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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13화 (1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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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웅……. 아!”

아이가 곰 인형을 끌어안은 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듯 콧등을 찡그리더니 이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유모가 붙잡을 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로제의 앞으로 다가왔다.

동그란 연녹색 눈이 로제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로제는 갑작스러운 플리타의 행동에 당황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뒤늦게 자신이 아이를 내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바로 그때였다. 플리타가 로제의 목을 끌어안은 것은.

달콤하고 고소한, 아이 특유의 냄새가 그녀를 가득 채운 것은.

“……!”

로제는 느닷없이 제 품에 안긴 아이의 따끈따끈한 체온에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하녀장과 유모 역시 깜짝 놀랐는지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나, 기억났어.”

로제의 목에 짧은 팔을 두른 채 아이가 작게 속삭였다.

“로제가 이렇게 꽉 힘줘서 안아줬잖아. 물 속에서.”

히힛. 아이는 자신이 기억해낸 게 스스로 대견한 듯 웃었다. 로제는 늘어뜨리고 있던 두 팔을 들었다. 그리고 작은 아이를 감싸 안으려 했다.

앞뒤 생각할 것 없이 호수에 뛰어들어 아이를 구해낸 순간처럼.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던 아이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던 그날처럼.

“공녀님, 어서 일어나세요!”

그 순간, 로제를 비웃기라도 하듯 유모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정수리 위로 쏟아졌다. 그리고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작은 몸이 유모의 손에 이끌려 멀어졌다. 로제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아이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에 잡힌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플리타의 치맛자락이 손끝에 잠시 스쳤을 뿐.

“천한 하녀를 끌어안으시다니요! 제가 항상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공녀님은 괸터스의 고귀한 핏줄이시니 늘 그에 맞추어 행동하시라고요. 그런데 또 이렇게 철없는 행동을 하시다니.”

“나, 나는, 그냥 고마워서……. 로제가 나를 구해줬으니까.”

플리타의 목소리가 겁에 질린 듯 떨려 나왔다. 로제는 플리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모에게 한쪽 팔을 붙들린 채 아이가 더듬거리며 뭐라 말을 이어 나가는 게 보였다.

“그래서 반갑기도 하고…….”

플리타가 힘겹게 제 행동에 대한 이유를 말했지만, 유모는 플리타의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그렇다고 하녀를 끌어안으셨어요? 도대체 그 ‘천한 피’는 교육으로도 어쩔 수가 없는 건지…….”

“……!”

유모의 입에서 나온 경멸 어린 말에 로제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그와 동시에 하녀장이 유모를 향해 매서운 투로 외쳤다.

“미겔 부인, 말이 심하군요! 부인이야말로 공녀님에 대한 예법을 지켜야 하지 않나요?”

하녀장의 말을 들은 유모가 그제야 이 자리에 자신과 플리타, 로제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듯 흠칫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괜히 방 안을 둘러보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지금 이 상황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쨌든 저는 제 소임을 다하였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공녀님.”

하녀장이 못마땅한 시선으로 유모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려 플리타를 보고는 입을 열었다. 플리타가 그들의 살벌한 대화에 잔뜩 주눅이 들어 눈만 데굴데굴 굴리다가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잠시 자리를 비울게요, 공녀님. 뭐…… 제가 굳이 공녀님의 곁을 지키지 않아도, 전담 하녀가 생겼으니.”

유모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로제를 향해 빈정거리는 말을 잊지는 않았다. 로제는 저를 쏘아보는 유모의 시선을 느꼈지만, 굳이 그 시선을 받아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여력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

탁.

하녀장과 유모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침실에 남은 사람은 플리타와 로제, 두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우웅.”

플리타가 낯을 조금 가리는 표정으로 로제를 쳐다보다가 제 엄지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그러더니 제풀에 놀라 손가락을 입에서 빼고는 로제의 눈치를 살폈다.

“아! 제가 손을 닦아드려도 될까요, 공녀님?”

로제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아이의 손가락에 묻은 침 자국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플리타가 로제를 빤히 쳐다보다가 제 손을 내밀었다.

단풍잎을 닮은 손을 보던 로제의 눈이 일렁였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마음을 가다듬은 뒤, 치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하녀복과 함께 받은 것이었다.

플리타는 가만히 손을 맡긴 채 로제를 쳐다보고 있다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기분 나빠?”

“……예?”

침 자국은 이미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손을 놓지 못하고 계속 이리저리 꼼꼼히 닦던 로제가 플리타의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플리타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더니 입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로제는 고개를 흔들고는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아이를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이에게 되묻지 않았다. 그저 다시금 고개를 숙인 채 아이의 손을 닦았을 뿐.

조심스럽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대하듯.

그러자 플리타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로제에게 돌아왔다. 아이는 제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손을 닦아주는 하녀를 보았다.

