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기억하지 마세요
프롤로그
“……1년, 이라고요?”
로제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 나가 하얗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그러나 로제의 그런 반응과 달리 그녀를 진료한, 마을의 치료사인 늙은 사내는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운 좋으면 1년, 하고도 조금 더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뭐, 그래 봤자 2년은 넘기지 못하겠어.”
그녀의 삶이 1년 남짓 남았다고 선고하는 목소리라 하기에는 너무나 무심하고 건조했다. 로제를 가련하게 여기는 투도 아니었다. 그저, 사실이 그러하다고 말하는 것에 불과했다.
오늘 날씨가 맑았군. 혹은 흐렸군. 비가 내리는군. 그렇게 날씨 이야기를 해도 이보다는 감정을 담아 말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하지만 그가 특별히 불친절한 사람은 아니었다. 로제를 대하는 마을 사람들 누구나 그랬으니까.
외지인에 대한 경계심이 강하고 배척하는 경향이 강한 마을이었다. 그래서 로제가 이 마을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누구 하나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았고, 다정한 인사말 한 번 건넨 적이 없었다.
사랑하는 남자와 아기를 한꺼번에 잃은 뒤에 몸도 가누지 못하고 오열하던 그녀를 보면서도, 위로의 말 한 마디 건넨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약초 보는 눈이 좋아서 쓸모가 있었는데……. 이제 누구를 시켜야 하나. 귀찮게 됐네.”
치료사는 투덜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고 멍하니 있는 그녀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자신이 방금 이 젊은 여자에게 시한부 삶을 선고했다는 자각조차 없는지, 그녀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 따위는 조금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아직 살아 숨 쉬고 있는 그녀의 죽음을 기정사실이라 말하는 것처럼, 그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는 말려 놓은 약초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로제는 창백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다가 뒤늦게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저를 보지도 않는 치료사를 향해 공손히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몸을 돌렸다.
치료사의 집에서 나오자마자 서늘한 바람이 얇은 옷 사이로 파고들었다.
“콜록!”
로제가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에 한 손으로 옷 앞섶을 움켜쥔 채 다른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기침을 했다.
일단 시작된 기침은 쉽게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기침을 하며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향한 곳은 마을 외곽에 위치한 집이었다. 아니, 집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낡고 허름한 움막이었다. 하지만 로제가 몸을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한때는 진짜 ‘집’이었던 곳이기도 했다.
“콜록, 콜록!”
로제는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을 닫고 연이어 기침을 했다. 그제야 조금 진정이 된 건지 더 이상 기침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뗀 뒤, 우두커니 서서 집 안을 둘러보았다.
촛불도 켜지 않은 집 내부는 밤인 것처럼 어두컴컴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환한 햇살이 내리쬐는데 말이다.
고작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로제의 뺨을 타고 눈물이 다시 한번 흘러내렸다. 그녀는 마치 줄 끊어진 인형처럼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울음이 새어 나왔다.
“……헤이번.”
울음 사이로 누군가의 이름이 나왔다. 그를 떠나보낸 뒤, 몇 년이 흐른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던 이름이었다.
“흐흑, ……아가야.”
그리고 이름조차 지어주지 못한 채 함께 떠나보내야 했던, 제 아기를 불렀다.
지금은 혼자이지만, 로제에게도 한때 가족이 있었다. 평생 가족을 갖게 될 거라 꿈조차 꾸지 못했던 그녀에게 다가온 한 남자가 있었고, 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도 있었다.
축복처럼 다가온 이들이었다. 부모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자란 로제로서는 ‘첫’ 가족이었다.
그들과 함께 평생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욕심을 부린 탓일까.
제 주제에 너무나 과한 욕심을 품어서, 그래서 자신에게서 그들을 빼앗아간 것일까.
「감히 대공 전하를 욕심내다니!」
몰랐다. 헤이번, 그 남자가 대공이라는 걸. 그토록 대단한 신분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자신에게는 그저 한없이 다정하고 따뜻했던, 평범한 남자였을 뿐이었으니.
「너처럼 천한 것이 품을 수 없는 분이다. 장차 이 나라, 괸터스의 왕이 되실 분이니.」
로제가 살아온 마을은 왕국 내에서도 국경 지대에 위치한 시골이었다. 다른 지역에서 마을로 오는 사람도 극히 드물었고, 그런 까닭에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도 어두웠다.
