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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10화 (10/134)

10

“공녀님의 호흡이 안정적입니다, 전하. 물 속에 오래 계셨더라면 폐에도 물이 찼을 터인데 구조가 빨랐던 것이 참으로 다행입니다.”

플리타의 몸 상태를 살펴본 주치의가 헤이번에게 말했다. 굳은 표정으로 주치의의 말을 듣던 헤이번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눈치챌 수 있을 정도의 변화는 아니었다.

“수고했네. 아이를 계속 살피도록 하게.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곧바로 내게 알리도록 하고.”

“명심하겠습니다.”

주치의가 헤이번의 말에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헤이번이 시선을 돌려 침대 위에 잠든 플리타를 바라보았다.

아까는 새파랗게 질려 있더니 주치의의 말대로 괜찮아진 것인지, 플리타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온 상태였다. 헤이번은 저도 모르게 손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는 손을 뻗어 아이의 뺨을 어루만지거나 손을 잡아주는 대신, 몸을 돌렸다.

그의 뒤에 시립해 있던 고용인들이 양쪽으로 비켜섰다. 헤이번은 침실 밖으로 나가려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멈춰 서서 질문을 던졌다.

“플리타를 구한 여자는 어디에 있지?”

“예?”

“아까 그 여자 말이다. 플리타를 구한 사람이 그 여자 아닌가?”

헤이번은 고용인들을 쳐다보다가 공관의 관리를 맡은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대공의 시선을 마주한 사내가 어쩔 줄 몰라 당황하며 그의 눈을 피했다. 그 모습에 헤이번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 딸을 구한 은인이니 보답을 해야겠다. 안내하도록 하라.”

“아, 저, 그것이…… 예에,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여자를 데려오도록 하겠…….”

“아니. 여자가 있는 곳으로 지금 바로 가도록 하지.”

헤이번은 사내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하지만 사내는 우물쭈물 망설이며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헤이번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들을 보다가 차갑게 물었다.

“……내가 같은 얘기를 되풀이해야 하나?”

“소, 송구합니다!”

사내는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그러고는 변명조로 말을 꺼냈다.

“그, 묘역을 침입하였기에, 침입한 의도를 조사하고자…….”

“심문을 받고 있다는 거로군.”

헤이번의 낯빛이 차가워졌다. 그는 문 옆에 서 있던 페드윈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그 여자가 있는 곳을 알아내도록 하게, 페드윈 경.”

“예, 전하!”

페드윈이 주군의 명을 받아 고개를 숙였다.

* * *

짜악.

로제의 뺨에 또다시 붉은 손자국이 생겼다. 로제는 모로 돌아간 고개를 똑바로 할 힘도 없어 축 늘어진 채 눈을 감았다. 그러자 방금 그녀의 뺨을 때린 자가 우악스럽게 로제의 턱을 잡았다.

“대답해라. 왕실 묘역에 침입한 의도가 뭐지?”

“저, 저는, 그저…… 추, 추모식이 있다고 하여…….”

로제가 간신히 입을 열어 금방이라도 꺼질 것만 같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사내가 바란 대답은 그런 게 아니었다.

“공녀를 해치라고 누가 보낸 것이지? 응? 누가 보냈느냐. 그것만 말하면 풀어주도록 하마.”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로제는 억지로 쥐어짜듯 힘을 내서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사내가 얼굴을 구기고는 다시 그녀의 머리채를 잡았다. 이미 여러 번 따귀를 맞은 탓에 그녀의 얼굴은 시퍼렇게 멍이 들고 입술이 터져 엉망이었다.

대공의 딸을 구한 사람에게 할 법한 행동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공녀를 해치라고 보낸 사람의 이름까지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내가 묻는 말에 그렇다고 대답만 하면 돼.”

사내의 입에서 낯선 이름들이 나왔다. 그러나 로제는 고개를 계속 흔들었다.

그녀의 끈질긴 거부에 사내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처음에는 공녀를 안전하게 보호하지 못한 책임을 면하고자 이 별 볼 일 없는 평민 여자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다. 실제로는 그와 반대로 이 여자가 공녀를 구했다고 해도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얼마든지 사고의 내막을 조작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를테면 이 여자가 고의로든, 혹은 실수로든 공녀를 물에 빠뜨렸다거나…….

그런데 상황이 더 복잡해졌다. 사내는 저를 찾아왔던 더클렌 공작가의 사람을 떠올렸다. 그는 여자에게서 이름을 받아내라 요구했다.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사내는 오랫동안 왕실을 위하여 일했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암투를 봐 왔으니 말이다.

뜻하지 않게 벌어진 사고를 기회 삼아 ‘왕위’를 노리는 왕족들 중 하나를 쳐내려는 속셈일 터였다.

선왕비가 내심 대공을 원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러니 그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서라도 위협이 될 만한 다른 자들을 제거해야 할 터였다. 그것을 위하여 선왕비가 본인의 가문을 움직인 것일 테고.

‘아니지. 어쩌면 대공이 뒤에서 선왕비를 조종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하여간 고귀한 분들이 구린내는 더 많이 난다니까.’

사내는 속으로 비아냥거리며 다시 로제를 향해 입을 열려 했다.

그 순간, 문이 열렸다.

