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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그러운 연녹색 눈동자와 헤이번을 닮아 눈부신 금색 단발머리의 귀여운 꼬마. 하지만 고작 다섯 살에 불과한 아이의 얼굴에는 언제나 그늘이 져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플리타는 잔뜩 겁을 먹은 표정으로 눈만 깜빡이며 헤이번을 쳐다볼 뿐이었다.
아빠, 하고 달려와 안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애교를 부리거나 칭얼거리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그리고 그건 헤이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제 어린 딸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하다못해 아팠다면서 이제 몸은 좀 괜찮으냐고, 그렇게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어색해하고 서먹하게 느낄 뿐이었다. 부녀 사이의 거리감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는데, 이자벨라가 재차 끼어들었다.
“플리타가 아팠어요? 어머, 진작 알았으면 왕궁의라도 데려오는 건데 그랬네요. 플리타, 많이 아팠니? 그러고 보니 네 얼굴이 해쓱하구나.”
이자벨라의 목소리는 상냥했다. 하지만 플리타를 바라보는 이자벨라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아이는 그런 이자벨라를 보고 더욱 겁을 먹어 유모의 뒤로 숨어버렸다.
이자벨라가 아이의 행동에 더욱 차가운 표정을 지었지만, 곧바로 눈웃음을 지으며 헤이번을 돌아보았다.
“플리타가 저를 많이 어색해하네요. 자주 와서 친해져야겠어요, 헤이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헤이번이 건조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곧바로 거부했다. 그러고는 덧붙이듯 말을 이었다.
“또한 오늘처럼 이렇게 연락도 없이 오시는 건 자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집주인에게 미리 연락도 없이, 게다가 주인이 자리를 비운 와중에 이렇게 머무르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헤, 헤이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이자벨라는 헤이번의 말에 표정을 굳혔다가 이내 눈물을 글썽였다.
“물론 제 행동이 다소 예의에 어긋났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만큼 당신과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왜 몰라주는 거예요?”
“…….”
“제가 지금 헤이번, 당신 말고 누구를 의지할 수 있겠어요. 리비어스, 아니, 선왕 폐하께서 그렇듯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뒤에 제가 얼마나 홀로 외롭고 두려운지 안다면 당신이 이렇게 매몰찬 말을 할 수는 없을 거예요.”
이자벨라는 울먹이며 말을 잇다가 손수건을 꺼내 눈물로 젖은 뺨을 닦았다. 그 모습이 자못 처연하고 애처로워 보였다. 그렇지만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헤이번의 시선은 여전히 서늘하고 무심했다. 오히려 그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리기까지 했다.
“……선왕비께서 그렇게 형님을 의지하셨는지 몰랐군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분만을 믿고 왕성에 들어갔던 것인데.”
“그런데 형님의 몸이 채 식기도 전에 결혼 얘기를 꺼내셨지요.”
“그, 그건!”
이자벨라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당황한 속내를 내보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 모습을 보며 조소하던 헤이번이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때까지 그와 이자벨라를 번갈아 쳐다보던 플리타와 눈이 마주쳤다.
확실히 감기를 앓아서 그런지 평소보다 초췌한 모습이었다. 혈색 좋던 뺨도 파리해졌고. 헤이번은 아이의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 겉으로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기에 그는 자식에게조차 무심하다는 평을 듣고는 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플리타에게 무심했던 적은 없었다.
자신의 ‘아이’이니까.
아이에 대해서도 기억나는 건 없지만, 그래도 자신의 핏줄을 무심히 방치할 정도로 책임감이 없는 건 아니다. 헤이번은 이자벨라가 다시 말을 걸려는 것을 무시하며 플리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몸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고 들었다. 열도 내렸고.”
“…….”
플리타는 유모의 치맛자락을 꽉 움켜쥔 채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유모가 흠칫하며 플리타를 내려다보더니 다소 엄한 투로 아이를 불렀다.
“공녀님, 전하께서 물으실 때는 공손히 소리 내어 대답하셔야지요.”
“……우웅.”
플리타가 유모의 타박에 더욱 겁먹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는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공녀님.”
그런 아이의 행동에 헤이번이 화라도 낼까 두려운 듯 유모가 제 치맛자락을 잡은 아이의 작은 손을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헤이번이 입을 열었다.
“다행이구나.”
그는 플리타의 태도를 나무라지 않았다. 솔직히 아이가 뭘 잘못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직 어린아이에게 너무 과한 것을 바라는 게 아닌가. 그저 아이는 아이일 뿐인데.
하지만 헤이번은 제 속내를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저 건조한 어조로 간단히 대꾸했을 뿐.
그런데 그게 플리타에게는 조금 힘이 되었는지, 아이가 연녹색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예에.”
