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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17화 (17/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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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됐습니다, 공녀님. 다행히 상처가 심하지 않아 흉터가 남지는 않을 것 같군요.”

치료사는 플리타의 무릎에 얇은 천을 감아준 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를 따라온 보조가 연고와 천 등을 정리하여 가방에 넣었다. 로제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치료사에게 물었다.

“그럼 공녀님은 이제 괜찮으신 건가요?”

“그렇다네. 아, 물론 덧나면 안 되니까 당분간 상처에 물이 닿지 않도록 신경은 써야지. 그건 자네 몫인 건 잘 알고 있겠지?”

치료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뒤에 로제를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에 호기심이 섞여 있는 게 보였다. 아마도 저에 대한 소문을 들은 모양이었다.

공녀를 구하여 운 좋게 공녀의 전담 하녀가 된 여자, 라는 소문 말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과 달리 치료사는 로제를 적대시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같은 고용인 입장이 아니기에 단순히 호기심만을 느끼는 듯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치료사님. 감사합니다.”

로제는 치료사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치료사가 호기심을 거두고는 플리타에게 예를 갖추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럼 공녀님, 저는 이만 물러가…….”

“로제도!”

치료사가 인사를 끝내기도 전에 침대 위에 앉아 있던 플리타가 불쑥 외쳤다. 그 느닷없는 행동에 치료사가 눈을 끔뻑였다.

“……예?”

“로제도 치료해 줘. 여기, 이쪽 뺨.”

플리타는 어리둥절해하는 치료사를 향해 로제를 가리키더니 이내 제 뺨을 가리켰다. 그 말을 이해한 로제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에요, 공녀님. 저는 괜찮아요.”

“어허, 하녀의 상처를 치료해 달라는 말씀이시군요.”

치료사는 로제의 뺨에 남은 멍 자국을 보고 그제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곧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보아하니 공녀가 하녀에게 손찌검을 한 것 같지는 않고, 다른 이가 한 모양인데…….

‘감히 공녀님의 하녀에게 누가 손찌검을 했단 거지?’

치료사가 저도 모르게 추측을 하려 눈을 굴리다가 이내 입을 벙긋거렸다. 공녀의 하녀를 함부로 때릴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대공 전하보다 윗사람이라면 뭐…… 굳이 찾아볼 필요도 없겠구먼.’

치료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선왕비가 대공 저에 종종 방문하는 걸 본인의 눈으로 본 적도 있고, 또한 대공 저의 고용인들의 입을 통하여 들은 바도 많았다.

그렇기에 그녀가 대공 저의 안주인 행세를 하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사실, 선왕비가 안주인 행세를 한다 하여 그게 놀라운 일인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선왕비의 재혼 상대는 대공일 테니까.

‘솔직히 대공 전하 외에 어느 누가 왕위를 계승한단 말인가.’

제멋대로 짐작을 한 치료사는 어디서 다친 거냐, 그런 물음을 건네지 않았다. 그저 공녀가 명한 대로 로제의 뺨에 연고를 발라주었을 뿐. 그것이 그 나름대로 대공 저에서 오랫동안 치료사로 일해 온 비결이었다.

“다 되었습니다, 공녀님.”

“벌써?”

“예, 뺨을 맞은 것 정도야 그 멍과 부기만 빠지면 되니까요.”

치료사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하지만 플리타는 제 무릎 상처보다 로제의 뺨에 든 멍이 더 아픈 듯 울상을 지었다. 그런 플리타에게 다시 한번 예를 갖춘 치료사가 보조와 함께 방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플리타와 로제, 단 두 사람만이 남았다.

플리타는 침대 위에 앉아 있다가 내려오더니 로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로제가 냉큼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많이 아파?”

플리타의 연녹색 눈에 걱정이 가득 담겼다. 아이는 작은 손으로 로제의 뺨을 어루만졌다. 혹시 제 손이 닿아 더욱 아플까 겁이 나는 듯 손끝으로 살짝 말이다.

“아니요. 하나도 안 아파요, 공녀님.”

“하지만 이렇게 멍이 들었는데? 게다가 여기는 상처도 났어.”

플리타가 눈을 찡그리며 또다시 울먹이려 했다. 시녀장이 낀 반지에 긁힌 자국을 말하는 듯했다. 로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공녀님 덕분에 치료를 받았잖아요. 상처는 금방 아물 거예요.”

“……정말?”

“그럼요.”

로제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플리타가 안도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그대로 로제의 목에 팔을 둘렀다. 따끈따끈한 아이의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암…….”

