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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따라와요!”
앞서 걷던 하녀가 뒤를 돌아보고는 로제를 재촉했다. 로제가 힘겹게 그녀의 뒤를 따라가다가 사과했다.
“미안해요. 제가 몸 상태가 좀…….”
“그런 건 내가 알 바 아니거든요? 빨리 서두르기나 해요.”
하녀는 로제의 말을 중간에 가로채더니 쌀쌀맞게 대꾸했다. 그러더니 로제가 제 뒤를 따라오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 다시금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쿵쿵, 발소리가 날 정도로 힘을 주어 걷는 모습에 짜증이 실린 것도 같았다.
“내가 왜 이런 일까지 해야 돼? 귀족도 아닌 여자를 숙소까지 안내하라니. 어쩌다가 운 좋게 공녀를 구한 일이 뭐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일부러 들으라는 듯 하녀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로제는 하녀의 말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딱히 상처를 받거나 그녀의 말에 무안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로제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는 중이었다. 플리타, 제 아이의 근처에 머무르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격한 터라 다른 건 신경 쓸 틈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그때였다. 신경질적으로 걷던 하녀가 멈춰 선 것은.
“여기가 그쪽이 쓸 방이에요.”
하녀는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로제의 시선이 하녀가 가리킨 문으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하녀의 목소리가 다시금 이어졌다.
“안에 들어가면 갈아입을 하녀복이 있을 거예요. 일단 옷부터 갈아입은 뒤에 기다리고 있어요.”
“저, 옷을 갈아입기 전에 몸을 좀 씻었으면 하는데요.”
로제가 문을 쳐다보다가 하녀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호수에 빠졌던 터라 그녀의 몸에서는 물비린내 같은 퀴퀴한 냄새가 났다. 하녀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는 듯 얼굴을 찡그리더니 한숨과 함께 투덜거렸다.
“진짜 가지가지 요구하네. 정말 뭐라도 되는 줄 아나…….”
하녀는 로제를 힐끔거리다가 방 옆으로 나 있는 계단을 가리켰다.
“이 계단으로 내려가서 건물 밖으로 나가면 돼요. 그렇다고 여유 부리면서 씻을 생각인 건 아니죠? 대충 닦고 와서 옷 갈아입고 기다려요. 하녀장님께서 곧 도착하실 거니까.”
“고마…….”
로제는 하녀의 퉁명스러운 말에도 불구하고 고맙단 인사를 하려 했다. 하지만 하녀는 그녀의 인사를 들을 생각이 없는 듯 그대로 몸을 돌렸다. 멀어져 가는 하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로제가 쓴웃음을 지은 뒤, 문을 열었다.
“크흠. 흠.”
문을 열자마자 로제는 저도 모르게 기침을 했다. 방 안 곳곳에 뽀얗게 쌓여 있던 먼지가 문이 열리기 무섭게 한꺼번에 일어난 탓이었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창문을 열기 위해 창가로 다가갔다. 그러나 창문을 여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이 사용한 지 오래된 듯 창문의 잠금쇠에 잔뜩 녹이 슬어 있었다.
“끄응.”
로제는 입술을 앙다문 채 잠금쇠를 풀기 위해 거듭 힘을 주었지만, 이내 포기하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숨을 헐떡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고작 이걸 했다고 이렇게…….”
어이없는 일이었다. 누가 봤다면 자신을 하녀로 고용하는 걸 다시 생각하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창문을 여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서 이러고 있으니 말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창문을 열지도 못했지만.
“……나중에 약제사를 찾아가 봐야 할까.”
수중에 남은 돈이 별로 없으니 치료사를 찾아갈 수는 없을 터였다. 물론 치료사를 찾아간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병을 고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치료사보다는 돈이 덜 드는 약제사에게라도 찾아가 뭐라도 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을 낫게 할 수는 없더라도 체력을 보충하는 약이나마 지어 먹으면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몸 상태로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쫓겨나겠지.”
로제는 가쁘게 몰아쉬던 숨을 고르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금 그녀가 바라는 게 있다면, 단 하나뿐이다. 아이의 곁에, 그 남자의 곁에 조금이라도 더 머무르는 것.
그저 멀리서라도 볼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싶었는데, 막상 사랑하는 그들의 근처에 머무를 기회가 생기니 욕심이 생겨났다.
조금 더, 오래, 그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욕심.
“…….”
로제가 시선을 들어 창밖을 보니, 바쁘게 오가는 고용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추모식 준비로 다들 정신이 없어 보였다. 물론 자신의 경우에는 이곳의 고용인이 아닌, 대공 저의 하녀이니 직접 뭔가를 할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러고 있으면 안 되니까.”
가뜩이나 저를 아니꼽게 여기고 배척하는 분위기인데 거기에 더해 게으르단 인상까지 줄 수는 없었다.
로제는 고개를 흔든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침대 옆의 옷걸이에 하녀복이 걸려 있는 게 보였다.
