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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성큼성큼 다가와 금방이라도 그녀를 후려칠 것처럼 위협하며 언성을 높였다. 로제는 두려운 마음에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은 몸을 억지로 지탱한 채 고개를 저었다.
“병 아니에요. 그냥 비를 맞아서…… 그래서 감기에 걸렸던 건데, 이제 다 나았어요. 정말이에요.”
“고작 비 맞았다고 피를 토해? 그건 아니잖아! 어디서 거짓말을 하려고! 아가씨가 피 토하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주인이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그의 말에 로제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사흘 내내 수시로 문을 열어 들여다보더니 그 와중에 자신이 각혈하는 걸 본 모양이었다.
죽을 병에 걸린 건 맞지만, 지금 당장 죽는 건 아닌데.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키는 병에 걸린 건 아닌데.
주인에게 해명하고 싶은 말들이 입 속에서 맴돌다가 허망하게 흩어져 사라졌다. 더 버텨 봐야 민폐란 생각이 들었다. 저로서는 방값이 싼 이곳에서 머무르고 싶지만, 주인 입장에서는 불쾌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알았어요.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나갈게요.”
로제는 침묵 끝에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 * *
쾅!
여관 출입문을 닫는 소리가 거칠었다. 주인이 일부러 그런 게 분명했다. 사흘 전 제게 술집 일자리를 권했다가 거절당한 이후 줄곧 제게 시비를 걸고 못마땅해했으니 말이다.
아파서 누워 있을 때도 툭하면 문을 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바람에 마음 편히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휴우.”
로제는 여전히 좋지 않은 몸 상태에 그냥 주저앉고 싶어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나약하게 굴지 마.’
그녀는 제 자신에게 말했다.
‘이러려고 수도로 온 게 아니잖아. ……죽기 전에 그들을 보고 싶어서 온 거잖아. 네가 낭비할 시간이 어디 있어.’
로제는 다그치듯 속으로 중얼거린 뒤, 다시 허리를 폈다.
로제의 손에 들린 건 얇은 옷가지 몇 벌과 쓸데없는 잡동사니 몇 개가 담긴 작은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그 가방만이 그녀가 살아온 흔적이 되어줄 터였다.
초라했다.
제 비루한 삶이 남긴 흔적이란 게 고작 그것뿐이라는 사실이.
사랑했던 기억도, 사랑했던 사람도. 그 무엇 하나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
로제는 쓴웃음을 짓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무거워진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다른 말을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이제 남은 돈도 별로 없는데, 어느 여관을 가야 하나.”
그냥 생각나는 대로 꺼낸 말인데,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고 보니 정말 막막해졌다. 죽기 전까지는 어찌 되었든 어딘가에서 묵어야 할 텐데. 그래야 헤이번과 제 아이, 플리타의 근처나마 맴돌 수 있을 텐데.
“정말 일자리를 알아봐야 할까.”
임시로 단기간만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시한부이니 오래 일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칫 저를 고용한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 로제는 머릿속이 복잡해져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다시 발을 내디뎠다.
당장 오늘 밤에 묵을 곳이 없지만, 그래도 지금은 일단 그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사흘 만이기에.
그녀는 사흘 만에 대공 저 앞에 갔다. 그리고 저택 앞의 풍경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평소 보지 못했던 마차가 정문 앞에 서 있는 걸 본 까닭이었다.
왕실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검은색 마차.
“……누가 방문했나?”
로제는 가방을 품에 안은 채 무슨 일인가 싶어 목을 조금 더 길게 빼고 저택 앞을 보았다.
바로 그때, 정문이 열리더니 대공 저의 기사들이 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정문과 마차 주변을 호위하듯 에워쌌다. 그 광경에 로제의 녹색 눈이 더욱 커졌다.
그와 동시에 한 남자가 정문 밖으로 나왔다. 금발에 서늘한 푸른 눈, 호리호리하고 늘씬하면서도 결코 유약해 보이지 않는 남자, 바로 헤이번이었다. 그는 검은색 긴 코트를 입고 마차로 다가갔다.
‘어디를 가려는 걸까.’
그녀가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그의 뒤를 따라 나오는 사람들에게로 무심코 시선을 옮겼다.
“……!”
헤이번의 뒤에 나온 사람들 중에 작은 아이가 하나 있었다.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채 유모로 추정되는 여인의 손을 잡고 나온 아이.
‘……플리타.’
아이가 누구인지 아무도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이의 정체를 바로 깨달았다.
제 아이였다.
갓난아기였을 적에 제 품에서 떠나보내야 했던 아이.
제대로 한 번 품어보지도 못하고 보내야만 했던, 너무나 그리웠던, 자신의 아이.
……헤이번과 자신의 아이.
제 삶의 흔적. 제 사랑의 결과.
로제의 눈에서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소리를 들은 것일까.
아이가 마차 앞까지 유모의 손을 잡고 걸어가다가 문득 멈춰 서더니 로제가 서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로제는 아이의 반응에 흠칫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니야. 거리가 멀어서 보지 못했을 거야. 설령 봤다고 하더라도, 플리타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걸.’
