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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6화 (6/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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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를 알아보러 온 시골 촌뜨기 아닐까요? 옷차림을 봐도 그렇고, 돈도 없는 걸 보면 딱 그런데.”

“그런데 보아하니 딱히 일자리를 구하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더라고.”

“그래도 매일 꼬박꼬박 나가잖아요?”

“그저께 보니까 대공 저 근처에서 기웃거리고 있던데?”

“대공 저 근처요? 제 주제도 모르고 대공 저 하녀 일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종업원이 주인의 말에 킬킬대며 비웃었다. 그 대화를 듣던 로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들의 대화 속에 등장한 사람이 저라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그녀는 당혹감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단 생각에 계단을 내려갔다.

“얼굴이 예쁘게 생겼으니 조금만 가꾸면 어디 주점 같은 데에서 일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흐음. 그러고 보니 제이콥의 가게에서 여자를 구하는 것 같던데, 슬쩍 얘기나 한번…… 어! 마침 내려오는구먼. 이봐요, 아가씨!”

주인이 수염 난 턱을 만지작거리며 종업원과 대화를 이어가다 말고 계단을 내려온 로제를 발견하고는 손을 번쩍 들었다.

로제는 보지 못한 척 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그를 향해 다가갔다.

“예, 왜 그러시죠?”

“어흠. 혹시 일자리 구하지 않소?”

“아니요, 저는…….”

로제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려 했다. 그러나 여관 주인이 그녀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 거라면 내가 좋은 데 소개해 줄 수 있어서 말이오. 이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가게가 하나 있거든. 내가 보니 아가씨가 예쁘장하게 생겨서 딱 맞을 것 같단 말이지. 일도 어렵지 않아요. 적당히 손님들 상대하면서 술 좀 따라주고, 같이 마셔 주기도 하고.”

“술집인가요?”

로제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주인에게 물었다. 덤덤한 투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그녀가 관심이 있다고 여겼는지 주인이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오. 꽤 장사가 잘 되는 곳이라 아가씨 돈벌이도 짭짤하고 좋을 거요. 제이콥, 그러니까 그 가게 주인이 나랑 친한데 인심도 후해서, 아가씨가 별도로 손님한테 받는 돈은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

“지금 이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할게요.”

로제는 정색하며 주인의 말을 끊었다. 물론 직업의 귀천을 따지자는 건 아니었다. 술집에서 일하는 여인들을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남편과 아이를 둔 자신이 이런 제안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웠다.

그들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지도 못한 채 매일 대공 저 근처를 서성이는 제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던 중이었다. 그런데 여관 주인에게서 이런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자신이 마치 쓰레기 같아서, 그들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 될 오물인 것만 같아서 견디기 힘들었다.

그런 마음에 주인의 말을 딱 잘라 거절했는데, 여관 주인이 듣기에는 기분이 상한 듯했다. 주인은 무안한 듯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로 로제를 쏘아보다가 버럭 화를 냈다.

“아니면 아닌 거지, 뭘 그렇게 도도한 척 행세하는 거야! 돈도 없어서 여기 말고는 투숙할 곳도 없는 계집이!”

“아이고, 주인어른. 참으십시오, 참으세요. 그래도 우리 여관에 투숙 중인 유일한 손님 아닙니까.”

언성을 높이는 주인을 말리기 시작한 건 종업원이었다. 그는 주인을 주방 쪽으로 떠밀며 달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에게서는 계속 폭언이 쏟아졌다.

로제는 저를 향한 폭언을 뒤로한 채 황급히 여관 밖으로 나갔다. 여관 주인에게서 쏟아져 나온 말은 그녀가 상상도 하지 못했을 정도로 험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성적인 모욕까지 포함된 말에, 그녀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다리의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쏴아아.

빗줄기가 더욱 강해져 있었다. 그 바람에 로제의 몸이 비에 금세 젖어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잠시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속눈썹을 타고 빗물이 투둑, 떨어졌다. 로제는 두 손으로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래 봤자 다시 쏟아진 빗물을 맞아 엉망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몇 번이고 반복하여 제 머리를 매만졌다. 흠뻑 젖어 살갗에 달라붙은 옷도 나름대로 단정히 정돈한 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가능성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저번에 헤이번을 우연히 본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만약, 그 기적 같은 일이 한 번 더 일어난다면.

그래서 헤이번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름조차 지어주지 못한 제 아이를 보게 된다면.

비록 초라할지언정 단정한 모습으로 그들을 보고 싶었다.

