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하지 마세요-3화 (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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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인데요. 천사로 봐 주다니.”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 건 그 뒤의 일이었다. 그는 한참 웃다가 간신히 진정한 듯 다시금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목소리에서는 웃음기가 묻어있어,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괜히 고개만 흔들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천사는 아니고 그냥 지나가는 여행객입니다. 아! ‘마을’ 출신도 아니고요.”

남자는 조금 전 로제가 건넨 질문에 대한 대답까지 덧붙였다. 그렇게 자신과 대화를 하려는 사람을 무시하는 건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로제는 창피한 마음을 무릅쓰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

만약 몸을 일으켰더라면 한 번 더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로제는 자신이 주저앉아 있어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바로 제 앞에 쪼그려 앉아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언제부터 앉아 있었던 거지?’

그녀는 그와 가까이서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게 어쩐지 부끄러워 슬금슬금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자 남자 역시 두 다리를 펴고 일어서더니 로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혼자 일어날 수 있는데.’

로제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남자가 내민 손을 잡았다. 물론 멋쩍은 마음에 그의 손가락 끝만 살짝 잡았지만.

“고, 고맙습니다.”

로제는 남자의 손을 잡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황급히 그에게서 손을 빼낸 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여전히 그녀의 머리 위에 있던 약초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내 약초!”

그녀는 그제야 제 약초 바구니 생각이 나서 황급히 몸을 돌렸다. 남자 역시 로제를 따라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아…….”

“루크, 안 돼!”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로제보다 먼저 움직인 건 남자였다. 그는 황급히 자신의 말을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말은 제 주인이 다가오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엎어진 바구니 주변에서 약초만 열심히 골라 먹었다.

“루크! 이 녀석! 이걸 다 먹어치우면 어떡해! 아침에 여관에서 나올 때 여물도 많이 먹었으면서…….”

남자는 말을 나무라며 로제를 힐끔 돌아보았다. 난감하고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푸훗!”

그 모습에 로제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천사처럼 고고할 것 같은 남자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재미있었다. 그리고 왜 그런지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남자의 이름이 헤이번이라는 걸 알게 된 건, 그 뒤의 일이었다.

* * *

정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대공 저의 고용인들 모두가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정문 안쪽에 일렬로 서서 그를 기다렸다. 하지만 헤이번은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돌연 말을 멈춰 세웠다. 그러고는 말머리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시는지요, 대공 전하.”

그의 호위를 담당하는 기사, 페드윈이 다가와 정중히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네.”

헤이번은 페드윈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은 뒤,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늘 그랬듯 무심하고 서늘한 표정이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평소와 달리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바로 한 여인 때문이었다.

조금 전, 거리에서 보았던 여인이 그의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고 있는 탓이었다.

황당한 일이었다. 누가 들으면 헛웃음을 지으며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 다가와 교태를 부리고 그의 관심을 받아보려 해도 시선 한 번 준 적 없던 사내가 바로 헤이번 괸터스였다.

괸터스 왕국의 가장 고귀한 핏줄.

죽은 선왕의 아우이자 현재 대공의 지위에 있는 자.

비어 있는 왕좌에 앉을, 가장 유력한 후보라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사내.

그런데 그런 사내가 한낱 평민 여자를 머릿속에서 떨쳐내지 못하고 계속 생각하고 있다니. 어느 누가 그 이야기를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헤이번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여인을 다시금 떠올렸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여인이었다. 낡은 옷은 먼지투성이였고, 헝클어진 머리와 얼굴 역시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동냥을 하는 거지라 해도 될 법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 초라한 모습보다 그의 기억에 선명히 남은 건, 자신을 바라보던 여인의 녹색 눈이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만 같던.

고생을 많이 한 건지 여인의 눈은 퀭한 상태였다. 눈 밑의 그늘도 짙게 드리웠고, 안색 또한 창백하여 병색이 완연해 있음을 짐작하게 했다.

자신과는 정반대의 사람.

‘비천한 자리에서 살아온 게 분명한 여인인데, 왜…….’

헤이번은 문득 가슴속이 지끈거려 미간을 좁혔다. 그 비루한 몰골의 여인에게 연민이라도 느낀 것일까.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아무리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는 수도라 할지라도 그 와중에도 어딘가에는 그늘이 드리워지기 마련이었다. 그런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둘이겠는가. 그러나 헤이번은 그런 이들에게 동정심을 품은 적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헤이번은 점점 더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애써 털어내며 말 아래로 내려섰다. 그러자 마사의 관리인이 냉큼 다가왔다.

“녀석의 발굽 상태가 약간 좋지 않은 듯하더군. 각별히 신경 써서 살피도록 해라. 편자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그 점도 확인하도록 하고.”