물에 빠졌을 때의 기억은 선명하지 않았다. 그저 그때의 감정이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무서움.

어린 플리타로서는 당시의 감정을 그렇게 뭉뚱그려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무서웠다. 호숫가의 젖은 땅을 밟고 그대로 미끄러져 물에 빠졌을 때도 무서웠고,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순간에도 무서웠다. 그렇지만 그 무엇보다도 무서웠던 건,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외쳤어도 어느 누구 한 사람 와 주지 않았다. 아빠도, 유모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어, 흐으, 엄마아아…….」

물을 삼키며 마지막에 부른 건 엄마였다. 기억도 나지 않는 엄마. 저를 두고 간 엄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보고 싶은 엄마.

……그리고 그때 와 준 사람이 바로 로제였다.

플리타는 가만히 로제를 쳐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하녀가 된 거, 기분 나쁘지 않아?”

로제가 플리타의 손을 살짝 쥔 채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뭔가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공녀님의 하녀가 된 게 기분 나쁘냐고요?”

“으응.”

그러나 로제는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플리타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더니 이내 머뭇거리다가 덧붙여 말했다.

“내가…… 천한, 피라서.”

로제의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하다못해 탄식조차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말문이 막혀 입만 벙긋거렸을 뿐이다.

그녀의 침묵을 오해한 것인지 플리타가 어깨를 움츠리며 더욱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들 그랬어. 유모도 그렇고. 하녀들도. 내가 잘못하면 엄마 때문이라고. 엄마가 천해서…… 그래서.”

훌쩍. 플리타가 말을 하다 말고 울먹였다. 그러더니 작은 손으로 두 눈을 비비기 시작했다.

“그치마안, 흐흑, 엄마는…… 천하지 않은데. 나 때문에.”

“……프, 공녀님.”

로제는 저도 모르게 플리타를 부를 뻔하다가 가까스로 고쳐 불렀다. 스스로를 탓하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저로 인하여 아이가 입었을 상처를 생각하니 너무나 미안했다. 지금껏 아이에게 해 준 것도 없는데, 외려 아이가 이렇듯 주눅 들게 된 게 자신 때문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기분 나쁘게 해서, 흑, 미안해. 그런데 엄마는 미워하지 마. 엄마는…… 잘못한 거 없…….”

“기분 나쁘지 않아요, 공녀님.”

로제는 꽉 막힌 가슴을 두드리고 싶은 걸 참으며 서둘러 말을 건넸다. 그러자 플리타가 울먹거리며 눈을 비비다가 로제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이의 젖은 눈가를 손수건으로 닦아주고는 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얼마나 기뻤는데요. 공녀님을 이렇게 모실 수 있어서.”

“……정말?”

플리타의 동그란 눈에 눈물이 고여 있다가 툭 떨어졌다. 로제는 아이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이렇게 사랑스러우신 분인데.”

“…….”

아이가 로제의 말에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더니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움직였다. 로제가 그 모습에 재차 미소를 지은 뒤, 플리타를 향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런 말, 믿지 마세요.”

“……응?”

“공녀님의…… 어머니에 대한 나쁜 말요. 공녀님처럼 사랑스러운 분을 낳았는데, 천할 리가 없잖아요. 분명히 귀하신…… 분일 거예요. 아름다운 분이실 거고요.”

스스로에 대한 칭찬이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로제는 플리타의 자존감을 올려주고 싶었다.

어떻게 그런 말로 아이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건지.

그녀는 진심으로 유모와 하녀들에게 화가 났다. 평소 화를 내는 법이 거의 없던, 온순한 성격의 로제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그들이 있다면 따져 물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이는 다른 이의 눈치를 보고 움츠러들어 있는 제 모습에 너무나 익숙해 보였다. 천한 피 운운하는 말로 짐작해 볼 때, 이미 여러 번 경멸 어린 시선을 받았을 게 분명했다.

하기야 조금 전 유모가 플리타를 대하는 태도로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공녀님 운운하며 고귀한 핏줄을 강조하면서, 정작 유모는 플리타를 함부로 대하였으니 말이다.

“……정말?”

플리타가 로제의 말을 듣다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물었다. 로제가 입꼬리를 올리고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처음이야. 엄마를 좋게 말해 준 거.”

플리타는 제멋대로 실룩이는 볼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더니 이내 헤헤, 하고 웃었다. 그러고는 반짝이는 연녹색 눈으로 로제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 로제가 좋아.”

“저도요. 저도 공녀님이…… 좋아요.”

로제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 감춘 채 아이를 향해 웃었다. 아이에게 웃는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다. 그리고 아이를, 지금처럼 이렇게 웃게 해 주고 싶었다.

제 모든 걸 다 바쳐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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