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플리타가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채 훌쩍거리고 있었다. 제 아비가 온 줄도 모르고, 그저 로제만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헤, 헤이번. 여기는 어떻게…….”
그러나 헤이번은 계속 아이를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선왕비가 그에게 다가오며 말을 건 탓이었다. 그는 플리타를 보던 시선을 거둔 뒤, 그녀를 쳐다보았다.
“제가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온 건 아닐 텐데요. 이곳은 엄연히 저도 머무르고 있는 숙소입니다만.”
“아, 물론 당신한테 뭐라 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그냥, 저는…… 으음, 갑자기 당신을 보니까 당혹스러워서.”
선왕비, 이자벨라는 허둥대며 빠르게 눈을 굴렸다. 헤이번이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가늠해 보려 했다.
이자벨라는 혹시 그가 자신이 한 말을 다 들은 건 아닌가 싶어 붉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초조한 기색을 드러냈다. 핏줄 운운하며 플리타에게 무안을 준 게 신경 쓰인 탓이었다.
‘하필이면 이럴 때 마주쳐서…….’
이자벨라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플리타를 흘겨보다가 이내 시선을 옮겨 녹색 눈의 하녀를 노려보았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게 다 저 버릇없는 하녀 때문이었다.
헤이번이 없는 자리에서 플리타를 야단치고 나무란 건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럴 때면 플리타의 유모는 눈치껏 맞장구를 치며 되레 아이를 야단쳤지, 지금 저 하녀처럼 아이의 편을 들며 제 앞에서 두 눈 똑바로 뜨고 대들지 않았다.
‘생긴 것부터 마음에 안 들더니. 하필이면 저 계집애랑 똑같은 녹색 눈일 건 뭐야?’
이자벨라는 하녀를 노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플리타가 훌쩍이며 저와 헤이번을 번갈아 보더니 슬그머니 하녀의 손을 잡는 게 보였다.
‘하여간 천한 핏줄은…….’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헤이번이 보는 앞에서 플리타에게 아무리 잘해 주는 척했어도 아이는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저렇듯 다가오지 않았다. 손을 잡기는커녕 늘 유모의 뒤편에 숨기 일쑤였으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천한 것들끼리 서로 끌리는 모양이지.’
이자벨라는 소리 없이 빈정거리고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염려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플리타가 하녀를 너무 따르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되네요. 당신도 보다시피 말이죠.”
이자벨라가 의도적으로 시선을 돌려 플리타와 하녀를 쳐다보았다. 헤이번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 그들을 보았다. 플리타와 하녀가 손을 맞잡고 있다가 동시에 몸을 움찔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다람쥐 두 마리 같았다. 뭐랄까, 어미 다람쥐와 새끼 다람…….
‘뭐? 다람쥐?’
헤이번은 저도 모르게 떠올린 생각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뱉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제 마음대로 곡해한 것인지, 이자벨라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헤이번, 당신도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어요. 플리타, 어서 그 손을 놓고 이리 오렴.”
이자벨라는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 상냥한 어조로 플리타에게 말했다. 하지만 플리타는 그녀의 말에 더욱 움찔거리더니 로제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플리타, 공녀답게 행동해야지.”
“……우웅.”
플리타의 눈이 불안한 듯 흔들렸다. 로제는 제 손을 잡고 있는 아이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걸 느끼고는 아이를 향해 살짝 몸을 숙였다.
“공녀님.”
“…….”
플리타가 저를 부르는 로제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로제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겁내지 않아도 된다고.
괜찮으니까 어서 가 보라고.
로제는 눈빛만으로도 그 말을 전할 수 있었다. 플리타가 로제의 두 눈을 쳐다보다가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무서운 큰엄마, 그리고 냉담한 표정의 아빠가 저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울음이 나올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로제를 위해서.
아이는 로제의 손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에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로제를 때렸어요.”
“……!”
플리타의 말에 이자벨라의 눈이 커졌다. 그와 동시에 헤이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자벨라는 당혹감을 털어내지 못한 채 입매를 실룩이다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플리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니? 이제 그만 하녀의 손을 놓고 이리로 오려무나. 누가 보면 어쩌려고…….”
“……좀 전에 시녀장 아줌마가 때렸잖아요.”
플리타는 이자벨라의 뒤쪽에 서 있던 중년 여인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이의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면서도 끝까지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그런 아이의 행동에 중년 여인, 시녀장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고, 공녀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 듯한데…….”
시녀장은 말을 더듬으며 드레스 자락을 움켜잡았다. 이자벨라가 그녀를 돌아보며 인상을 쓴 뒤, 헤이번을 돌아보았다. 헤이번의 얼굴은 아이의 말에도 불구하고 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하긴, 고작 하녀 따위에게 손을 댔다고 뭐라 하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일이기는 했다.
