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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15화 (15/134)

15

아이가 감탄하듯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그리고 젖혔던 고개를 똑바로 한 뒤에 로제의 뒷머리를 보았다. 단정하게 묶여 있던 다갈색 머리가 살짝 풀려 목을 덮고 있었다. 저를 업느라 머리가 흐트러진 것 같았다.

“불편하지는 않으세요, 공녀님?”

“…….”

플리타는 로제의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차, 아이는 로제가 제 고갯짓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금세 깨닫고 입을 열었다.

“안 불편해.”

“다행이네요. 무섭지는 않으시고요?”

“하나도 안 무서워. 난 어린애 아니야.”

로제의 물음에 플리타가 가슴을 쭉 펴며 대꾸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좌우로 돌려 주변 풍경을 구경했다.

“우와아…….”

아이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감탄했다. 눈높이가 쑥 올라가니 세상이 전부 신기한 것투성이였다. 하늘도 가까워졌고, 나무도 저와 키가 비슷해졌다. 물론 그래도 저보다는 나무가 조금 더 크기는 하지만.

플리타는 신이 나서 로제에게 업힌 채 두 다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그 움직임을 느꼈는지 로제가 멈칫하더니 이내 작은 소리로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좋았다.

플리타는 다리를 흔들다 말고 조심스럽게 로제의 목덜미에 제 얼굴을 비볐다. 그녀에게서 은은한 향기가 났다. 따스한 햇볕 아래에 서 있으면 맡을 수 있는 향기였다.

다정하고, 따스한.

‘……엄마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아이는 문득 그게 궁금해졌다. 하지만 알 수는 없었다. 엄마를 가져본 적 없으니까. 그냥 막연히 상상만 해 볼 뿐이었다.

“로제.”

“예?”

“……히히, 아니야. 그냥 불러 봤어.”

플리타가 괜히 웃음이 나와서 그녀의 뒷목에 제 코를 문질렀다. 바람이 아이를 놀리듯 살랑살랑 불었다. 공관의 숙소로 돌아가는, 그 짧은 길은 그렇듯 평화로웠다.

건물 바로 앞에서 선왕비를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 * *

꿈 같은 시간이었다. 아이의 무릎에 난 상처를 치료사에게 보여 빨리 치료를 해야 한다는 생각과 별개로 제 등에 업혀 있는 아이의 온기가 로제를 들뜨게 했다. 만약 아이의 몸에 난 상처가 심각한 것이었다면 이렇듯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어서 치료를 받게 해야지.’

로제는 아이를 계속 업은 채 있고 싶은 제 이기심을 억누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플리타가 제게 달려오다가 넘어졌을 때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는지 모른다. 게다가 아이의 무릎이 까져서 핏방울이 맺힌 걸 봤을 때는 온몸이 저릿해지기까지 했다. 자식의 몸에 난 상처는 그것이 아무리 가벼워도 어미에게는 깊은 상처로 남기 마련이기에 그랬다.

“헤헤…….”

그 와중에 플리타는 제 무릎의 상처가 아프지 않은지 자꾸만 웃음을 터뜨렸다. 로제는 손으로 받치고 있는 아이의 엉덩이가 들썩이는 걸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었다.

아프지 않은 것 같아서.

그리고 아이의 기분이 좋은 것 같아서.

로제가 다시 한번 입꼬리를 올리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이었다. 그보다 먼저 건물 안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왔다.

“……!”

그들 중 가장 앞에 선 사람을 본 로제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의 등에 업혀 있던 플리타 역시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내밀었다가 곧바로 어깨를 움츠렸다.

“선왕비전하께 예를 갖추지 않고 뭘 하는 것이냐!”

그때 그들 무리 뒤편에서 중년 여인이 나와 로제를 향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로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선왕비가 제 앞에 서 있었다.

숨이 막혔다. 그와 동시에 선왕비가 그날 제게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이것을 대공 전하가 드시는 차에 타도록 해라.」

선왕비의 명에 따라 자신이 무엇을 했던가.

「그럼 네가 낳은 아기는, 왕의 고귀한 핏줄로서 모든 것을 누리며 살게 될 테니까.」

헤이번의 기억을 지우고, 배 속에 열 달 품어 낳은 플리타를 떠나보냈다. 아내로서도, 어미로서도, 자신은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 스스로 변명을 하며 사랑하는 두 사람을 외면하고 말았다.

로제가 선왕비와 대면한 충격에 머릿속이 새하얘져 바들바들 떨고만 있자 조금 전 그녀를 다그쳤던 여인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됐다. 무지한 것에게 알아듣지도 못할 예법을 강요할 수는 없지.”

그 순간, 선왕비가 여인의 말을 끊고 입을 열었다. 냉랭하고 오만한 투의 목소리였다.

……그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은.

“고개를 들어보려무나.”

「고개를 들어보려무나.」

가슴속이 선득해졌다. 과거의 목소리가 현재의 목소리를 덮었다. 로제는 억지로 고개를 들어야 했다. 그리고 선왕비와 시선을 마주했다.

