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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21화 (2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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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거울에 비친 로제를 빤히 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헤헤, 하고 웃었다.

불만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로제는 제 손에 들려 있는 노란색 리본을 보았다. 아이는 좋다고 했다. 그러니 노란색 리본을 머리에 달아주어도 문제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로제의 시선이 다시금 플리타에게 향했다. 로제를 쳐다보던 플리타가 이번에는 슬쩍 화장대에 놓인 리본 상자를 보고 있었다. 조금 전에도 분명 그랬다. 그때는 무심코 넘겨버렸지만 말이다.

“공녀님.”

리본 상자를 힐끔거리며 보던 플리타가 로제의 부름에 다시금 눈을 들었다. 로제가 아이의 뒤에서 머리를 매만지다가 옆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눈높이가 같아지면서 아이의 시선이 살짝 내려갔다.

“다른 리본을 달고 싶으세요?”

“응? 아…… 아니!”

플리타가 연녹색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 듯싶더니 이내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러나 로제는 그게 아이의 진심이 아니라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제 눈치를 살피는 모습.

당황하여 꼼지락거리는 아이의 두 손.

그 모든 게 로제에게 다른 말을 해 주고 있었으니까.

“공녀님.”

‘플리타.’

로제는 가만히 아이를 불렀다. 그러자 플리타가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로제를 보고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 지, 진짜로 노란 리본 달고 싶었…….”

“생각해 보니까 오늘 공녀님한테는 다른 리본이 어울릴 것 같네요.”

더듬거리며 말을 이으려던 플리타를 향해 로제가 말을 건넸다. 그 말에 플리타가 소리없이 입을 벙긋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래. 나, 다른 리본 할래.”

“어떤 리본을 달고 싶으세요?”

“……어? 어어, 그, 우웅……. 그건…….”

아이의 연녹색 눈이 좌우로 움직였다. 제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로제는 입 안쪽 살을 꽉 깨물었다.

화가 났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당당히 말하지 못하는 아이의 모습에 가슴속에서 울컥거리며 화가 치밀었다. 플리타에게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잘못이 없으니까. 잘못이 있다면, 그건 전적으로 어른들의 몫이었다.

아이가 이렇게 눈치를 보게 만든.

머리에 달고 싶은 리본 하나조차 제 마음대로 고르지 못하게 만든.

“저는요, 공녀님.”

로제는 화를 억누르며 제 눈치를 보는 플리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비밀 이야기를 건네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은 오늘, 머리를 풀고 싶었어요.”

“어? 그, 그럼 안 되는데…….”

플리타가 로제의 말을 듣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심각한 이야기라도 들은 사람처럼 아이의 눈이 마구 흔들렸다. 로제는 그런 아이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왜 안 되는데요?”

“그……. 하녀는, 머리를 단정히 묶어야 하잖아. 안 그러면 혼나. 유모 무서워. 로제 울 거야.”

플리타는 진심으로 로제를 걱정하는 듯 울상을 지었다. 꼼지락거리던 손도 서로 맞잡은 채 꽉 힘을 주었다. 로제는 새하얗게 변한 아이의 손끝을 보다가 손을 내밀어 아이의 작은 손을 감싸 잡았다.

“제가 혼나는 게 싫으세요?”

“……어?”

플리타가 제 손등을 따뜻하게 덮은 로제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들었다. 로제는 아이의 맑은 눈을 마주한 채 재차 질문했다.

“제가 우는 게 싫으세요?”

“……으응.”

연이은 물음에 플리타가 그제야 짧게 대답하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로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다른 사람을 위하는 아이의 마음이 너무나 고와서 기특했고, 그만큼 일찍 철이 든 것만 같아서 그런 아이가 안쓰러웠다.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야단맞을 것을 겁내는 건 다섯 살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주눅 들어 있는 모습보다는 차라리 투정을 부리거나 말썽을 피우는 쪽이 훨씬 나았다.

“……유모 많이 무서워.”

플리타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한 번 더 중얼거렸다. 로제는 그 말을 가만히 듣다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아이의 두 손을 감싸 쥐었다. 아이가 동그래진 눈으로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 다시금 그녀를 쳐다보았다.

“야단맞을까 봐 무서우세요?”

“…….”

“그래서 리본도 직접 고르지 않으신 거예요?”

로제의 물음에 플리타가 눈을 깜빡이더니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아이의 삐죽 나온 입술과 내리깐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플리타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일주일 내내 봐 왔던 아이의 모습이 이해되었다. 늘 소극적이고 주눅 들어 있던 아이의 모습은 자신의 착각이 아니었다.

로제는 플리타의 손을 놓았다. 그와 동시에 플리타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갑작스럽게 손을 놓아서 놀란 것인지 아이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로제가 두 손을 제 뒷머리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단정하게 묶었던 머리를 풀어버렸다.

“……!”

플리타의 작은 입이 한껏 벌어졌다. 아이는 마치 눈앞에서 용이나 요정이라도 본 것처럼 경악하여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로제가 그런 플리타를 보며 씩 웃었다. 개구쟁이처럼, 익살스럽게.

