차려지기 시작했다. 우묵한 접시에 담긴 완두콩 수프가 먼저 아이의 앞에 놓였다.

“우웅…….”

로제는 플리타의 뒤에 서 있다가 아이가 조그맣게 소리를 내는 걸 듣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몸을 살짝 숙여 아이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어제 완두콩 요정 이야기를 해 드렸죠?”

“으응, 그치만, 로제…….”

플리타가 스푼을 손에 쥔 채 입을 살짝 내밀고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로제는 아이에게 눈웃음을 지은 뒤, 더욱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수프를 먹지 않으면 완두콩 요정이 많이 슬퍼할 거예요. 공녀님을 위해서 아침 일찍 일어나 수프를 만들었을 텐데요.”

“힝.”

플리타는 칭얼거리듯 짧게 소리를 내뱉더니 이내 스푼을 야무지게 쥔 채 수프를 떠먹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아이의 식성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그리고 아이가 편식하는 버릇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이가 대표적으로 먹지 않는 게 바로 완두콩이었다.

그렇기에 로제는 플리타의 편식하는 습관을 고치려 했다. 하지만 무작정 먹으라고 강요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아이가 ‘공녀’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어느 누구든 강요를 받아서는 안 되기에 그랬다. 아무리 어려도 저 나름대로 판단하고 결정할 줄 아는 존재이기에 그러했다.

그래서 로제가 택한 건 ‘이야기’였다. 나름대로 아이의 흥미를 이끌어낼 만한 이야기를 구상하여 플리타에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 플리타가 스스로 편식을 고치기를 원했다.

아이가 그런 로제의 마음을 알아준 것일까.

볼을 잔뜩 부풀린 채 울상을 지으면서도 아이는 완두콩 수프를 계속 떠먹었다. 로제는 플리타가 어느새 수프를 삼분의 일이나 먹은 걸 보고 따스한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보다가 뒤늦게 허리를 폈다.

“……!”

로제는 고개를 들자마자 저를 보고 있던 헤이번과 눈이 마주치고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대체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푸른 눈은 무심했다. 하지만 무심히 일별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녀에게 계속 고정되어 있었다.

로제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사와 하녀장, 하다못해 유모까지도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당혹해하는데도 불구하고.

“……완두콩 요정이라.”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고, 헤이번의 입이 열렸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더욱 예상 밖의 것이었다.

로제는 헤이번의 입에서 나온 ‘완두콩 요정’에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나름대로 작게 속삭인다고 했는데 헤이번의 귀에 고스란히 들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이상 무슨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조용히 식사를 했을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제는 플리타가 아침을 다 먹을 때까지 새빨개진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다.

* * *

“……푸훗.”

헤이번은 서류를 검토하다 말고 피식 웃었다. 그러자 그의 곁에 서서 차를 따르던 집사가 자신도 모르게 흠칫거렸다. 그 바람에 집사가 들고 있던 찻주전자가 흔들리면서 책상 위에 찻물이 튀었다.

“앗! 죄송합니다, 전하.”

“괜찮네.”

헤이번은 집사가 황급히 사과하는 것을 대충 받아넘긴 뒤, 다시 서류로 시선을 던졌다. 집사가 차를 마저 따르다가 그런 헤이번을 조심스럽게 힐끔 쳐다보았다.

“……왜, 내게 할 말이라도 있나?”

서류에 고정되어 있던 헤이번의 푸른 눈이 집사를 향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서늘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집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를 짓더니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공녀님의 얼굴이 많이 밝아지셨습니다.”

“…….”

집사를 바라보던 헤이번의 미간이 좁아졌다. 집사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만 봐도 말이지요. 하하, 아침에 공녀님을 뵙고 얼마나 놀랐던지…….”

헤이번은 무심한 표정으로 집사의 말을 들으며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코끝에 스친 차향이 은은했다. 그래서일까. 늘 굳어 있던 그의 표정이 조금은 편안하게 풀려 있었다.

마침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바람이 적당히 불어 들어왔다. 흐트러짐 없이 단정히 빗었던 머리칼이 그의 이마 위에서 흔들렸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환한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하늘이 어둑어둑했다. 비라도 몰고 오려는 것인지 멀리서 다가오는 구름이 새까맸다.

투둑.

그리고 헤이번의 예상이 맞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창틀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이런, 소나기가 오려는가 봅니다.”

집사가 말을 잇다 말고 창밖을 보더니 서둘러 창문을 닫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놔두게, 야닉.”

하지만 집사가 창문을 막 닫으려는 찰나, 헤이번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그의 충직한 집사가 제 주인이 다가오자 냉큼 옆으로 비켜섰다.

헤이번은 집사가 비켜선 곳에 서서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았다. 투둑투둑, 빗방울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쏴아아.

이윽고 비가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헤이번은 밖에 있던 정원사와 고용인들이 비를 피하느라 이리저리 뛰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푸른 눈은 흔들림 없이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

하지만 그의 시선 안에 한 여자가 들어온 순간, 헤이번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그와 두어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 있던 집사마저 흠칫했을 정도로 말이다.

그 여자였다.

제 아이의 전담 하녀.

헤이번은 빨래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휘청대며 걷는 로제를 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모두가 비를 피한 와중에 홀로 커다란 바구니를 든 채 비틀비틀 걸어가는 모습이 우습기까지 했다.

“……쯧.”

우습다는 생각과 달리 헤이번의 표정은 더욱 냉랭해졌다. 그는 제 몸보다 더 무거울 듯한 바구니를 두 팔 가득 안은 여자를 내려다보다가 혀를 찼다.

“……전하?”

헤이번의 못마땅한 속내를 읽은 집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어 창밖을 보았다. 하지만 집사의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사이에 로제의 모습이 건물 안으로 사라져 있었다.

“……?”

영문을 알지 못해 어리둥절한 집사를 뒤로한 채 헤이번이 다시금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조금 전까지 검토하던 서류를 집어 들었다.

종이 위의 활자를 훑어보던 푸른 눈이 일그러졌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내던지다시피 한 뒤, 집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하녀들의 업무 분담은 누가 관장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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