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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함께 사내의 굵은 목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한 무리의 말이 점점 다가오는지 땅이 울리며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조금 전 지나갔던 마차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소리였다.
사내의 목소리에 맞추어 사람들이 저마다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엎드리거나 허리를 숙였다. 아마도 신분에 따라 대공을 향한 예법이 다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자신도 마땅히 바닥에 엎드려야 할 터였다.
그러나 로제는 머리로만 생각할 뿐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되레 가장 선두에 서서 다가오는 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말 위에 탄 남자를 보았다고 해야 할 테지만.
……헤이번, 그 남자였다.
숨이 턱, 하고 막혔다. 그를 보고 싶어서 떠나온 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금방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와 자신 사이의 거리가 너무나 까마득하기에, 그저 그를 멀리서라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순간, 그를 보게 된 것이다. 이제 막 수도에 도착했을 뿐인데.
그러니 기뻐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걸까. 왜,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아플까.
로제의 녹색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눈 한 번 깜빡거리지 못한 채 빤히 그를 볼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대공에 대한 예를 갖춘 자리에서 홀로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어서였을까.
대공의 행차를 호위하던 기사 중 하나가 말을 몰고 로제를 향해 다가왔다.
“감히 대공 전하의 앞에서 이런 무례를!”
기사는 노한 기색을 드러내며 곧바로 채찍을 휘두르려 했다. 채찍의 굵기가 웬만한 사내의 손가락과 비슷했다. 그래서 그것에 맞으면 살갗이 찢어지고 크게 상처 입으리란 걸 누구나 예상했다.
“어머나!”
누군가가 힐끔거리다가 그 상황을 보고는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로제는 채찍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온몸의 감각이 전부 헤이번에게 집중된 탓에.
말 위에 앉아 무심한 눈으로 저를 보는 그에게서 좀처럼 시선을 뗄 수가 없어서.
굵은 채찍이 로제의 몸 위로 날아들려는 찰나, 그 상황을 바라보던 헤이번의 입이 열렸다.
“페드윈 경, 멈추게.”
“예!”
헤이번의 말 한 마디에 기사가 채찍을 거두었다. 하지만 채찍이 워낙 가까이 날아들었던 탓에 그 끝이 로제의 손목을 스쳤다.
“……!”
로제는 저도 모르게 다른 손으로 그 손목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제 상처를 살피는 대신, 시선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헤이번 역시 로제의 손목을 보다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늘한 시선이 그녀를 훑고 지나갔다. 그는 말고삐를 잡고 그녀의 앞을 스쳐 지나가며 방금 자신이 저지시킨 기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수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인인 것 같군. 그러니 나를 알지도 못할 테고, 수도의 예법에 대해 아는 바도 없을 터. 그런 이를 무지하다는 이유로 벌할 필요까지 있겠나.”
“명심하겠습니다!”
기사는 헤이번의 말에 복종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잠시 멈추었던 행렬 역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대공 전하께서는 너그럽기도 하시지. 저런 여자한테까지 자비를 베푸시다니.”
대공 일행이 그 자리를 떠난 뒤, 사람들이 다시 몸을 일으키고 허리를 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로제를 힐끔거리며 속닥거렸다.
저를 향한 손가락질과 수군거림에도 불구하고 로제는 가만히 서서 헤이번이 사라진 방향만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나를 정말 잊었군요.’
그때 그 차를 마신 뒤에 의식을 잃은 헤이번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왕실에서 나온 사람들은 그를 마차에 태워 떠났다. 그리고 자신은 차라리 잘되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비겁하게 그를 등지고 외면했다.
하지만 사실은 저를 알아보지 못하는 헤이번을 마주하는 게 두려웠다. 기억을 잃은 그가 자신을 낯선 눈으로 보게 될까 겁이 나서, 그래서 그가 떠나는 모습조차 보지 못했다.
응애응애, 울어대는 아기조차 외면하고 집 안에 틀어박혀 마차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 남게 된 것이 5년 전의 일이었다.
“……그래도 당신, 여전히 다정하네요.”
로제는 울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창백한 얼굴이 더욱 해쓱해졌다.
그를 처음 보았던 날, 붉게 물들었던 얼굴과는 다르게.
* * *
가끔 운이 좋은 날이 있었다. 적어도 로제는 그와 만난 날을 바로 그런 날이라고 생각했다.
“이 정도 약초면, 한동안 먹을 것 때문에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겠지?”
로제가 안고 있던 바구니를 내려다보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요 며칠 마을 뒷산에 올라 사람의 발길이 뜸했던 곳만 골라서 돌아다닌 보람이 있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해야겠어. 외진 곳으로 다니는 게 조금 무섭기는 하지만.”
