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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12화 (1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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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가 초조한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두 손을 덜덜 떨며 맞잡았다. 하녀장의 시선이 그 손으로 잠시 내려갔다가 올라오더니 다시금 로제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

“하녀장님.”

그 와중에도 유모는 독촉하는 투로 하녀장을 불렀다. 하녀장이 그제야 로제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하께서 직접 명하신 일인데, 함부로 그 뜻을 반대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신원도 불분명한 이를!”

“그 또한 전하께서도 염두에 두셨을 테고요.”

“그렇듯 가볍게 생각하시면 안 되지요!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공녀님께 접근한 건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유모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 말을 듣던 하녀장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럼 공녀님이 물에 빠지리라는 것을 미리 예측이라도 하고 접근했다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무슨 그런 허황된 소리를 하느냐는 듯 쳐다보는 하녀장의 시선에 유모의 말문이 막혔다. 유모는 두어 번 입을 벙긋거리다가 인상을 쓰더니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 하녀에 대한 권한은 전적으로 하녀장님께 있으니 제가 뭐라 간섭할 수 없겠지요. 이 일로 말미암아 설령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말이지요.”

“…….”

악담을 하는 듯한 유모의 태도에 하녀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하녀장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유모가 다시금 인상을 쓰더니 로제를 쏘아보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갔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 바람에 문 옆에 서 있던 하녀가 크게 몸을 움찔거렸다. 로제 역시 당황하여 문 쪽을 돌아본 순간, 하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네 급여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예?”

로제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하녀장이 로제의 커다란 녹색 눈을 마주하고 있다가 재차 말했다.

“네가 받을 급여 말이다.”

“그, 그럼…… 제가 공녀님의…….”

로제는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그 모습을 보던 하녀장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너를 공녀님의 전담 하녀로 쓰겠다고 하셨으니, 일단 그 명에 따라야겠지.”

“가, 감사합…….”

“됐다. 내가 너에게서 감사 인사를 받을 이유도 없고.”

하녀장은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냉담한 시선으로 로제를 보았다. 여전히 로제를 탐탁지 않아 하는 시선이었다. 그제야 로제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대공 전하의 명이라 하여 너를 무조건 계속 고용하지는 않을 거다. 네가 하는 것을 지켜보고 공녀님의 하녀로 두어도 될지 결정할 테니 그리 알아두어라.”

“예, 하녀장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로제는 하녀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각오를 다졌다. 차라리 이게 현실적이었다. 아니, 플리타의 곁에 머무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점에서 이미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떻게든 플리타의 곁에 있어야 해.’

그녀는 거듭 각오를 다지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 와중에 하녀장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급여는 한 달에 3세테나를 지급하도록 하마.”

“……예?”

마음을 굳게 다잡던 로제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방금 자신이 뭔가 잘못 들었나 하여 고개를 들었다. 하녀장이 로제의 의문 섞인 표정에 미간을 찡그렸다.

“왜? 급여가 적어서 불만이니?”

“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너무 많아서요.”

3세테나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그건 로제에게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녀가 단 한 번도 벌어본 적 없는 액수의 돈이었다.

국경 지대에 정착하여 살 적에 한 달 내내 약초를 캐어 받았던 돈이 2그로스 정도 되었다. 운이 좋아 값비싼 약초를 캔다고 할지라도 3그로스를 넘은 적이 없었다.

“너무, 많다고?”

하녀장이야말로 뭔가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로제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1세테나는 100그로스이다. 그러니 3세테나는 자신이 운 좋게 많이 벌었던 달의 수입보다도 100배나 많은 것이다.

“확실히 시골 출신이기는 하구나. 고작 그걸 가지고 많다고 하다니 말이야.”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녀장이 실소를 내뱉었다. 문 쪽에 있던 하녀에게서도 비웃는 듯한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로제는 무안한 마음에 얼굴을 붉혔다.

수도에서는 모든 게 다 비쌌던 게 이제야 기억났다. 그 바람에 수도에 올라온 이후 줄곧 돈이 부족해 고생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정말 대책도 없이 이곳까지 왔구나.’

죽기 전에 사랑하는 남자와 아이를 보고 싶다는 바람 하나만으로 수도에 온 저를 용감하다 해야 할까. 운이 나빴더라면 그들을 보지도 못한 채 어딘가에서 죽었을 것이다. 병이 깊어져 죽기도 전에 굶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헤이번, 당신이 나를 구해줬네요.’

로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헤이번이 저를 살린 셈이었다. 또한 아이의 곁에 머무를 기회까지 주었으니 죽기 전 소원마저 들어준 셈이었다.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저를 기억도 못 하는 남자가 자신이 바라는 건 다 이루어주었으니 우습지 않은가. 그녀는 코끝이 시큰해지는 걸 느꼈다. 웃음이 나오는데 왜 자꾸 코끝이 시큰거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 * *

급여에 대한 것 외에도 하녀장은 여러 가지에 대해 알려주었다. 대공 저의 하녀로서 갖춰야 할 몸가짐이나 규칙적인 생활 패턴, 그리고 지켜야 할 규칙 등이 그 주된 내용이었다.

