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하지 마세요-19화 (19/134)

19

일부러 들으라는 듯 로제를 쳐다보며 비아냥거리는 하녀의 시선에서 선명한 적의가 느껴졌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하녀들이 로제를 보는 시선 역시 비슷했다.

적의.

그리고 시기, 질투.

로제가 감수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아이의 곁에 머무르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흥! 가자.”

조금 전 로제를 비아냥거리던 하녀가 콧방귀를 뀌고는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대화를 나누던 하녀들이 그 뒤를 따라갔다.

로제를 도와줘야 하지 않느냐며 물었던 하녀도 어색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로제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다시 양손에 힘을 주고 낑낑대며 짐과 가방을 옮겼다.

* * *

“이쪽으로, 어서 서둘러요!”

“백작님 나오시기 전에 어서 준비를 끝내야 하는데!”

공관 밖은 몰려든 마차와 고용인들로 어수선했다. 저마다 제 주인이 나오기 전 모든 채비를 마치기 위하여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대공 전하, 아직 준비가 덜 끝난 듯하니 안에서 기다리시는 편이…….”

페드윈이 공관 입구에 서서 그 소란을 지켜보다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헤이번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헤이번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발을 내디뎠다.

“밖에서 기다리지.”

“……예.”

그 망할 놈의 노인네들. 페드윈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던 상스러운 욕설을 가까스로 삼켰다. 제 주인이 안에서 편히 쉬지도 못하고 나오게 된 까닭을 알고 있는 탓이었다.

「전하, 왕위를 더 이상 비워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벌써 6년이 지났습니다. 더구나 선왕비전하께서도 저렇듯 애달프게 기다리고 계시는데, 괸터스의 영광을 위해서도 그렇고 이제 그만 마음을 돌리시어…….」

더클렌 공작의 수족을 자처하는 원로 귀족들이 앞다투어 꺼낸 이야기는 다름 아닌 ‘왕위 계승’ 문제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선왕비와의 ‘혼인’이라 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이번 기회에 헤이번에게서 확답을 듣겠다는 듯 끈질기게 매달렸다. 그 바람에 헤이번은 먼저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고, 지금 이 소란스러운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페드윈이 재차 속으로 원로 귀족들에 대한 욕을 퍼붓고 있는 사이에 헤이번은 덤덤한 시선으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사실, ‘바라본다’고 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의 푸른 눈에 스쳐 지나간 그 어느 것 하나, 진심으로 그의 눈에 담긴 것은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중이었다. 쉴 새 없이 스쳐 지나가던 풍경 속에서 무언가가 헤이번의 푸른 눈동자 안에 들어왔다.

몸집이 작고 가냘픈 누군가의 뒷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뒷모습만 보고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만 같았다.

‘로제.’

헤이번은 무심코 그 이름을 중얼거리려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일개 하녀의 이름을 기억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물론 제 딸의 목숨을 구한 사람이니 그 이름을 기억하는 게 극히 이상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무심하고 냉정한 헤이번의 성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희한하다고 여길 터였다.

그러니 본인은 오죽할까.

헤이번은 그런 제 모습이 낯설어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려 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에 들어온 로제의 모습이 다시금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양손 가득 제 몸집보다 더 큰 짐을 들고 휘청대며 걷고 있는 모습이.

그와 동시에 헤이번은 로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곁에 있던 페드윈이 미처 잡을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가 들고 있던 짐을 빼앗았다.

“……!”

로제가 갑자기 가벼워진 무게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녹색 눈이 동그래졌다. 헤이번은 그 녹색 눈동자 안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어째서인지 익숙한.

‘……익숙, 하다고?’

“저, 전하?”

헤이번이 저도 모르게 떠올린 생각에 눈을 찡그렸다. 그리고 로제가 기겁하여 그를 부르고는 서둘러 손을 내밀었다.

“제가…… 제가 들겠습니다. 전하께서 어찌…….”

“됐다. 내가 들고 가지. 저 마차까지 가면 되는 건가?”

묘한 느낌이 그의 가슴속 어딘가를 건드렸다. 하지만 그 느낌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그저 ‘느낌’이었을 뿐이니까.

더구나 말도 안 되는 느낌이기도 했다. 익숙하다니. 헤이번은 헛웃음을 삼키며 고용인들이 짐을 싣고 있는 대공 저의 마차를 향해 성큼성큼 발을 내디뎠다. 로제가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못하다가 황급히 그의 곁으로 따라왔다.

“대공 전하, 제가 들겠…….”

“전하!”

거듭 손을 내밀던 로제의 뒤쪽에서 페드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싶더니 이내 그가 다가왔다. 헤이번의 충동적인 행동에 잠시 놀라 멍하니 있더니 그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제게 주십시오, 전하.”