사람이 쉽게 다닐 수 있는 산길은 그만큼 약초를 캐는 사람도 많은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많이, 그리고 양질의 약초를 캐려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을 가는 편이 좋았다. 물론 예전부터 그것을 알면서도 무서워서 지금껏 가지 못했었지만 말이다.
“한번 해 봤으니까, 두 번, 세 번도 할 수 있어. 응!”
그녀는 제 자신에게 용기를 불어넣으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로제는 가득 찬 바구니를 흡족한 눈으로 보다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갈색 말 한 마리가 제 주인을 태운 채 느긋하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누구지? 여기는 마을 사람들 말고는 오지 않는 곳인데.”
로제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길과 이어지는 곳은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뿐이었다. 여행객들의 발길도 닿지 않을 정도로 작고 외진 곳. 그렇기에 이 길을 통해 외부로 나올 때마다 어느 누구와도 마주친 적 없었다.
“……나처럼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사람인가.”
그녀는 무심코 중얼거리다가 눈을 찡그렸다. 그런 거라면 충분히 이해가 됐다. 어디가 어디인지 모른 채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다 보면 이렇게 외진 곳까지 올 수도 있는 법이니 말이다.
“그래도 말은 해 줘야지. 이 길 따라서 가 봤자 별것 없다고.”
로제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에 들어가 봤자 환영받지도 못할 테니, 저 낯선 방랑객에게 미리 말을 해 주는 게 낫겠단 판단이 섰다.
뭐, 저 같은 경우에는 더 이상 어디로도 갈 힘이 없어서 마을 사람들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눈 딱 감고 눌러앉았지만.
“저기요!”
로제는 자신과 방랑객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목소리를 조금 높여 말을 건넸다. 그러자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말 위에 앉아 비스듬히 몸을 맡긴 채 흔들흔들 다가오던 사람이 쓰고 있던 모자를 슬쩍 들어 올리는 게 보였다.
“어디 가시는 길이에요? 이 길 따라서 가면 마을 하나밖에 없는데. 혹시 그 마을 출신인가요?”
로제가 바구니를 옆구리에 낀 채 발걸음을 재촉해 말 근처로 다가가며 물었다. 그러고는 상대방의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빠르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돌아가는 게 좋을 거예요. 여기는 국경 지대라서 별로 볼 것도 없고. 작은 마을 하나만 있는…… 으앗!”
“히이잉!”
“꺄악!”
가까이 다가온 말이 약초 냄새를 맡았는지 코를 실룩이다가 냅다 바구니 안으로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와 동시에 로제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다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 바람에 약초를 수북하게 담았던 바구니가 허공을 날았다.
툭. 투둑.
바구니에 담겼던 약초가 로제의 구불구불한 다갈색 머리 위에 떨어졌다. 그나마 약초를 꼼꼼히 손질해 놓은 터라 흙먼지가 떨어지지는 않았다.
“어…….”
하지만 로제는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였다.
“괜찮아요? 미안합니다. 이 녀석이 호기심이 좀 많은 편이라…….”
바로 그때, 그녀의 머리 위에 다정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로제가 무심코 그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말을 타고 있던 남자가 어느새 내려와 로제의 앞에 다가와 선 것이다.
우와아.
그녀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바람결에 흔들린 남자의 금색 머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린 것이다.
“음, 저기…… 아가씨?”
로제가 계속 멍한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자 남자가 난감한 듯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우와, 눈을 찡그렸는데도 예쁘다.
로제는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을 닮은 남자의 푸른 눈을 빤히 보며 거듭 감탄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살아온 터라 다양한 사람을 많이 봤지만, 이렇게 예쁘게 생긴 사람은 처음이었다. 더구나 여자도 아닌 남자의 얼굴이 이렇게 아름답다니 말이다.
언젠가 천사를 그렸다던 그림을 멀리서 훔쳐본 적이 있는데, 그 그림에 등장한 천사보다도 눈앞의 남자가 더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로제가 멍하니 그를 보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까닭은.
“……천사?”
“응? 뭐라고요?”
남자가 로제의 물음에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로제는 제 입에서 나온 말을 자각했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것과 거의 동시에 남자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
‘으아, 어쩌자고 그런 말을.’
로제는 민망한 마음에 양손으로 제 머리를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어린애도 하지 않을 말이었다. 세상에, 천사냐고 묻다니. 맙소사. 그녀는 얼굴이 홧홧해져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로제를 놀리는 건지 말이 푸르릉, 하며 웃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