“이봐.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 헉! 대, 대공 전하!”

사내는 짜증 섞인 투로 말을 꺼내며 뒤를 돌아보다가 급히 숨을 들이쉬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헤이번이었다. 그는 넙죽 엎드린 사내를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들었다.

그의 눈에 여자가 들어왔다. 의자에 묶인 채 엉망이 되어 있는 여자. 그사이에 본래 얼굴을 알아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얻어맞은 여자를 본 순간, 가슴속에서 뜨거운 뭔가가 치밀었다.

그것은 분노였다.

제 딸을 구해준 은인에게 보답은커녕 이런 일을 겪게 하였으니 화가 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기억을 잃은 뒤, 그는 냉정해졌다. 기억과 함께 감정이 소실된 것처럼 말이다. 본래의 그가 다정하고 서글서글한 편이었던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왜 지금 이 순간, 이런 격한 감정을 느낀단 말인가.

헤이번은 본인의 현재 감정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도 그랬다. 길거리에서 이 여자를 봤을 때도 한동안 머릿속에서 털어내지 못했다.

뚜벅. 뚜벅.

헤이번은 머릿속이 복잡한 와중에도 겉으로는 덤덤한 표정으로 의자에 묶여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 역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핏기 없는 얼굴에 가슴속이 지끈거렸다. 터진 입가를 타고 흘러내린 핏자국에는 저도 모르게 살기가 일어날 뻔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억누른 채 여자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내 딸을 구했나?”

“……아이, 아니, 고…… 공녀님께서는 어떠신지요. 괘, 괜찮으신가요?”

로제는 헤이번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다급히 플리타가 괜찮은지 물었다. 그녀의 녹색 눈 가득 담긴 건 아이에 대한 염려였다. 정작 본인은 아이를 구한 공도 인정받지 못한 채 이렇듯 험한 꼴을 당하고 있었으면서. 그에 대한 원망은 전혀 없는 듯했다.

바보 같은 여자가 아닌가.

헤이번은 어쩐지 헛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아이를 빨리 구한 덕분에 괜찮다. 지금은 편히 자고 있는 중이고.”

헤이번은 그녀에게 플리타의 상태를 말해 주면서도 그런 제 모습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괜찮다고 대답해주는 것까지는 몰라도, 아이가 편히 자고 있다는 것까지 세세히 말해줄 필요는 없었으니 말이다.

“다…… 다행이에요, 정말.”

그의 대답을 들은 로제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슬픔의 눈물이 아닌, 기쁨과 안도의 눈물이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엉망이 된 제 모습 따위는 아예 잊은 사람처럼.

그런데 그게 나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이 쓸데없이 길게 대답해준 것이 그다지 나쁜 일은 아니란 생각도 들었다.

“흠…….”

헤이번은 괜히 멋쩍은 마음에 헛기침을 하다가 그녀가 여전히 묶여 있는 걸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여전히 엎드려 있던 사내에게 명령했다.

“여자를 풀어주어라.”

“하, 하지만 이 여자는 묘역에 침입한…….”

사내가 고개를 들어 눈을 굴리며 말을 꺼냈다. 그러나 헤이번은 그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고개를 돌려 저를 따라온 호위 기사에게 명을 내렸다.

“여자를 풀어주게, 페드윈 경.”

“예, 전하.”

페드윈은 냉큼 다가와 로제의 몸을 묶고 있던 줄을 풀었다. 눈을 끔뻑거리며 그 광경을 보던 사내가 더클렌 가의 사람에게서 자신이 받았던 명을 뒤늦게 떠올리고는 낭패다 싶어 몸을 일으켰다.

“더 심문을 해야 합니다, 전하! 누가 공녀님을 해치라고 사주한 것인지, 그 배후도 알아내야 하고.”

“내 딸을 구했다. 해치려 한 것이 아니라.”

헤이번은 사내를 돌아보았다. 날카롭고 차가운 시선에 사내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면서도 용기를 내어 재차 말을 꺼냈다.

“그, 그렇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신분이 불확실하고 천한 계집이니…….”

“내 딸의 하녀다.”

“……예?”

헤이번의 말에 사내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페드윈도 그와 비슷한 표정으로 제 주군을 쳐다보았다. 로제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뭔가 잘못 들었나 싶어 의자에 앉은 채 헤이번을 올려다보았다.

“너를 내 딸의 전담 하녀로 고용하겠다.”

“……!”

“물론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아, 아니요! 아니에요! 좋아요!”

로제는 고된 심문으로 지쳤던 몸 상태조차 잊고 크게 외쳤다. 헤이번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그럼 됐군. 여자는 데려가도록 하지.”

그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페드윈이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 로제는 비틀거리며 헤이번의 뒤를 따라 심문실 밖으로 나왔다.

곧고 바른 자세로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물에 빠진 생쥐, 아니, 그보다 더 지저분한 꼴인 저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단정한 모습으로 보고 싶었는데.’

로제는 쓴웃음을 짓다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아이를 무사히 구했으니까. 게다가 아이의 근처에 머무를 수 있는, 꿈 같은 기회마저 얻었으니까.

……그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눈을 깜빡이다가 흐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앞서 걸어가는 남자를 향해 속으로 조용히 말을 건넸다.

‘고마워요, 헤이번. 정말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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