페드윈은 급히 다가오자마자 헤이번이 든 짐을 대신 들고자 했다. 그 바람에 밀려난 로제가 두어 걸음 뒤에 서서 그들을 쳐다보았다. 또한 마차 근처에 있던 하녀장이 그 소란에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가 그 광경을 보고는 경악하여 뛰다시피 다가왔다.

“맙소사, 대공 전하!”

얼마나 급히 온 것인지, 평소 단정하던 하녀장의 옷매무새가 그새 흐트러져 있었다. 그녀는 헤이번의 곁으로 다가오자마자 황급히 입을 열었다.

“어찌 전하께서…….”

고용인들이 들고 있어야 할 짐을 주인이 들고 있는 광경에 말문이 막힌 것인지 하녀장이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다가 그녀가 고개를 돌려 로제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날카롭기 그지없어 로제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게야! 네가 들었어야 할 짐을 왜 전하께서 들고 계신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하녀장님. 저는…….”

“괜한 사람에게 뭐라 하지 말게, 하녀장. 페드윈 경, 자네도 마찬가지야. 쓸데없이 소란을 피웠군.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헤이번은 쩔쩔매며 하녀장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는 로제를 쳐다보다가 미간을 좁히며 말을 꺼냈다. 창백한 얼굴의 여자를 보고 있으려니 속이 불편해진 탓이었다.

“하지만 전하, 어찌 이 일이 별것도 아닌 일입니까. 대공 전하께서 하녀가 든 짐을 나누어 들…….”

그러나 하녀장은 헤이번의 말에 반박조로 대꾸했다. 페드윈 역시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던 헤이번의 시선이 다시금 로제에게로 향했다.

저로 인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난처해하는, 자그마한 몸집의 여자에게.

“거기까지만 하지.”

헤이번의 목소리가 평상시보다 낮아졌다. 그 변화를 감지한 하녀장과 페드윈이 동시에 몸을 움찔거렸다.

“고작 이것 좀 들었다고 난리를 치는 게 더 우습지 않나.”

“하지만 아랫것들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전하의 명예에 흠이 될까 싶어…….”

하녀장이 머뭇거리다가 재차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헤이번은 그 말을 듣다가 피식 웃은 뒤, 그녀를 향해 물었다.

“겨우 이런 일 때문에 흠이 날 정도로 내 명예가 가벼운가?”

“아! 아닙니다! 제가 드린 말씀은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럼 됐군. 안 그런가?”

헤이번은 사색이 되어 제 말에 고개를 젓는 하녀장을 쳐다보았다. 하녀장이 더 이상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조아렸다.

헤이번이 하녀장을 보던 시선을 거두고는 마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그의 손에는 로제에게서 빼앗은 짐이 들려 있었다. 페드윈이 그 모습을 보고 난감해하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

헤이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로제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무거운 짐을 들고 나오느라 헝클어진 머리가 바람결에 흔들렸다. 그리고 그 바람결에 덩달아 실려 오기라도 한 것인지, 나직한 웃음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이리 줘요, 무거워요.」

「하하! 이게 뭐가 무거워. 하나도 안 무거운데.」

약초 바구니를 빼앗아 들고는 로제를 놀리느라 이리저리 몸을 피하며 웃던 남자의 모습이 덩달아 떠올랐다. 그런 그에게 바구니를 돌려달라 외치며 까치발을 한 채 손을 뻗던 제 모습도.

「당신한테는 그 어떤 것도 들게 하지 않을 거야.」

「내가 그렇게 약해 보여요?」

「아니. 씩씩한 아가씨라는 건 잘 알아.」

저를 바라보던 그의 푸른 눈은 다정했다. 로제는 장난스럽게 제 코끝을 건드리던 남자의 미소 띤 얼굴을 기억했다. 그리고 언제 장난을 쳤던가 싶게 진지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며 다짐하듯 말했던 그의 모습도 생생히 눈앞에 그려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이제는 그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할 목소리였다.

로제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기억이 남아 있어 다행이지 않은가.

기억하니까.

저라도 기억하고 있으니까.

“혼자 감당할 자신이 없으면 다른 사람한테 도움이라도 청했어야지. 어쩌자고 미련하게 그걸 다 들고 가다가 이런 사달을 낸 것이냐.”

바로 그때, 하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제는 멀어져 가는 헤이번의 뒷모습을 보다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러고는 다시금 그를 따라가려는 시선을 억지로 끌어내린 뒤, 하녀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녀장님.”

변명할 말은 많았다. 어느 누구도 그녀를 도우려 하지 않았노라, 그렇게 하소연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로제는 그저 간단히 사죄의 말만을 하고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기억은 기억일 뿐, 현실로 돌아와야 할 시간이었다. 마땅히 그래야 할 터였다.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기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