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일이었다. 매년 이와 비슷한 광경을 마주하지 않았던가. 하다못해 그의 장례식 때도 그랬다.
황망한 죽음 앞에서도 왕실과 귀족들은 저마다 이런저런 계산을 하기에 급급했다.
그 모습이 역겨워 왕궁을 떠나지 않았던가.
더 멀리, 수도에서 최대한 멀어지고 싶어서…….
“……!”
바로 그 순간, 두통이 엄습했다. 그와 동시에 헤이번이 들고 있던 우산을 놓치며 몸을 비틀거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다른 사람이 알아채기 전, 그의 뒤에 서 있던 페드윈이 다가와 우산을 대신 잡았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페드윈은 헤이번에게 우산을 씌워주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여 다른 사람이 들을까 싶어 목소리를 한껏 낮춘 상태였다. 헤이번이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끄덕인 뒤, 페드윈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가 들고 있겠습니다.”
그러나 페드윈은 헤이번에게 우산을 돌려주는 대신, 그의 곁에 굳건히 섰다. 헤이번은 제 뜻에 반하여 고집을 부리는 호위 기사를 굳이 꾸짖지 않았다. 자신을 염려하여 그러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페드윈을 향해 피식 웃은 뒤, 제 관자놀이 근처를 손으로 문질렀다. 헤이번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지워진 과거를 떠올리려 하면 이렇듯 두통이 찾아든다. 마치 누군가가 강제로 제 기억을 봉인이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그 기억을 되살리려 하면 억지로 막아 세우듯이 말이다.
“…….”
헤이번은 무심코 고개를 왼편으로 돌렸다. 어른들 틈에 홀로 서 있는 아이가 보였다.
훌쩍.
플리타가 작은 손을 꼭 오므려 쥐더니 제 눈을 비비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던 헤이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졸린 건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기야 어린아이가 한참 동안 제자리에 서서 가만히 있어야 했으니 지루하기도 하고 졸음도 오는 게 당연할 터였다.
‘졸리다고 투정을 부리면 곤란한데.’
아이를 낳은 생모의 출신을 두고 이런저런 말이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플리타가 실수라도 하면 온갖 말을 듣게 될 터였다.
헤이번이 한숨을 삼키고는 플리타에게 주의를 주기 위하여 몸을 틀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아이의 옆에 있던 이가 우산을 기울이며 몸을 숙이는 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 여자였다.
로제, 라는 이름의.
여자가 플리타에게 뭔가를 묻는 건지 작은 소리로 속삭이더니 이내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우산을 받쳐 든 채 다른 손으로 플리타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졸린 게 아니라, 울었던 건가.’
헤이번은 그제야 자신이 오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와중에도 여자는 플리타의 젖은 눈가를 닦아주더니 뒤이어 아이를 토닥였다.
“흐이잉…….”
우는 사람을 달래면 더욱 우는 법이다. 플리타 역시 그 법칙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는지, 여자의 치맛자락을 잡고 그녀에게 매달리더니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 울먹이는 소리가 제게까지 들릴 정도로 말이다.
“로제, 히잉.”
“……공녀님.”
여자가 난감한 듯 우물쭈물하더니 이내 무릎을 접고 앉았다. 그러고는 플리타를 한 손으로 끌어안아 다시금 달랬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헤이번이 그들에게 다가간 건 그때였다.
* * *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는 편이 낫겠군.”
갑자기 머리 위쪽에서 남자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로제는 플리타를 토닥이다가 우산을 살짝 기울이고는 그 사이로 고개를 들었다.
비를 뿌리던 먹구름 대신 커다란 검은색 우산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우산을 들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 대공 전하.”
로제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헤이번은 손짓 한 번으로 그녀를 막은 뒤, 플리타에게 시선을 돌렸다. 플리타가 로제의 품에 안겨 있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아이의 눈가가 살짝 부은 채 붉어져 있었다. 누가 봐도 울었다는 걸 알아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울었나 본데.”
“예. 공녀님께서 선왕 폐하의 죽음에 슬퍼하셔서요.”
“……슬퍼했다고?”
헤이번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저 무심히 질문을 건넸다가 예상치 못한 대답이라도 들은 사람 같았다. 그는 플리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플리타가 헤이번을 보고 있다가 다시금 울먹거렸다.
“흐이잉…….”
아이의 동그란 연녹색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그 모습이 생소하기까지 했다.
어째서.
헤이번은 충동적으로 아이에게 그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플리타의 눈물은 진심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다른 이들처럼 어쩔 수 없이 ‘시늉’하는 것이 아니라, 선왕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그렇기 때문에 헤이번은 제 아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자신의 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우는 모습을 낯선 무엇을 보듯 그렇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너는…….”
너는, 네가 ‘누구’의 죽음을 슬퍼하는지 알고 있다는 걸까.
