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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20화 (2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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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구나.’

로제는 제 곁에 있는 헤이번을 본 순간,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응? 왜 그래?』

그 순간, 헤이번이 그녀를 돌아보더니 이내 미간을 좁히며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긴 손가락이 로제의 눈가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설마 운 거야?』

『아니요.』

로제는 제 살갗에 닿은 그의 체온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헤이번은 아예 로제를 향해 돌아앉더니 두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싸고는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운 거 맞는데.』

그녀의 얼굴 곳곳을 세심히 살피는 푸른 눈에 왈칵 울음이 나오려 했다. 그래도 꾹 참아야 했다.

비록 꿈일 뿐이지만, 그에게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으니까.

로제는 제 뺨을 감싼 헤이번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꿈이라는 걸 아는데도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생생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쁘게 굴까.』

헤이번이 그런 그녀를 보더니 가볍게 웃었다. 로제는 눈물을 글썽이다가 환하게 웃은 뒤,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럼 다른 때는 안 예뻤어요?』

『다른 때도 당연히 예뻤지. 지금 더 예쁘다고. 아니, 당신은 그냥 어느 때든 항상 예뻐. 지금 이 시간이 지나가는 게 아쉬울 만큼. 그러면서도 당신과 함께할 내일이 너무나 기다려질 만큼.』

자신도 그랬다. 헤이번과 함께하는 시간이 흘러가는 게 너무나 아쉬웠고, 그만큼 그와 함께할 미래를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미래가 아닌, 그와의 끝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채.

『흐음. 로제, 당신 오늘 정말 이상하네. 어디 아파?』

저를 따스하게 바라보던 헤이번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시선에서 묻어나는 염려에 로제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냥, 좋아서요. 너무 좋고, 행복해서.』

로제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헤이번의 목을 끌어안았다. 꾹꾹 눌러 참았던 울음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새어 나왔다.

『로제?』

당황한 헤이번이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로제는 그의 목덜미에 제 얼굴을 묻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가 나름대로 대답을 찾은 것인지 로제를 다정히 안고는 입을 열었다.

『임신을 하면 감정의 기복이 심해진다더니, 그 말이 맞나 보네.』

임신. 우리 아기. 로제는 그를 안고 있다가 그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우리 아기요, 헤이번.』

『응.』

『우리 아기, 플리타요.』

로제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녀는 저를 바라보는 푸른 눈을 마주한 채 다짐하듯 말을 이었다.

『나, 열심히 하려고요. 뭐든지 다 해줄 거예요. 플리타한테도. 당신한테도. 지금껏 해 주지 못했던 거, 전부.』

느낄 수 있었다. 꿈에서 깨어날 때가 되었다는 걸. 그녀는 뿌옇게 흐려진 그를 향해 계속 말을 이으려 했다.

『그러니까…….』

할 말은 많았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을 사람의 모습은 점차 흐릿해졌다. 헤이번이 저를 바라보며 뭐라 말하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리다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조금 전까지 느껴졌던 체온이, 그 온기가…….

“……!”

로제가 손을 뻗다가 그대로 눈을 떴다. 텅 빈 허공을 쥐려는 듯 내민 손이 애처로웠다.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그녀의 손을 무심히 통과하여 침대 옆쪽의 벽에 그림을 그려나갔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선들이 뒤엉킨 그림이었다.

그녀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뜨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잠기운을 쫓아내지 못한 터라 머릿속은 혼탁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일까. 로제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낯선 방. 낯선 침대. 낯선 풍경.

「로제.」

그 순간,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실제로 들린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꿈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않은 상태의 로제에게는 너무나 생생한 목소리였다.

“아…….”

그제야 모든 게 생각났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지, 그리고 방금 전까지 자신이 무슨 꿈을 꾸었던 것인지. 로제는 꿈속에서 만났던 헤이번을 떠올리고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녀의 입술 끝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울음 대신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뒤, 창밖을 보았다.

동이 트기 전의 하늘은 어둑했다. 모두가 아직 잠들어 있을 시간. 그 고요함을, 로제는 좋아했다.

“어서 서둘러야지.”

헤이번을 꿈에서 본 탓에 잠시 넋을 놓고 있었다. 그녀는 제 뺨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잠에서 깨고 나니 그제야 제 침실의 모습이 온전히 눈에 들어왔다.

낯설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눈에 익은 자신의 방.

‘그러고 보니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구나.’

로제는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대공 저에 들어온 지 일주일이 되었다. 처음에는 낯설고 서툴렀던 일도 이제는 조금 손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생기기도 했고.

바로 이 시간.

