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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5화 (5/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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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을 모셔올까요?”

시녀가 이자벨라의 말뜻을 이해하고 재빨리 물었다. 이자벨라는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되도록 빨리 모셔오너라.”

“예.”

시녀는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이자벨라의 명을 이행하기 위해 침실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문밖에서 먼저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선왕비전하, 더클렌 공작께서 알현을 청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때마침 잘되었구나. 어서 모셔라.”

이자벨라가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시녀가 종종걸음으로 침실 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가 문을 열자마자 건장한 체격의 노귀족이 안으로 들어섰다. 이자벨라의 부친인 테오르반 더클렌 공작이었다.

“선왕비전하를 뵙습니다.”

공작은 딸을 향해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이자벨라 또한 고개를 숙여 그의 인사를 받은 뒤, 서둘러 입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아버지.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보내 아버지를 모셔오라 하려던 중이에요.”

“아, 그러셨습니까.”

공작이 이자벨라의 말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자벨라 또한 다시금 자리로 돌아가 앉은 뒤, 입을 꾹 다물었다. 그사이에 시녀가 다가와 테이블 위에 다과를 차리고 서너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나가보도록 해.”

이자벨라는 시녀가 물러서자마자 손을 내저었다. 시녀는 그녀의 명에 재빨리 침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단둘이 남고 나서야 공작이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왜 표정이 안 좋은 것이냐.”

공작의 말투가 편하게 바뀌었다. 보는 이도 듣는 이도 없으니 당연했다.

“대공 저에 다녀왔다지? 또 푸대접을 받고 쫓겨난 모양이구나.”

“쫓겨나긴, 누가 쫓겨났다고 그러세요!”

“흠……. 그럼 쫓겨난 건 아니라 하고, 푸대접을 받은 건 맞나 보구나?”

공작이 피식거리며 딸을 향해 물었다. 이자벨라가 발끈하여 다시 한번 그의 말을 반박하려는 순간, 공작의 금색 눈동자가 깊이 침잠하듯 어두워졌다.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도 왜 굳이 대공이어야 하느냐.”

“…….”

“시간이 흐르면 헤이번 괸터스, 그자의 마음이 네게 향할 것이라 믿는 게냐. 왕위에 올리고 나면 그자가 너를 아내로 대접할 것 같으냐. 지금껏 외면당하고도 아직까지 그런 헛된 기대를 품고 있는 게야? 어리석구나, 이자벨라.”

공작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한편으로는 분노를 품고 있었다. 자신의 딸이 일방적으로 그에게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에 화를 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자벨라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잠시 가라앉혔던 분한 마음이 다시금 올라와 눈물이 나왔다. 그녀의 눈이 어느새 붉어진 걸 본 공작이 혀를 찬 뒤, 재차 말을 이었다.

“왕실에 사내는 많다. 네가 선택해주기를 갈망하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혀를 끌끌 차며 타박조로 말하는 공작을 향해 이자벨라가 분기를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말씀 마세요! 그런 별 볼 일 없는 어중이떠중이와 다시 혼인하려고 리비어스를 죽인 게 아니…….”

“쉿! 입 다물지 못하겠느냐!”

공작이 황급히 큰소리를 쳐서 이자벨라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자벨라는 제 아비가 바깥의 기척을 확인하고 돌아올 때까지 입술을 앙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찌 이리도 경솔하게 구는 것이냐! 지금 네가 한 얘기를 누가 듣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바깥에 아무도 듣는 이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돌아온 공작이 날카롭게 그녀를 나무랐다. 이번만큼은 이자벨라로서도 대꾸할 말이 없어 침묵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이 방금 꺼낸 얘기는 실수로라도 결코 입 밖으로 내뱉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리비어스 괸터스.

그녀의 남편이자 선왕이었던 남자.

그가 죽은 건 전적으로 불행한 ‘사고’여야 하니까.

“……죄송해요. 속상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실언을 했어요.”

이자벨라가 한참 입을 다물고 있다가 뒤늦게 변명조로 말을 꺼냈다. 공작이 눈을 치뜨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대공이 또 네게 무슨 무례를 저질렀느냐?”

“늘 그랬듯이 뭐, 그렇죠. 게다가 오늘은 플리타, 그 계집애가 끼어들어서.”

이자벨라는 헤이번이 저를 냉대한 이유를 그의 어린 딸, 플리타에게서 찾았다.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며 눈앞에 얼쩡거리니, 아비된 입장에서 헤이번이 딸한테 신경 쓰느라 더욱 제게 무심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저 좋을 대로 플리타를 탓했다. 자신이 제멋대로 주인 없는 저택에 방문하는 무례를 저질렀다는 것은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또한 플리타가 ‘얼쩡거리는’ 건 고사하고 되레 저를 보고 잔뜩 겁먹어 유모의 치맛자락을 잡고 숨어 있었다는 사실도 무시해버렸다.

“그때, 그 애를 데려오는 게 아니었어요. 어차피 헤이번이 기억하지도 못할 아이였잖아요. 그러니 그냥 그 여자랑 애를 한꺼번에 죽였어야 깔끔했을 텐데…….”

이자벨라가 탄식하듯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 그러자 공작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너도 알다시피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에 함께 갔던 왕실 사람들, 특히 포어킨 후작이 함께 갔으니 어찌 그의 눈을 속이고 일을 처리할 수 있었겠느냐. 지금이야 네가 선왕비의 지위에 있으니 우리와 함께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본래 왕실에 충성하는 자이니.”