“외출은 본래 한 달에 두 번이지만, 네 경우에는 이제 막 하녀가 되었으니 두 달에 한 번만 외출을 허락하마. 불만이 있는 건 아니겠지?”

“예, 하녀장님.”

하녀장은 외출에 대한 사항을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끝낸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제가 공손히 대답을 하고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럼 따라오려무나. 공녀님께 정식으로 인사를 드려야 하니까.”

“……!”

하녀장의 말에 로제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모습을 본 하녀장이 문 쪽으로 발길을 돌리려다가 입을 열었다.

“급여 얘기를 할 때도 기뻐하는 내색은 없더니, 공녀님께 인사를 드린다니까 기쁜가 보구나.”

“아, 저…….”

로제는 자신이 너무 티를 낸 건가 싶어 황급히 표정을 고쳤다.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건 알지만, 혹시 자신의 경솔한 행동으로 인해 저와 플리타의 관계가 드러날까 봐 겁이 났다.

“하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지. 돈이야 다른 일을 해서라도 벌면 그만이지만, 왕실의 귀한 핏줄을 곁에서 모시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말이야. 네가 공녀님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감히 이곳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겠니?”

하녀장은 가벼운 투로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린 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로제가 하녀장의 뒤를 따라 황급히 방 밖으로 나갔다.

* * *

“앞으로 공녀님을 모실 하녀입니다. 인사드려라.”

하녀장이 먼저 나서서 플리타에게 로제를 소개하고는 뒤에 서 있던 로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로제는 하녀장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당초 하녀장의 말 자체를 듣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정확했다.

‘……아가. 플리타, 내 아기.’

로제의 시선은 커다란 소파에 쏙 파묻혀 있다시피 한 플리타에게 고정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아이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걸까.

플리타가 곰 인형을 안고 있다가 연녹색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그러고는 바로 옆에 있던 유모를 돌아보며 물었다.

“……하녀?”

아이의 목소리는 맑았지만, 큰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귀를 기울여 듣지 않으면 그냥 놓쳐버릴 정도로 작은 속삭임에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유모는 플리타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로제를 향해 날카롭게 지적했다.

“당장 고개를 숙이지 못해? 어디서 감히 공녀님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느냐! 아무리 예법을 모르는 천한 것이라 해도 그렇지. 쯧, 그래서 내가 반대를 한 것인데…….”

유모는 매몰차게 야단을 친 뒤, 하녀장을 힐끔 쳐다보며 들으라는 듯 일부러 혀를 찼다. 로제가 금세 새파랗게 질려 고개를 조아렸다. 혹시 하녀장이 마음을 바꾸어 모든 걸 없던 일로 되돌릴까 겁이 난 탓이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공녀님께 어서 인사드리도록 해라.”

하녀장은 유모의 말에도 불구하고 덤덤한 얼굴로 로제의 말을 끊고 재차 입을 열었다. 그제야 로제 역시 마음을 가라앉힌 뒤,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공녀님께 처음 인사드려요. 로제, 라고 합니다. 앞으로 최선을 다해 공녀님을 모시겠습니다.”

간단한 인사였다. 그저 제 이름을 말하고 인사를 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인사를 입 밖으로 소리 내어 하는 것이 로제에게는 너무나 힘들었다. 특히 제 이름을 입에 담았을 때는 눈시울마저 뜨거워졌다.

“……로제?”

아이가 제 이름을 작게 중얼거렸다. 로제는 가슴속이 먹먹해져 왈칵 눈물을 쏟을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낸 뒤, 고개를 들었다.

경계심 많은 새끼 고양이처럼 거리를 둔 채 말똥말똥 저를 바라보던 플리타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닮은, 아니, 저보다 더 맑고 고운 아이의 연녹색 눈동자 안에 제 모습이 비쳤다.

“공녀님을 구한 이입니다.”

그 순간, 하녀장이 다시금 말을 꺼냈다. 그러자 플리타가 로제를 쳐다보다 말고 고개를 휙 돌려 하녀장을 보았다.

“공녀님께서 물에 빠지셨을 때, 로제가 호수에 뛰어들어 공녀님을 구하였지요. 대공 전하께서 그 공을 인정하여 공녀님의 전담 하녀로 뽑으셨답니다.”

“……아.”

플리타가 작은 입을 벌려 외마디 소리를 내뱉더니 다시 로제를 보았다. 조금 전에 아이가 내보였던 경계심이 한결 누그러진 모습이었다. 아마도 방금 하녀장이 한 얘기를 들어서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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