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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14화 (14/134)

14

까르르.

어린아이의 쾌활한 웃음소리가 열린 창문을 통해 방 안까지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더클렌 공작이 찻잔을 내려놓더니 쯧쯧, 혀를 찼다.

“선대께서 잠들어 계신 묘역에서 저렇듯 크게 소리 내어 웃고 떠들다니. 명색이 공녀인데 이리 철부지처럼 굴어서야…….”

“크흠. 공녀께서 아직 나이가 어리시니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공작의 말을 듣던 다른 귀족 하나가 헤이번을 힐끔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공작이 매서운 시선으로 제 말에 대꾸한 젊은 귀족을 노려보았다.

“나이가 어리다는 게 철없는 행동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지. 어리석고 무지한 평민이라면 모를까. 괸터스의 고귀한 피를 물려받은 공녀이니……. 아, 나머지 절반의 피가 문제가 될 수는 있겠지만.”

더클렌 공작의 말에 방 안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공작이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공의 어린 딸, 그 아이를 낳은 어미가 신분조차 명확하지 않은 평민이었다는 건 사교계에서 알음알음 퍼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니 말이다.

“크흐흠.”

어느 누군가가 그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는 헤이번을 슬쩍 쳐다보았다.

헤이번은 서가 근처에 놓인 안락의자에 앉아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술에 취하여 방금 공작이 한 말을 듣지 못한 걸까. 그를 힐끔 쳐다봤던 귀족이 헤이번의 덤덤한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헤이번이 술잔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몸을 돌려 공작을 비롯해 모두가 모여 있던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앗, 대공 전하.”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헤이번을 부축하려고 누군가가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헤이번은 손을 내저어 그를 뿌리친 뒤, 공작이 앉은 자리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탁.

“……!”

더클렌 공작은 테이블을 두 손으로 짚고 자신을 향해 몸을 숙인 헤이번의 행동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런 제 모습에 자존심이 상하여 되레 미간을 찡그리고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대공께서 취하신 모양이로군요. 아직 한낮인데 과음을 하신 건 아닌지 염려스럽습니다.”

“염려, 라…….”

헤이번이 공작의 말끝을 잡아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흐트러진 머리칼 아래로 푸른 눈이 공작을 응시했다. 취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차디찬 시선에 공작이 몸을 재차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본 헤이번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러더니 언제 웃었던가 싶게 웃음기를 싹 지우고는 입을 열었다.

“공작께서는 참 바쁘시군요.”

“예? 아, 물론 그렇긴 합…….”

느닷없이 전환된 화제에 공작이 미간을 좁히며 대꾸했다. 하지만 헤이번은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숙였던 몸을 똑바로 세우고는 말을 이었다.

“내 딸로도 모자라 이제는 나까지 염려해 주니 말입니다.”

“그…….”

빈정거리는 투의 말에 공작이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뭐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벌렸지만, 그보다 먼저 헤이번이 몸을 돌려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공작을 명백히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그 탓에 공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또한 방 안에 있던 다른 귀족들도 저마다 헤이번과 공작의 눈치를 살피느라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서로 눈짓만 하느라 바빴다.

까르르.

아이의 웃음소리가 그 와중에 재차 들렸다. 헤이번은 자신의 등 뒤에서 벌어지는 상황 따위 알 바 아니라는 듯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창틀에 기대어 밖을 바라보았다.

잔디밭 위에서 플리타가 활기찬 모습으로 뛰어노는 것이 보였다. 거리가 좀 있는 터라 그 표정이 또렷하게 보이는 건 아닌데도, 아이가 얼마나 환하게 웃고 있을지 선명히 그려졌다.

그로서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아이의 모습이었다. 아니, 보기는커녕 저렇듯 환하게 웃을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헤이번이 봐 왔던 플리타는 언제나 겁먹은 눈으로 저를 보거나, 유모의 치맛자락을 쥐고 뒤편에 숨어 있었으니까.

아이를 바라보던 헤이번의 입가에 흐릿하게 미소가 스쳤다. 본인조차 의식하지 못한 미소였다. 그는 플리타가 뛰어다니는 걸 눈으로 따라가다가 문득 아이가 달려가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

헤이번의 푸른 눈에 이채가 서렸다. 플리타가 달려간 곳에 서 있는 한 여자 때문이었다.

……로제, 라고 했던가.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신이 아이의 전담 하녀로 고용한 여자였다. 그에 앞서 제 아이를 구해준 여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헤이번이 그녀의 이름까지 기억하는 건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대공 저에서 근무한 고용인들조차 그의 머릿속에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한 터였다. 고용인들 중에서 헤이번이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을 굳이 찾자면 집사뿐이라 할 터였다.

무심한 주인이었고, 또한 그게 당연시되는 세상이었다. 귀족에게 있어서 고용인의 존재란 그저 편리를 위하여 존재하는 도구나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하지만 헤이번은 로제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면서도 그 사실에 대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냥 당연히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받아들였다.