워런 포어킨 후작. 왕실에 대한 그의 충성심은 광적이라 표현해도 될 정도였다. 본인 가문의 안위보다도 왕실의 안위를 우선시하고, 왕실의 핏줄에 애착을 넘어 지독한 집착마저 보이는 자이니 말이다.

그런 그가 헤이번의 ‘핏줄’을 보았으니 어떠했겠는가. 아무리 그 피의 절반이 비천한 평민 여인의 것이라 할지라도, 그런 건 포어킨 후작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머지 절반의 피. 왕가의 피만이 중요할 뿐.

그런 사람의 앞에서 헤이번의 자식을 죽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아이를 낳은 여인을 처리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하지만 굳이 천한 것의 목숨을 거두느라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었다. 아이를 두고 적당히 협박을 한 것만으로도 여인은 새파랗게 질려 덜덜 떨지 않았던가.

공작은 당시의 기억을 가볍게 털어낸 뒤, 다시 이자벨라에게 주의를 주었다.

“여하튼 항상 조심해야 한다, 이자벨라. 선왕에 대한 말은 아예 입 밖으로 꺼내지도 말고. 아니, 애당초 그런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던 거다. 그저 선왕에게 일어난, 불운한 ‘사고’야. 그 점을 명심해라.”

“예.”

이자벨라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런 딸을 바라보던 공작이 다시금 나직하게 혀를 찼다.

‘왕비 자리에 올려 주었으면 그 정도에서 만족할 것이지.’

헤이번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걸 아내를 통해 들은 바 있었다. 하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제 딸이 품고 있는 야망이 웬만한 사람의 것보다 훨씬 크다는 걸 모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 그녀에게 왕비 자리보다 더한 것은 없을 거라 여겼다. 제 생각대로 왕비가 되라는 명에 이자벨라는 순순히 따르기도 했고.

그러나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자신의 딸이 품은 야심과 욕심이 제 예상보다 더 지독하리라는 것을.

그래서 왕비의 자리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남자까지도 모조리 가져야 직성이 풀리리라는 것을.

선왕을 사고사로 위장하여 죽이려는 딸의 계략을 미리 알아차린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충동적이고 가벼운 그녀가 직접 실행에 옮겼더라면 분명 어딘가에 증거를 흘렸을 테니까.

그나마 공작이 끼어들어 ‘완벽하게’ 사고사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 선왕의 동생인 대공마저도.

‘하긴, 아주 나쁜 상황은 아니야. 오히려 기회라 할 수도 있지.’

공작은 제 형보다 더 명민하고 강했던 헤이번 괸터스를 떠올렸다. 이자벨라를 왕비로 올리면서도 은근히 걸렸던 존재가 바로 대공이었다. 왕보다 더 왕 같은 그의 존재가 꺼림칙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니 차라리 같은 편이 되는 게 나을 수도 있어.’

그를 왕위에 올리고 이자벨라가 법에 따라 다시 왕비가 되기만 한다면, 이자벨라가 그의 마음속에 파고들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결말일 터였다.

공작은 생각을 정리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대공을 다시 한번 압박해 보도록 하마. 그렇지 않아도 선왕의 6주기 추모식이 곧 있을 테니, 그때 대공에게 혼인 이야기를 꺼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포어킨 후작도 슬쩍 움직여 보고.”

“정말이지요? 부디 그렇게 해 주세요, 아버지.”

이자벨라가 반색하며 눈을 빛냈다. 죽은 남편의 추모식이 다가온다는 것은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 * *

찍찍찍.

로제는 쥐의 울음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작은 생쥐가 빵 조각을 물고 후다닥 달아나는 게 보였다.

“아…….”

침대 위에 놔두었던 검은 빵을 물고 가버린 모양이다. 빵이 워낙 딱딱해서 물을 적셔 놓고 기다리다가 쥐한테 빼앗기고 만 것이다.

“……그냥 굶어야겠네.”

로제는 오늘의 아침 식사 겸 점심 식사였던 빵을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저 대신 다른 녀석이라도 배부르게 먹는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녀는 허기진 배를 채울 겸 물을 마시고 방 밖으로 나갔다. 비가 내려 습한 탓인지 퀴퀴한 냄새가 복도에 가득 차 있었다.

로제가 머무르고 있는 여관은 ‘여관’이라 부르는 게 민망할 정도로 모든 게 엉망이었다.

하지만 돈이 넉넉하지 않은 그녀에게는 적당한, 아니, 분에 넘치는 곳이었다.

로제가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데 1층에서 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계단 중간쯤에 멈춰 서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요 며칠 여관에 묵으면서 그녀는 매일 식사를 주문하는 대신, 딱딱한 검은 빵을 사다가 물과 함께 먹는 것으로 끼니를 대신하는 중이었다. 그러니 여관 주인 입장에서는 그런 그녀가 못마땅한 게 당연했다. 숙박비 외에 머무르는 이들의 식비가 여관의 주된 수입원이니 말이다.

그러나 매일 식사를 챙겨 먹을 정도로 그녀는 여유롭지 않았기에, 주인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매번 나갔다가 들어올 때 빵을 사 가지고 올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로제는 주인을 마주하는 게 난처하여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내쉬고 다시 계단을 내려가려 했다.

바로 그때, 주인과 대화를 나누던 종업원의 목소리가 조금 더 또렷하게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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