로제의 귓가에 플리타가 작게 하품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로제는 가만히 웃으며 제 목에 팔을 두른 채 안겨 있는 플리타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일어섰다.

실컷 뛰어논 것만으로도 피곤할 텐데, 거기에 더해 이런저런 일까지 겪었으니 많이 피곤할 터였다. 많이 놀라기도 했을 테고.

로제는 플리타의 등을 다독이며 침대로 향했다.

“우으응…….”

그새 잠든 것인지 침대에 눕히려 하자 아이가 살짝 잠투정을 부렸다. 로제는 플리타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잠시 가만히 있다가 느릿느릿 아이를 눕혔다.

‘……플리타.’

아이를 내려다보는 로제의 눈빛이 애틋했다. 그녀는 플리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머리칼의 보드라운 감촉에 가슴이 뭉클했다.

로제는 쓴웃음을 지은 뒤, 천천히 아이에게서 손을 뗐다. 그리고 숙였던 몸을 일으키고는 침실 밖으로 나가려다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건지, 헤이번이 열린 문 옆에 기대어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 대공 전하.”

로제는 넋을 놓고 그를 쳐다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헤이번이 그녀의 인사를 받으며 침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잠이 든 모양이군.”

헤이번은 곧바로 플리타가 잠들어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가만히 아이를 내려다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제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시선은 무감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시선 속에 플리타에 대한 염려와 애정이 숨겨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도 정말 좋은 아빠가 될 거라며 몇 번이나 다짐을 했었으니까.’

로제는 문득 떠오른 기억에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진통을 겪는 내내 함께 아파했던 남자가 제대로 눈조차 뜨지 못한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기뻐하던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그리웠다.

또한 서러웠다.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데. 고작 몇 걸음 떨어진 거리가 너무나 아득해서.

희미하게 미소 짓던 로제의 입매가 저도 모르게 일그러졌다. 그와 동시에 헤이번이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는 황급히 손으로 제 입 주변을 가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이런 제 표정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물론 저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지 않은 그가 뭔가를 눈치챌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치료는.”

헤이번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로제는 복잡한 속내를 추스를 새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곧바로 대답했다.

“조금 전에 치료사가 다녀갔습니다. 다행히 상처가 심하지 않아 흉터는 남지 않을 것이라…….”

“너는 치료를 받았나?”

로제가 대답을 다 마치기도 전에 헤이번이 다른 물음을 던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예?”

뭔가 잘못 들었나 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는 의구심 섞인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헤이번의 푸른 눈이 로제의 얼굴을 느릿하게 훑었다.

“치료했나 보군.”

어둑어둑한 방 안에서도 뺨에 연고를 바른 흔적은 알아볼 수 있었다. 헤이번은 굳이 그녀의 대답을 기다릴 필요가 없어 고개를 주억거린 뒤, 몸을 돌렸다.

“저…….”

그 순간, 로제가 그를 불러 세웠다. 헤이번은 방 밖으로 나가려다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정작 헤이번을 불러 세운 여자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되레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본인이 왜 그를 부른 건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듯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

헤이번은 하녀의 무례를 지적하지 않았다. 또한 그대로 돌아서서 방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았을 뿐.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제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던 로제의 귓가에 발소리가 들렸다. 제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 멀어져 가는 발소리였다.

탁.

“하아…….”

문이 닫혔다. 그제야 로제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온몸의 힘이 풀린 것인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 * *

젊은 나이에 죽은 왕을 하늘도 가련히 여기는 것인지 이른 아침부터 비가 계속 주룩주룩 내렸다. 헤이번은 묘비를 흠뻑 적시고도 모자라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빗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빗물이 어쩐지 제 형의 눈물 같았다.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는.

그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맞은편을 보았다. 시녀가 씌워준 우산 아래에 서 있는 선왕비의 모습이 보였다. 한 손에 손수건을 쥔 채 눈물을 찍어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헤이번의 입매가 비틀렸다.

가슴속에서 차가운 분노가 치밀었다. 거짓 애도는 망자를 모욕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의 푸른 눈이 일렁였다. 또한 우산을 들고 있던 헤이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산 끝으로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빗줄기 사이로 선왕비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힐끔거리며 눈치를 살피다가 마찬가지로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는 이들.

어느 누구 하나 죽은 왕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았다. 너무나 젊은 나이에 어이없이 죽음을 맞이한 그의 비극을 앞에 두고도 슬퍼하지 않았다.

‘이럴 거면 뭐하러 추모식을 하는가.’

헤이번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면서 우산 손잡이가 삐걱거리며 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는 곧 헛웃음을 삼키며 손에서 억지로 힘을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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