‘플리타가 저렇듯 밝게 웃는 게 저 여자 때문인가.’

헤이번은 하녀의 품에 안겨 다시 한번 해맑게 웃는 딸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어쩌다 보니 괜찮은 선택을 한 모양이었다. 아이를 구해준 여자가 되레 곤경에 빠졌기에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이었는데…….

“대공! 조금 전에 한 말은…….”

바로 그때였다. 붉으락푸르락 얼굴색을 달리하던 공작이 더는 화를 못 참겠다는 듯 언성을 높인 것과 동시에 헤이번이 창틀에 기대어 있다가 몸을 똑바로 세운 것은.

그는 창밖을 쳐다보다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이번에도 공작이 말할 틈을 주지 않고 그의 앞을 그대로 지나쳐갔다.

“대, 대공!”

또다시 무시를 당했단 생각에 공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헤이번은 뒤편에서 벌어지는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그가 방 밖으로 빠져나가고 나서야 다른 귀족들이 소란스럽게 공작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공작님, 괜찮으십니까?”

“대공 전하께서도 너무하시…….”

헤이번과 더클렌 공작 사이에서 눈치만 보던 귀족들이 저마다 공작의 편을 드느라 소란스러웠다. 헤이번이 창밖을 바라보다가 왜 그리 급히 나간 건지, 아무도 알아볼 생각을 하지 못한 채.

* * *

“나비야, 나비! 노란 나비야, 로제!”

플리타가 나비의 날갯짓을 흉내 내듯 두 팔을 위아래로 흔들며 로제에게 달려왔다. 그러나 그녀의 앞에 다다르기 전에 잔디 속에 숨어 있던 돌부리에 걸리는 바람에 아이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플, 공녀님!”

로제는 웃으며 아이가 노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사색이 되어 황급히 아이에게 다가갔다. 두 팔을 내민 채 엎어진 플리타의 곁에 다가간 로제가 서둘러 손을 내밀려는 순간, 아이가 땅바닥을 짚더니 고개를 들었다.

“……우웅.”

아이의 동그란 연녹색 눈동자가 금세 주눅 들어 로제의 눈치를 살폈다. 공녀답지 못하게 넘어졌다고 야단을 칠까 겁이 난 탓이었다. 유모가 늘 그랬던 것처럼.

“괜찮으세요? 다치지는…… 아, 이런. 상처가 났네요. 이를 어쩌나.”

로제가 플리타의 무릎에 난 상처를 보고는 자신이 더 아픈 듯 인상을 썼다. 그 모습에 플리타가 로제의 눈치를 보다 말고 눈을 깜빡거렸다.

“많이 아프시죠? 잠시만요. 깨끗한 물이랑 약을 가져올,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우선 제게 업히세요, 공녀님.”

로제는 플리타의 무릎에 방울방울 맺힌 핏방울을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며 쳐다보다가 냉큼 아이를 향해 등을 보이고 쪼그려 앉았다.

“……어?”

하지만 플리타는 로제의 말을 듣지 못한 건지, 혹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로제가 아이를 돌아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안에 들어가서 제대로 상처를 치료하시는 편이 낫겠어요. 덧나서 흉터가 남으면 어떡해요.”

“……우우움.”

플리타의 동그란 눈이 느릿하게 두어 번 깜빡였다. 비슷한 말이었다. 언젠가 이렇게 넘어져 다쳤을 때, 유모도 지금 로제가 한 말과 비슷한 말을 하며 야단을 친 적이 있었다.

「대공 전하께서 그 흉터를 보시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어서 이리 오세요. 치료사를 불러올 테니까요.」

“걱정 마세요. 치료사한테 상처를 보여주면 잘 치료해 줄 거예요.”

짜증스럽게 쏘아붙이던 유모의 목소리와 함께 로제의 다정한 목소리가 겹쳐졌다. 플리타는 저를 다독이며 안심시키는 로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비슷한데, 뭐가 다른 거지?’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뭔가가 다른데, 그게 뭔지 어린 플리타로서는 구분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무서웠던 유모와 달리 로제는 상냥해서 좋았다.

게다가 업어준다니!

플리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업혀 본 적이 없었다. 애당초 누가 저를 업는다는 걸 상상도 해 보지 못했다. 그게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런데 그 기회가 생긴 것이다.

아이는 혹시 로제가 마음을 바꿀까 싶어 서둘러 다가갔다. 그러고는 로제의 목에 두 팔을 두르고 냉큼 그녀의 등에 업혔다.

“저를 꼭 잡으셔야 해요, 공녀님.”

“응!”

플리타는 로제의 목에 두른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러자 로제가 작게 웃는 것 같더니 다리를 펴고 일어섰다.

‘우와아아…….’

플리타의 동그란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아이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그리고 연녹색 눈 가득 푸른 하늘이 담겼다.

하늘이 한층 더 가까워졌다. 플리타는 저도 모르게 손을 움찔거렸다. 로제가 자신을 꼭 잡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않았더라면 분명 손을 뻗어 하늘을 움켜잡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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