그렇기에 로제는 손으로 머리를 만지고 빗물에 젖어 엉망이 된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요 며칠 늘 그러했듯이 대공 저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경비병의 시선이 따가웠다. 저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는 터라 그의 표정 또한 사납기 그지없었다. 로제는 어색한 얼굴로 경비병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고는 저택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서 정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무작정 이렇게 기다린다고 헤이번과 아이를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 기대를 품지도 않았고, 그렇게 헛된 꿈을 꿀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날은 하늘이 저를 가련하게 여겼던 걸까.

로제는 운 좋게 거리에서 헤이번을 봤던 날을 회상하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을 바라보던 건조한 시선이 덩달아 떠올랐다.

자신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헤이번.

그 남자는 자신이 이렇게 저택 밖에서 매일 서성이고 있어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서성이다가 어느 날 더 이상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사실 자체를 알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이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더라도.

로제의 눈가가 붉어지려는 순간, 정문이 열렸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제 눈을 손으로 비비고 고개를 들었다.

“아…….”

열린 정문을 통해 나온 이들은 대공 저의 하녀들로 보이는 여자들 몇 명이었다. 로제는 저도 모르게 실망하여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때, 그들이 로제의 앞을 지나쳐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공녀님 이름 말이야. 그거, 들꽃 이름이라면서? 난 플리타란 이름이 들꽃 이름인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대공 전하께서는 어떻게 따님의 이름을 한낱 들꽃을 따서 지으셨을까.”

‘……플리타?’

로제의 눈이 커졌다. 누가 직접 알려준 게 아닌데도 알 수 있었다. 방금 저들의 입에서 언급된 ‘플리타’가 제 아기의 이름이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플리타는, 바로 자신이 지었던 아이의 이름이니까.

‘그런데…… 대공, 헤이번이 아이의 이름을 플리타라고 지었다고?’

로제는 하녀를 붙잡고 다시금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과거의 기억이 예상치 못하게 찾아든 까닭에 현기증마저 일었다.

「우리 아이 이름은 뭐가 좋을까? 로제는 생각해 둔 이름 있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 이름을 벌써 지으려고요?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는데.」

「딸일 거야. 분명히.」

「그걸 어떻게 장담해요?」

「당신 닮은 딸을 꿈에서 봤거든.」

「그게 뭐예요.」

까르르 웃던 제 지난날이 꿈처럼 희미했다. 다정하고 때로는 짓궂던 헤이번의 모습이 이제는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나누었던 대화가 생생히 기억났다. 어떻게 지금껏 잊고 있었나 싶을 만큼.

「음……. 만약 당신의 꿈대로 여자아이가 태어난다면, 플리타란 이름 어때요?」

「플리타?」

「이 꽃 이름이 플리타거든요. 화려하지는 않지만, 생명력이 강해서 겨울이 되어도 쉽게 지지 않는.」

작고 빨간 꽃 한 송이를 꺾어 그의 머리에 꽂아 주었다. 화사한 금발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남자에게 그런 말을 해도 될까 싶었지만, 예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였다.

로제는 눈시울을 붉혔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기억, 못 할 텐데.”

그런데 어떻게 아이의 이름을 플리타로 지었을까.

로제가 그대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 * *

-벌써 사흘이나 지났잖아! 이봐, 설마 죽은 건 아니지? 시체 치우는 건 질색이라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여관 주인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방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로제는 덜덜 떨리는 몸을 가까스로 일으켰다. 그러자 주인이 눈을 부릅뜬 채 그녀를 향해 재차 소리쳤다.

“정신 차렸으면 좀 나와 봐, 아가씨. 할 말이 있으니까.”

“……예.”

로제는 입 안이 바짝 말라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성질 급한 주인이 문을 쾅, 닫고 가버렸다.

어찌나 문을 거세게 닫았는지, 방 안이 전부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아니, 사실은 사흘 내내 앓아누웠던 로제의 몸이 흔들리는 것일 테지만 말이다.

로제는 숨을 몰아쉰 뒤,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바닥을 딛자마자 현기증이 일었다. 사흘 전, 대공 저 앞에서 오랫동안 비를 맞았던 게 원인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복도 쪽에서 심술궂은 표정으로 서 있던 주인이 그녀가 나오는 걸 보자마자 다짜고짜 말을 꺼냈다.

“이제 그만 방 빼고 나가.”

“……예?”

로제는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하여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주인은 그녀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거듭 말했다.

“방 빼고 나가라고. 병 걸린 여자가 묵고 있으면 다른 손님들이 싫어한단 말이야.”

“그렇지만 제가 알기로는 여기, 다른 투숙객이 없는…….”

“아! 있다면 있는 줄 알아! 아가씨가 여기 주인이야? 어? 내가 주인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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