플리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더니 냉큼 유모의 치마에 제 얼굴을 묻어버렸다. 뭔가 큰일을 한 것처럼 아이의 작은 몸이 들썩거렸다.
“오늘은 이만 가겠어요.”
헤이번이 플리타를 가만히 보고 있자 이자벨라가 이를 악물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하지만 헤이번은 그녀를 만류한다거나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아이의 유모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이를 데리고 올라가도록.”
“예, 대공 전하.”
유모가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숨죽이고 있다가 그제야 말하는 법을 허락받은 사람처럼 대답했다. 그러고는 플리타를 데리고 아이의 방이 있는 위층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신경질적으로 돌아서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 발소리의 주인이 선왕비라는 걸 굳이 고개 돌려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냉소를 지으며 집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문득 떠오른 누군가의 모습에 그대로 멈춰 섰다.
“전하?”
집사가 의아한 투로 묻는데도 불구하고 헤이번은 미간을 좁힌 채 누군가를 생각하다가 고개를 돌려 계단을 쳐다보았다. 유모의 품에 안겨 계단을 올라가는 아이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플리타의 눈동자 색은 자신과 닮지 않았다. 같은 금발이라는 점에서는 저와 닮았지만, 눈은 어미 쪽을 닮은 모양이었다.
연녹색 눈.
하지만 아이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이를 낳은 여자에 대해서도 기억나는 건 전혀 없었다.
헤이번이 기억하는 건 자신이 깨어났을 때 어느 마차 안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마차가 달리고 있는 길이 왕성에서 멀리 떨어진 국경 지대의 어느 외진 길이었다는 게 전부였다. 또한 그때, 제 아이라는 갓난아기의 존재도 처음 마주했다.
“…….”
아이의 태생에 대해 의심한 건 아니다. 마차를 타고 동행한 이들 대다수가 선왕비의 가문인 더클렌 공작가의 사람들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분명 있었으니 말이다.
선왕비에게 속해 있으나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자들. 그들은 분명 아기의 존재를 떨떠름하게 여기면서도 그 어린 생명을 지키고자 했다. 왕실의 핏줄이 아니라면 결코 보일 법한 태도가 아니었다.
게다가 눈동자 색 외에는 자라면서 점점 더 저를 닮아가는 아이의 얼굴도 그 증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왜…….
‘왜 그 여자의 눈이 떠오른 거지?’
헤이번은 아까 마주쳤던 여인을 다시 떠올렸다. 거지나 다름없던 여인. 병색이 완연하여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던, 비천한 여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 고개를 들고 저를 빤히 바라보던 그 여인의 녹색 눈이 플리타의 눈과 너무나 닮았단 생각이 들었다.
“미쳤군.”
헤이번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중얼거린 뒤, 고개를 저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 * *
“감히! 나한테 그런 식으로 굴다니!”
이자벨라는 왕성 안, 본인의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신경질적으로 장갑을 벗어 내던졌다.
“선왕비전하…… 앗!”
그녀의 시중을 들기 위해 다가가던 시녀가 날아든 장갑을 피하지 못하고 얻어맞았다.
장갑에 달린 보석에 뺨이 찢긴 것인지 금세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시녀는 피를 닦을 새도 없이 이자벨라의 화를 받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시어요, 선왕비전하.”
“말끝마다 선왕비, 선왕비! 누구더러 선왕비라는 거야! 내가, 이 이자벨라 괸터스가 벌써 그런 취급을 받으며 물러나야 한다는 뜻이야?”
“아닙니다! 결코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니에요, 전하!”
시녀는 파르르 떨며 언성을 높이는 이자벨라의 앞에 넙죽 엎드렸다. 그 바람에 카펫의 먼지가 드레스를 더럽혔지만,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죄송해요. 제가 아둔하여 선, 아니, 왕비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혔습니다.”
시녀는 저도 모르게 또 튀어나오려던 ‘선왕비’의 호칭에 혀끝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이마가 닿을 정도로 고개를 조아린 채 거듭 사죄했다.
남작의 딸로 태어난 시녀의 신분으로 볼 때, 그녀가 이렇듯 엎드려 고개까지 조아릴 이유는 없었다. ‘시녀’는 귀족 저의 하녀와는 전혀 다른 존재이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왕비라 할지라도 시녀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자벨라가 시녀를 대하는 태도는, 공작 저에서 하녀를 대하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만큼 더클렌 공작가의 위세가 강하다는 뜻이기도 했고, 또한 그녀의 성격이 사려 깊지 못하고 충동적이며 오만하다는 걸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후우…….”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나서야 화를 조금 가라앉힌 이자벨라가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시녀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가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피가 떨어졌잖니. 더럽게.”
“……죄, 죄송합니다.”
시녀는 피로 범벅이 된 뺨을 닦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시녀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던 이자벨라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더클렌 가에 사람을 보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