“그래. 플리타, 네가 오해를 했구나.”
이자벨라는 헤이번의 무심한 반응에 힘을 얻어 조금은 자신만만한 투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헤이번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공녀를 돌보는 하녀가 예의를 알지 못하기에, 시녀장이 조금 나무랐답니다. 플리타가 그 광경을 보고 오해를 한 모양이에요. 설마 당신도 오해한 건 아니죠?”
“…….”
헤이번은 대답 대신 눈을 돌려 로제를 보았다. 로제가 당황한 표정으로 플리타를 쳐다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뺨으로 움직였다. 아이의 말대로 맞은 게 사실이기는 한지, 로제의 뺨에 붉은 손자국이 남아 있는 게 보였다. 아마도 하룻밤이 지나고 나면 푸르스름한 멍이 들 터였다.
게다가 자신이 목격한 장면도 그 연장선이라 할 수 있었다. 헤이번은 로제에게 손을 휘두르려던 시녀장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옆에서 울고 있던 플리타의 모습도.
“무슨 무례를 범했지?”
헤이번의 차가운 목소리가 로제를 향했다. 로제는 플리타를 바라보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푸른 눈이 그녀를 직시했다.
“대체 얼마나 큰 무례를 범하였기에 시녀장이 제 아랫사람도 아닌, 공녀의 사람을 나무란 것인지 궁금해서 말이야.”
“아! 헤이번!”
이자벨라는 난감한 표정으로 시녀장을 노려보았다. 시녀장 역시 제 실수를 깨닫고는 고개를 조아렸다.
어찌 되었든 로제는 대공 저에 소속된 하녀였다. 그런 그녀를 나무라거나 벌을 주는 건 전적으로 대공 저에서 할 일이었다. 아무리 왕궁의 시녀장이라 해도, 조금 전 그 행동은 분명한 월권이었다.
“대, 대공 전하. 제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저는 그저 공녀님을 모시는 하녀인 만큼 더욱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공녀님을 위하는 마음에.”
“나는 자작 부인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내 딸의 하녀에게 물었지요.”
헤이번은 시녀장에게 냉담한 투로 대꾸한 뒤, 로제를 다시 쳐다보았다. 로제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어쩐지 서글펐다. 그와 자신과의 거리가 아득히 먼 것을 또다시 실감한 탓인지도 몰랐다.
‘내 딸의 하녀.’
그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또한 제게 주어진 귀한 기회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이번의 입에서 나온 그 말에 가슴이 저릿해졌다.
로제는 쓴웃음을 삼킨 뒤,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은 여전히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일단 공녀님을 침실로 모시고 가도 되겠는지요.”
“……?”
로제에게서 돌아온 말은 헤이번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그는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와 동시에 플리타는 냉큼 로제의 치맛자락에 파묻히다시피 그녀에게 매달렸다.
“공녀님께서 다리를 다치신 터라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뭐? 다리를 다쳤다고?”
헤이번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로제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플리타를 보았다. 플리타가 로제의 치맛자락을 잡은 채 뒤를 힐끔거리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흠칫거렸다.
“다친 것이냐, 플리타?”
“……조금요.”
플리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다시 로제의 치맛자락에 얼굴을 숨겼다. 더 자세히 물어보려던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본 로제가 플리타의 어깨를 다독이며 대신 말을 이었다.
“공녀님께서 넘어지셔서 무릎에 상처가 났습니다. 크게 다치신 건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덧나서 흉터가 남을까 하여…….”
아이에게 뭐라고 할까 봐 겁을 내는 듯 로제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정작 본인의 뺨이 벌겋게 부풀어 오른 것은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녀를 바라보던 헤이번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하지만 그는 금세 평소처럼 서늘한 낯으로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치료를 해야겠지.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거라.”
“감사합…….”
“헤이번! 아직 얘기가 다 끝나지 않았는데…….”
이자벨라는 그 상황 속에서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하다가 냉큼 입을 열었다. 그가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이가 다쳤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까.”
“……!”
이자벨라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다가 애써 태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플리타가 다쳤던 건 미처 몰랐네요. 알았더라면 빨리 조치를 취하였을 텐데 말이죠. ……네 주인을 모시고, 어서 가 보려무나.”
사람의 눈빛만으로 다른 누군가를 해할 수 있었더라면, 지금 로제는 이자벨라의 앞에서 갈기갈기 찢겼으리라. 그만큼 이자벨라가 로제를 바라보는 시선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로제는 덤덤히 고개를 숙인 뒤, 플리타를 데리고 몸을 돌렸다. 뒤통수에 닿는 선왕비의 시선이 따가웠다.
……그 탓에 그녀는 헤이번의 시선 또한 저에게 고정되어 있음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