‘몸부터 빨리 씻고.’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수건을 챙겨 다시 밖으로 나갔다.
하녀가 알려준 계단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인지 건물 밖으로 나갈 때까지 단 한 사람과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기야 자신의 방 위치가 건물 안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인 것 같기는 했다.
그러나 로제는 그 점에 대해 딱히 불만을 갖지는 않았다. 어차피 추모식이 끝날 때까지만 머무를 임시 숙소이기도 하고.
‘아니, 이보다 더 심한 곳이라 하더라도 괜찮아.’
사랑하는 남자와 아이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마구간의 짚 더미 위에서라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혹은 길바닥 위에서 잠을 청하라 해도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그 무엇이든, 그녀는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 * *
“아무리 공녀님을 구한 공이 크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공녀님을 모시는 자리에 함부로 정체도 모르는 사람을 쓸 수 있어요? 전하께서 너무 안이하게 여기신 게 아닌가 싶어 염려되네요.”
유모는 못마땅한 투로 말을 내뱉고는 바쁘게 부채질을 했다. 그러나 하녀장은 유모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대신, 잠시 침묵하다가 느릿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글쎄요. 대공 전하께서 하신 일에 이렇다 저렇다 할 수는 없겠지요. 부인이나 제가 어찌 그분의 뜻에 반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따르고 복종해야 마땅하지요. 더구나 이번처럼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져 외려 전하를 뵐 면목이 없는 처지로서는.”
“아, 물론! 그거야 그렇죠. 대공 전하의 뜻을 거스르겠다는 게 아니라, 그저…….”
유모는 하녀장의 말에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말을 얼버무렸다. 하녀장이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시다가 유모를 슬쩍 보고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공녀님을 안전하게 보호하지 못했으면 가만히 있기나 할 것이지…….’
하녀장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유모를 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내뱉으려다가 그대로 삼켰다.
도무지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녀는 왕실 묘역에 도착하자마자 접한 소식을 다시금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공녀님이 홀로 돌아다니다가 호수에 빠지다니.
대공 전하와 공녀님을 모시기 위하여 따라온 고용인들이 몇 명인데, 어찌 어린 공녀님이 홀로 건물을 벗어나 깊은 호수에 갈 때까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단 말인가.
대공 저의 하녀장이란 위치에 늘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온 그녀였다. 그만큼 하녀장은 모든 일에 철저하고자 했고, 대공 저의 다른 고용인들 역시 그러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부심에 흠이 생긴 것이다.
이렇듯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인하여.
대공 전하의 유일한 핏줄인 공녀님을, 그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말미암아 잃을 뻔하였기에.
‘진작 왔어야 했는데.’
하녀장은 혀를 차며 다시 한번 미간을 좁혔다. 추모식 때문에 여러 날 자리를 비워야 하기에 저택에 남은 하녀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하고 일을 맡기느라 저 혼자 뒤늦게 온 게 문제였다.
물론 그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저택의 안주인이 없는 만큼 자신이 챙겨야 할 일이 많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가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녀장이 거듭 한숨을 삼키려는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유모의 시선도 문 쪽으로 움직였다.
“그 하녀일 거예요.”
하녀장이 덤덤한 투로 입을 열었다. 유모가 의아한 표정으로 하녀장을 돌아봤다가 이내 그녀가 한 말을 이해하고는 눈을 치켜떴다.
“일단 내가 먼저 살펴보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말이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전하께 다시 건의를 드려야 하니……. 들어오려무나.”
하녀장은 유모에게 덧붙여 설명한 뒤, 문 너머에 있는 이를 향해 말을 건넸다.
* * *
저를 살피는 시선들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로제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그러자 한참 동안 그녀를 위아래로 보던 여인들 중 하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름이 로제라고?”
“예.”
“어디 출신인……지는 알 길이 없겠구나. 부모 없이 자라서 이곳저곳 떠돌아다녔다, 라……. 쯧.”
자신에 대해 쓰여 있는 종이를 훑어보던 여인, 아니, 하녀장이 혀를 찼다. 그 소리가 제법 컸다. 아마도 그만큼 못마땅한 것일 터였다.
그리고 그건 하녀장의 곁에 앉은 또 다른 여인, 유모도 마찬가지였다. 유모는 하녀장이 내려놓은 종이를 집어 들더니 이내 헛웃음을 내뱉었다.
“부모 없이 자란 고아인데다가 그 출신지도 분명하지 않은 이를 공녀님의 전담 하녀로 고용한다니요. 이건 정말 안 될 일이라고 봅니다, 하녀장님. 대공 전하께 재고해 주시기를 부탁드려 보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전하께 건의를 드리겠다고 하셨잖아요.”
유모가 채근하듯 하녀장에게 덧붙여 말했다. 가만히 서서 그 얘기를 듣던 로제가 화들짝 놀라 시선을 들었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불안한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이리저리 흔들렸다.
‘혹시 이대로 쫓겨나는 걸까? 플리타의 곁에 있을 수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