“야단 좀 맞으면 어때요.”

“그, 그치마아안…….”

너무 놀란 탓인지 아이의 입에서 평소보다 혀 짧은 소리가 나왔다. 그러면서도 플리타의 눈은 로제의 어깨 아래로 구불구불 흘러내린 다갈색 머리를 보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 * *

“공녀님, 들어가겠습니다.”

유모는 문 앞에 서서 고한 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그러자 문 안쪽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공녀의 전담 하녀일 터였다.

‘전담 하녀를 두니 이런 건 편해졌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전담 하녀가 없을 때는 아침에 공녀를 깨우고 이런저런 시중을 드는 게 제 책임이었다. 하찮은 잡일이야 하녀들이 돌아가며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유모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금 자세를 똑바로 한 순간, 문이 열렸다. 그녀는 턱을 치켜든 채 침실 안으로 한 걸음, 발을 들여놓았다.

“……?”

유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문을 열고 공손히 허리를 숙인 하녀, 로제의 모습 때문이었다.

“지금 그 모습이……. 맙소사, 공녀님!”

단정하게 머리를 묶지 않고 풀어 내린 로제의 모습을 지적하려던 유모가 무심코 시선을 돌려 공녀를 봤다가 이내 경악하여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공녀님의 머리가 왜 저런, 저렇게 된 것이냐!”

유모는 자신도 모르게 ‘저런 꼴’ 운운하는 말을 할 뻔하다가 황급히 말을 고쳤다. 물론 그렇다 해서 그녀의 말이 날카롭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녀는 마치 본인이 모욕이라도 당한 듯 부들부들 떨며 서슬 시퍼렇게 날을 세운 시선으로 로제를 쏘아보았다. 로제가 두 손을 모아 잡고 입을 열려는 순간, 소파에 앉아 있던 플리타가 냉큼 일어나더니 먼저 대꾸했다.

“내…… 내가 해 달라고 했어! 리본을 많이 달고 싶어서.”

플리타는 머뭇거리다가 크게 외쳤다. 겁 많던 아이가 나름대로 용기를 낸 것이다. 그 모습이 의외였던 것인지 유모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겨우 그런 이유로, 이렇게…….”

유모는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차고는 플리타를 다시금 살폈다.

여러 가닥으로 땋아 내린 머리 끝을 장식하고 있는, 알록달록한 리본들.

그것은 결코 공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천박한 평민 어린아이나 할 법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공녀가 이런 모습을 하게 된 데에는 저 전담 하녀의 책임이 없지 않을 터였다. 아니, 전적으로 이 모든 게 저 하녀의 탓이었다.

“당장 공녀님의 머리를 다시 매만지도록 해! 리본도 풀고, 단정하게.”

유모가 로제를 향해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가 제법 컸던 터라 플리타가 몸을 움찔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로제는 두 손을 꽉 모아 잡은 뒤, 플리타를 보았다. 아이가 잔뜩 겁을 먹고 울먹이며 로제를 쳐다보았다.

괜찮아요.

로제는 소리 없이 눈웃음을 지은 뒤, 유모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공녀님께서 직접 고르신 리본을 달아드렸습니다, 유모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니? 어린애가 뭘 볼 줄 안다고, 아니다 싶으면 네가…….”

“‘공녀님’께서 직접 고르셨어요.”

로제가 유모의 말을 중간에 가로채고는 일부러 힘을 주어 말했다. 공녀님, 이란 말을 반복하여 입에 담자 그제야 유모가 본인의 말실수를 깨닫고는 입술을 짓씹었다.

공녀가 보는 앞에서 어린애 운운하였으니, 확실히 그건 제 잘못이었다.

물론 유모가 플리타의 앞에서 이렇듯 어리다거나 하는 말을 한 게 처음은 아니었다. 소심하고 얌전한 공녀는 아무리 제가 뭐라 해도 그것을 제 아비에게 일러바치지 않았기에, 유모는 점점 더 거침없이 말을 내뱉고는 했다.

다만 대공이 직접 뽑은 하녀가 이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 ‘공녀님’께서 고르셨지. 아! 이러다가 아침 식사 시간에 늦겠구나.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마. ……어서 식당으로 가시죠, 공녀님.”

유모가 억지로 태연한 척 가장하고는 플리타를 돌아보았다. 플리타가 로제와 유모를 번갈아 보다가 안도한 듯 한숨을 작게 내쉰 뒤, 고개를 끄덕였다.

* * *

“대공 전하.”

식당 안으로 들어선 헤이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평소와는 달리 식당 안의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어수선했기 때문이다. 그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녀장을 보다가 이내 성큼성큼 식탁으로 걸어갔다.

“…….”

그러나 헤이번은 식탁 바로 앞까지 다가가지 못하고 서너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멈추고 말았다. 언제나 깊이 가라앉아 있던 그의 푸른 눈에 당혹감이 스쳤다.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평범한 아침 인사였다. 주의를 기울여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이는 딸의 아침 인사. 하지만 오늘의 아침 인사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수줍은 아침 인사를 건네고 하녀의 뒤에 숨은 딸의 모습이 오늘따라 평범하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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