그녀는 감흥에 젖어 방 안을 둘러보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해야 아이와 함께할 시간이 그만큼 늘어나니 말이다.

* * *

로제는 침실 문을 두드리는 대신,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쌔근쌔근, 아이의 숨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자그마한 아이가 이불 속에 폭 파묻혀 잠들어 있는 게 보였다. 로제는 플리타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발끝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오늘은 악몽을 꾸지 않았나 보구나. 다행이야.’

그녀는 침대 곁에 다가가자마자 플리타의 얼굴부터 살폈다. 일주일 전 대공 저에서 처음으로 맞이했던 아침에 플리타의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그때, 로제는 처음 알게 되었다. 제 아이가 툭하면 악몽에 시달린다는 것을. 홀로 그 악몽 속을 헤매느라 종종 잠을 설친다는 것을.

「아빠한테는 말하면 안 돼. 비밀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리타는 무섭다며 엉엉 울고 투정을 부리는 대신, 제게 간절한 표정으로 부탁을 했다.

아빠한테 말하지 말라고. 비밀로 해 달라고.

무서운 꿈을 꾸면 엄마나 아빠부터 찾아야 할 나이인데, 아이는 되레 숨기려 했다.

‘……아가. 엄마가 미안해.’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무서운 꿈을 꿀 때, 네 곁에 있어줘야 했는데.

로제는 침대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 플리타를 가만히 보았다. 그녀의 손끝이 제멋대로 움찔거렸다. 아이의 보드라운 뺨을 어루만지고, 아이의 반짝이는 머리칼을 만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대신, 손을 꽉 오므려 쥐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우웅.”

바로 그때였다. 플리타가 베개에 얼굴을 비비며 잠투정을 하는 듯싶다가 눈을 뜬 것은.

아이의 연녹색 눈동자가 눈꺼풀 사이로 드러났다. 그와 동시에 로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플리타는 그런 로제를 멍하니 쳐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잠이 덜 깬 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로제가 미소를 지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공녀님.”

“……로제!”

로제의 아침 인사에 플리타가 조금 더 빠르게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고는 그녀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로제는 플리타가 침대 아래로 떨어질까 싶어 황급히 아이를 안았다. 아이 특유의 고소한 우유 냄새가 났다.

“좋은 아침.”

두 팔로 로제의 목을 끌어안은 채 수줍게 인사를 건넨 아이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로제는 플리타를 안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앉혔다. 그녀를 올려다보는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오늘은 무서운 꿈 안 꾸셨어요?”

“응! 하나도 안 무서웠어!”

플리타는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보는 로제의 눈이 휘어졌다.

“다행이네요. 음, 그럼 씻으시고 옷을 갈아입으실까요?”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기는 한데. 로제가 망설이며 고개를 기울이자 플리타가 냉큼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응! 그리고 아침 먹기 전에 로제랑 그림 그릴래! 토끼 또 그려줘! 어제보다 더 많이!”

“예, 공녀님.”

로제는 웃으며 아이의 말에 대답했다. 어제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며 놀던 플리타의 부탁을 받고 토끼를 몇 마리 그려줬는데, 그게 아이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녀는 재차 웃은 뒤, 서둘러 플리타가 씻을 물을 준비하고 갈아입을 옷을 챙겼다.

솔직히 로제의 시중은 서툰 점이 없지 않았다. 대공 저의 고용인으로서 오랫동안 교육을 받아 온 다른 사람들과 달리, 로제는 갑작스럽게 대공 저의 하녀가 된 터라 모든 게 익숙하지 않고 서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지난 일주일 동안 교육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 시중을 받는 플리타는 딱히 불만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헤헤, 하고 잔뜩 들뜬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플리타는 씻고 나와 뽀얀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며 다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로제가 그 모습을 보고는 미소를 짓다가 물었다.

“머리에는 리본을 달까요? 아니면 머리띠를 할까요? 오늘은 리본을 다는 게 더 예쁘실 것 같아요.”

“그럼 리본 할래.”

플리타는 거울에 비친 로제를 쳐다보다가 순순히 대답했다.

“노란색 리본은 어떠세요?”

로제는 리본이 담긴 상자 안에서 노란색 리본을 꺼내 플리타의 머리에 대 보며 재차 질문했다. 그러자 플리타가 데구루루 눈을 굴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좋아.”

플리타의 성격은 온순했다. 무엇 하나를 고를 때도 까다롭지 않았다. 지난 일주일 내내 이런 것으로 고집을 부리는 걸 보지 못했을 정도이니…….

로제는 플리타의 옆머리에 노란 리본을 달려다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러고는 시선을 돌려 거울 속 아이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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