그는 아이에게 묻지 못한 질문을 목구멍 아래로 삼켰다. 어린아이에게 구태여 물을 필요는 없었다. 이제 겨우 다섯 살에 불과한 아이가 무엇을 알겠는가.
애당초 ‘죽음’의 의미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나이였다. 그런데 하물며 아이의 기억에도 없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의 죽음을 어찌 슬퍼할까.
그저 어둡고 우울해 보이는 이 분위기가 두렵고 무서워서 울음을 터뜨린 것이겠지.
헤이번은 그렇게 아이의 눈물을 이해해 보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로제의 품에 안긴 채 헤이번을 올려다보던 플리타가 머뭇거리며 그에게 다가온 것은.
“……?”
제 바지를 꽉 붙잡고 흔드는 아이의 행동에 헤이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플리타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어 번 더 그의 바지를 잡아 흔들더니 이내 작은 손으로 그의 다리를 토닥였다.
조금 전 로제가 울음을 터뜨린 플리타를 달랬던 것처럼.
“아빠, 오빠…….”
“……?”
이해할 수 없는 아이의 말에 헤이번이 더욱 미간을 좁혔다. 그 모습에 겁을 먹었는지 플리타가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다리를 토닥이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아빠 오빠니까……. 흐잉, 슬프잖아. 아빠가, 흑.”
아이의 말은 아무리 들어도 이해되지 않았다. 게다가 울먹이며 두서없이 말을 하니 더욱 그랬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 이해되지 않는 말을 듣고 있으려니 가슴속이 욱신거렸다.
“……아까, 공녀님께 간단히 말씀을 드렸어요.”
그 순간, 로제가 몸을 일으키고는 헤이번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그의 푸른 눈이 아이에게서 그녀에게로 향했다.
“이곳에 계신 선왕 폐하가…… 대공 전하의 형님이시라고요. 그런데 공녀님께서 아직 호칭에 익숙하지 않으셔서.”
로제는 플리타가 ‘아빠 오빠’라 부른 이유를 덧붙이고는 입을 다물었다. 아래로 기울어진 우산을 타고 빗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헤이번이 로제의 발 아래에 고인 빗물을 잠시 보다가 제 다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제 다리를 토닥이던 아이와 다시 한번 눈이 마주쳤다.
‘아빠 오빠라…….’
헤이번은 저도 모르게 피식거렸다. 하기야 아직 어린아이에게 호칭은 어려울 것이다. 형과 오빠를 구분하는 것도 어려울 수 있고. 물론 이 또한 남들의 눈에는 ‘태생이 비천하여’ 저지른 실수로 비칠 수 있겠지만.
헤이번의 턱에 힘이 실렸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바람에 그를 토닥이던 아이의 작은 손이 그 무엇도 토닥이지 못한 채 허공을 한 번 감싸 쥐고는 그대로 내려갔다.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속을 누군가가 꽉 쥐었다가 놓은 것처럼. 방금 아이가 허공을 쥐었다가 그대로 손을 떨군 것과 흡사하게.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도록.”
그 낯선 느낌을 뭐라 표현할 길이 없었다. 또한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헤이번은 그 생소한 위로를 어찌하지 못하고 되레 몸을 돌리고 말았다.
조금 전에 명했던 말만 반복하고는.
* * *
“이것도 그쪽이 챙기도록 해요.”
툭. 던져진 건 커다란 가방이었다. 소리만 들어도 묵직한 무게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로제는 양손 가득 짐을 들고 있다가 제 앞에 던져진 가방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대공 저로 함께 가게 될 하녀가 로제의 시선에 입을 비죽이더니 삐딱한 투로 물었다.
“왜요? 싫어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빨리 서둘러요. 사람이 뭐 이렇게 굼떠? 그러면서 무슨 공녀님의 전담 하녀를 한답시고.”
하녀는 로제를 노려보며 투덜대더니 이내 방 밖으로 나갔다.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나가는 하녀의 발걸음이 가볍기 그지없었다. 로제는 그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쉰 뒤, 방금 하녀가 던진 가방을 챙겨 들었다.
“끄흡…….”
그녀가 원래 들고 있던 짐만 해도 무거운데 거기에 더하여 커다란 가방까지 들어야 하니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로제는 안간힘을 써서 가까스로 짐과 가방을 끌다시피 하여 방을 나섰다.
복도는 저마다 짐을 챙겨 나온 고용인들로 북적였다. 그들 중 일부는 대공 저의 하녀들이었다. 그들은 작은 가방이나 짐을 하나 들고 모여 대화를 나누다가 로제를 보고는 시선을 힐끗 던졌다. 그리고 누군가가 불편한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요?”
“내버려 둬. 공녀님의 전담 하녀이니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대공 전하께서 직접 뽑은 인재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