“예, 전하.”

관리인은 고개를 조아리며 말의 고삐를 잡았다. 그러고는 말을 데리고 마사로 향하려는 순간, 헤이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잠깐만.”

“예?”

헤이번의 말에 관리인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헤이번은 미간을 찌푸리며 뭔가를 더듬어 생각해 보다가 질문을 건넸다.

“루크는…… 루크는 어디 있지?”

“……예? 루, 루크요?”

“그래, 루크. 그러고 보니 내가 어떻게 그 녀석을 잊고 있었지? 분명 그 녀석과 함께 여행을 떠났었는데.”

헤이번은 기가 막힌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릴 적부터 함께한 애마였다. 고용인들이 경악하여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직접 마른 풀을 먹이고 씻길 정도로 아끼던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지금껏 잊고 살았던 것이다.

아무리 제 기억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푸르릉.

귓가에 루크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니, 웃음소리라고 하는 편이 정확할까. 짐승이면서도 눈치가 빠르고 영악한 편이라 녀석은 종종 짓궂게 굴 때가 있었다.

아마 그때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장난기가 발동해서. 그래서 그녀의 바구니에 불쑥 고개를 들이미…….

그 순간, 둔기로 내려치는 듯한 두통이 일었다. 헤이번이 자신도 모르게 비틀거렸다. 갑작스러운 그의 움직임에 깜짝 놀란 페드윈이 다가왔다.

“대공 전하, 괜찮으십니까! 주치의를 부를…….”

“부를 것 없네. 소란 피울 필요 없어.”

헤이번은 큰 소리로 주치의를 부르려던 제 호위 기사를 저지시킨 뒤, 마사의 관리인에게 다시금 물었다.

“루크는 어디에 있지?”

“루크는…….”

관리인이 눈을 굴리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크는 죽었습니다, 전하.”

“……죽었다고?”

헤이번이 집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집사는 공손히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린 뒤,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사고’를 당하셨을 때, 함께 돌아오지 않았으니까요.”

충성스러운 말이었다. 살아 있었더라면 제 주인을 따라 분명 돌아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으니 죽은 게 아니겠는가. 집사의 추측은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당시의 기억 자체가 없는 헤이번으로서는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시 자신을 데려온 자들 대부분이 선왕비의 사람들이었으니까.

“……알겠네, 야닉.”

그러니 이제 와서 그들에게 ‘당시 내 말을 보지 못했느냐’며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헤이번은 찝찝한 속내를 애써 덮으며 저택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그가 저택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집사와 고용인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헤이번, 이제 왔군요!”

헤이번이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맞은편에서 여인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집사에게서 이런저런 보고를 전해 듣다 말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집사가 난감한 어조로 작게 보고했다.

“선왕비전하께서 오셨습니다.”

“……그렇군.”

헤이번의 낯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그는 시리도록 푸른 눈으로 저를 향해 다가오는 선왕비, 이자벨라 괸터스를 바라보았다.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한 붉은 머리.

그녀의 본래 가문인 더클렌 공작가 특유의 금색 눈동자.

그리고 진하다 싶을 정도로 새하얗게 칠한 얼굴.

왕국의 귀족들 대다수가 아름답다고 찬양하는 여인이 화사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더니 새가 지저귀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얼마나 기다렸는데.”

“선왕비께서 방문하신다는 연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미리 연락을 주셨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헤이번은 건조한 투로 이자벨라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이자벨라가 사르르 녹아내릴 듯 눈웃음을 지으며 재차 말을 이었다.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그랬죠. 우리가 뭐, 굳이 격식을 차려 방문 연락을 하고 그래야 하나요?”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지켜야 할 법도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자벨라가 웃으며 건넨 말에도 불구하고 헤이번은 옅은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되레 무안을 주듯 냉정한 태도로 그녀의 말에 대꾸할 뿐이었다. 그 태도에 이자벨라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었지만, 그녀는 곧바로 웃음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려고 했다.

“저기, 헤이번, 오늘 저녁에 같이 연극…….”

“야닉, 플리타는 좀 어떤가? 어제 감기 기운이 있다고 들었는데.”

헤이번은 이자벨라가 말을 건넬 틈을 주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리고는 집사에게 물었다. 집사가 선왕비와 제 주인 사이에서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예, 다행히 열도 내리시고, 몸 상태도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전하께서 돌아오셨다 하니 인사를 드리겠다고…… 아! 저기 계시는군요.”

집사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헤이번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 유모와 그녀의 뒤에 숨어 그를 훔쳐보는 아이가 있었다.

플리타.

바로 헤이번, 자신의 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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