로제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그 자리에 버티고 섰다. 아이가 저를 유심히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멀리 있어서 아이의 얼굴을 또렷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호기심 가득한 연녹색 눈과 포동포동한 볼은 볼 수 있었다.
‘플리타.’
“……아가.”
로제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으며 입을 연 순간, 유모가 재촉을 한 것인지 플리타가 로제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마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헤이번을 향해 걸어갔다. 로제의 눈이 저절로 아이를 따라 움직이다가 그에게 닿았다.
“…….”
분명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지난번처럼. 하지만 헤이번은 곧바로 시선을 돌리고는 제 앞에 다가온 플리타를 데리고 마차에 탔다. 그리고 유모를 비롯하여 대공 저의 모든 고용인들이 마차를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히이잉.”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뒤이어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들 역시 출발했다.
로제는 멀어져 가는 마차를 바라보며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입을 막았던 손을 내리고는 비틀거리며 정문으로 향했다.
그사이에 유모와 고용인 몇 명이 헤이번과 플리타를 태우고 출발한 마차의 뒤를 따라 다른 마차를 타고 떠났다. 그리고 남은 고용인들이 저택 안으로 들어가고 정문 앞에는 경비병만 남은 상황이었다.
“저, 저기……. 마차가 어디로 간 건가요? 대공 전하께서는 어디로 가신 건가요?”
다짜고짜 대공의 행방을 묻는 로제의 모습은 흡사 미친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계속 대공 저 주변을 맴돌아 수상하다고 여겼던 탓에 경비병의 표정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자신에게 묻는 여인을 무시하지는 못했다. 정문을 지키고 있는 자신이 대공 전하의 얼굴이나 다름없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기에.
“선왕 폐하께서 돌아가신 지 6년이 되지 않았소? 그러니 당연히 6주기 추모식을 앞두고 왕실 묘역으로 행차하신 거지. 왕국민으로서 그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게요?”
물론 경비병의 말이 곱게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로제는 그의 퉁명스러운 말에도 불구하고 거듭 물었다.
“추모식이라고요? 그럼 언제 돌아오시나요? 오늘 저녁때 돌아오시나요?”
“오늘 저녁때는 무슨……. 일주일 동안 추모식이 이어지잖소! 아무리 무지해도 그렇지, 그런 것조차 모르나.”
경비병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고는 시선을 돌려 그녀를 외면했다. 로제가 멍한 표정으로 잠시 서 있다가 뒤늦게 감사하다며 작은 소리로 인사한 뒤, 돌아섰다.
저 멀리 자신이 떨어뜨린 가방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로제는 가방을 챙기기 위해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문득 든 생각에 다시금 경비병을 돌아보았다.
“……그, 저기, 왕실 묘역이 어디인지.”
경비병이 또다시 한심해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로제는 민망한 마음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이를 보고 나니 마음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도 더 사랑스럽게 자란 아이를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아니, 볼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냥 아이가 있는 곳 근처에서 함께 숨만 쉬어도 좋을 것만 같았다.
그러면…… 우리 세 사람, 함께 있는 거니까.
사라져버린 지난날처럼 그렇게.
“그런 건 기본 상식이오. 어디 가서 지금처럼 물어보지 말고, 머릿속에 기억해 둬요.”
경비병은 재차 혀를 차면서도 왕실 묘역의 위치에 대해 나름대로 자세히 대답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로제는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경비병이 알려준 방향으로 무작정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왕실 묘역 안에 위치한 공관은 모처럼 사람들로 북적였다. 추모식을 앞두고 찾아와 그곳에서 일주일 정도 머무르는 왕족과 귀족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헤이번이 머무르는 별관은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다름 아닌, 그를 찾아와 선왕비와 혼인할 것을 강권하는 귀족들 때문이었다. 그 중심에 워런 포어킨 후작이 있는 건 당연했다.
“벌써 6년째입니다, 대공 전하.”
노귀족은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헤이번을 향해 말을 꺼냈다.
“이렇게 오랫동안 왕좌를 비워둔 적은 왕국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전하. 부디 이제는 선왕비와 혼인하시어 왕위에 오르…….”
“싫다고 이미 여러 번 얘기했을 텐데. 아무래도 후작의 귀에 이상이라도 있나 보군.”
헤이번이 포어킨 후작의 말을 듣다가 차갑게 대꾸했다. 단호한 거부의 뜻이 담긴 대답이었다. 하지만 후작은 그의 냉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듭 말했다.
“이 문제는 대공 전하께서 싫다는 이유로 거부하실 수 없습니다. 괸터스 왕국의 존망이 걸린 문제이기도 한데, 어찌 그렇듯 사사로운 감정으로 무조건 싫다고만 하십니까.”
“사사로운 감정이라…….”
헤이번은 말끝을 늘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차가운 시선으로 후작을 쏘아보았다.
“후작이 내게 그 말을 한 게 두 번째로군. ‘그때’도 지금과 비슷하게 말했던 걸 기억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