무료한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던 금색 눈이 일그러진 건 그 직후였다.

“……?”

선왕비가 살짝 미간을 찡그린 채 고개를 기울였다. 로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애써 태연한 표정을 가장했다.

“너, 어디서 본……. 아, 설마 플리타?”

선왕비의 시선이 로제를 위아래로 훑다가 이내 그녀의 등에 업힌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던 플리타에게 옮겨갔다.

“맙소사. 지금 하녀의 등에 업혀 있는 거니?”

선왕비는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과 함께 플리타에게 말을 걸었다. 그와 동시에 로제를 향한 관심은 싹 거두어버렸다. 애당초 하녀 따위에게 줄 관심이 없기도 했다.

“저……. 로제, 나…… 내려줘.”

플리타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로제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한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사람처럼 꼼짝도 못 하고 있던 로제가 그 속삭임에 황급히 정신을 차린 뒤, 조심스럽게 플리타를 내려주었다.

제게 업혀 있느라 구겨진 아이의 드레스를 매만지는 로제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선왕비가 저와 제 아이를 알아볼까 봐, 플리타와 제 관계를 눈치채는 게 아닐까 하여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로제는 동요한 속내를 가까스로 가라앉히고는 플리타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서…… 선왕비전하께 인사 올려요.”

그리고 플리타가 용기를 내어 무릎을 살짝 구부렸다가 펴며 예를 갖췄다. 선왕비는 아이가 바들바들 떠는 모습을 보다가 쯧쯧, 혀를 차고는 입을 열었다.

“지금 그 광경을 누가 봤을까 두렵구나. 공녀가 천한 하녀의 등에 업혀 돌아다니다니. 더구나 선왕 폐하를 추모하는 곳에서, 이게 무슨 경박한 행동인지…….”

“죄, 죄송…….”

“이래서 핏줄은 속이지 못하는 법인데.”

선왕비가 한탄조로 중얼거린 말에 플리타가 고개를 숙이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로제는 그 뒤에 서서 입술을 깨물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먹이는 건지 아이의 좁은 어깨가 들썩였다.

핏줄.

제가 준 천한 피.

그로 인하여 아이가 받아온 상처가 다시금 로제의 가슴을 후벼 팠다.

“괸터스에 천한 피가 섞였으니…….”

“죄송합니다만, 선왕비전하.”

로제는 선왕비의 말을 가로채고는 입을 열었다. 그런 로제의 행동에 다들 경악하여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들의 시선은 흡사 미친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녀 역시 지금 제 행동이 미친 짓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감히 선왕비의 말을 중간에 끊고 제 할 말을 꺼냈으니 말이다. 더구나 조금 전까지는 선왕비가 저를 알아볼지도 몰라 벌벌 떨었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플리타가 듣는 자리에서 ‘핏줄’ 운운하는 말이 더 이상 나오게 놔둘 수 없었다. 로제는 입술을 앙다물었다가 뗀 뒤, 선왕비를 향해 말을 이었다.

“공녀님께서 다리를 다치셔서, 제가 공녀님을 업어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저 공녀님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빨리 치료하는 편이 낫겠다 싶어서요. 그래서…….”

“그래서 내가 공녀를 나무란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냐?”

선왕비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노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낱 하녀 따위가 제 말을 가로막고 반박하였으니 당연했다. 그 순간, 조금 전 로제를 향해 선왕비에게 예를 갖추지 않는다며 쏘아붙였던 중년 여인이 다시 나섰다.

“선왕비전하께 무례를 저지르다니!”

짜악.

중년 여인은 매섭게 로제의 뺨을 후려쳤다. 그 바람에 로제의 고개가 옆으로 휙 꺾이다시피 했다.

“로, 로제…….”

눈앞에서 그 광경을 본 플리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로제는 뺨에서 홧홧하게 느껴지는 열기와 귓속이 먹먹해진 충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둘러 플리타를 달래려 했다.

“공녀님, 저는 괜찮…….”

“감히 천한 하녀 따위가!”

중년 여인이 한 번 더 그런 로제의 어깨를 잡아채고는 손을 휘둘렀다.

“으아, 안 돼! 로제!”

플리타에게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뺨을 맞는 것 따위 아무것도 아닌데. 로제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가슴이 미어지는 걸 느꼈다.

‘참았어야 했던 걸까.’

하지만 플리타가 그런 말을 듣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따귀를 맞을 것을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아무런 충격도 가해지지 않았다. 이미 몇 번이고 얻어맞았어야 할 시간이 지났는데 말이다.

“……?”

로제는 감고 있던 눈을 조심스럽게 떴다. 새파랗게 질려 어딘가를 보고 있는 여인이 보였다. 또한 선왕비 역시 비슷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보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자신의 뒤편이었다.

그녀는 그들의 시선을 따라 무심코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 있는 누군가를 본 로제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

크게 뜨인 채 흔들리는 녹색 눈과 차분한 푸른 시선이 교차했다. 그 시선의 주인은 다름 아닌, 헤이번이었다. 그는 로제와 잠시 눈을 마주했다가 이내 시선을 돌려 제 딸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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