그래서 국왕이 죽은 것도, 그가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사실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또한 선왕이 후계를 낳지 못한 상태로 죽은 경우에 선왕비를 아내로 맞이하는 왕족이 다음 왕이 된다는 내용의 법이 있다는 것도 몰랐고, 그 법률 규정을 들먹여 방계 왕족들까지 저마다 왕위를 노리느라 현재 왕실의 다툼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점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공 전하의 곁에 네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느냐? 네 하찮은 욕심 때문에 전하께서 정적들에게 공격 받아도 괜찮다는 것이냐?」
「하, 하지만 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저를 향해 쏟아지는 경멸과 비난의 말들을 반박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저 왕실에서 왔다는 이들 앞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린 채 몸을 떠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쯤 해 두게.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정도로 말하였으면 알아들었겠지.」
그 순간, 다가온 여인은 아름답고 기품 있었다. 헤이번의 형수이자 죽은 왕의 아내였던, 선왕비였다.
「고개를 들어보려무나.」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선왕비가 제 턱을 들어 올렸던 순간을.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녀와 마주했던 그 짧은 순간을.
붉은 머리에 금색 눈을 지닌 여인의 외모는 화려했다. 지저분하고 초라한 제 모습과는 달리.
「이것을 대공 전하가 드시는 차에 타도록 해라.」
선왕비가 건넨 건 투명한 액체가 들어 있는 작은 병이었다.
「그럼 네가 낳은 아기는, 왕의 고귀한 핏줄로서 모든 것을 누리며 살게 될 테니까.」
“……미안해요.”
‘미안해요, 헤이번.’
당시를 떠올리던 로제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바닥에 동그란 자국을 남겼다. 그녀는 웅크리고 앉은 채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그를 위해서, 라고 핑계를 댔다. 저와는 달리 고귀한 사람이니까. 왕이 되어야 할 사람이니까.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니까.
그런 이유를 끊임없이 가져다 대며 헤이번이 마시는 차에 선왕비가 준 약을 탔다.
그것을 먹는 순간, 그의 기억 속에서 제 존재가 사라질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로제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계속 운 탓에 그녀의 눈이 부어 있었다.
그녀는 집 안을 둘러보았다. 사랑하는 남자와 아기가 함께 있었을 때, 그때는 이곳이 제게 ‘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그들을 떠나보낸 뒤, 단 한 순간도 이곳이 집이었던 적이 없었다.
“……보고 싶어.”
그녀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눈물로 젖은 얼굴이 처연했다.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어.”
사랑했던 남자. 그리고 훌쩍 커버렸을 그와 자신의 아기.
로제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그녀는 입술을 앙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무릎 위에 올렸던 손을 꽉 오므려 쥐었다.
끝까지 이기적인 제 모습이 추악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걸. 죽기 전 소원이니까, 너무 욕심 부린다고 화내지 말아요.”
그녀는 일그러진 입가를 문지르며 변명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 *
그날 밤, 로제는 곧바로 마을을 떠났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그녀가 어디로 간 것인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아니, 애당초 그녀가 떠났다는 걸 곧바로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다만 마을의 치료사가 두어 달 뒤에 그 소식을 듣고 이해 못 할 말을 중얼댔을 뿐.
죽을 자리를 찾으러 갔나 보네, 라고.
1
낡은 옷차림으로 걷는 여인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 하지만 아무도 여인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피하기까지 했다.
미친 여자. 혹은 거지.
사람들이 생각하는 여인의 정체는 둘 중 하나였다.
사실, 그 추측을 아예 잘못된 것이라 말할 수는 없었다. 괸터스 왕국의 수도인 테라벤 시에서 그녀와 같은 몰골을 하고 있는 사람은 거지나 광인일 확률이 매우 높았으니 말이다.
수도의 화려한 번화가.
그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귀족이든 평민이든, 그 신분을 가리지 않고 부유했다. 왕국의 모든 물자가 모여드는 곳이고, 경제의 중심지이기에 그러했다.
그렇기에 비틀거리는 여인, 로제의 모습은 더욱 이질적이었다.
“이봐, 비켜!”
바로 그때,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덜컹대며 달려오는 마차 소리가 들렸다. 로제는 오랫동안 걸은 탓에 발이 죄다 짓물러 느릿느릿 걷다가 등 뒤에서 들린 소리에 몸을 돌렸다.
갈색 말이 끄는 마차 한 대가 엄청난 속도로 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말이 그녀를 짓뭉개고 지나갈 터였다.
로제는 황급히 마차를 피해 뒷걸음질을 쳤다.
“앗!”
그러나 수도까지 오는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하고 쉬지도 못해 잔뜩 지친 몸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녀는 비틀거리다가 이내 길바닥 위에 쓰러졌다.
“히이잉!”
“비키라고 했잖아! 재수 없게!”
마부가 짜증스럽게 고함을 지르고는 다시 말을 몰고 떠나갔다. 로제는 가까스로 말에 치이는 사고를 면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마차가 몰고 온 흙먼지를 들이마시는 바람에 곧바로 기침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콜록! 콜록!”
가슴이 타는 듯한 통증에 로제의 창백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목 아래쪽을 감싸 쥐며 그대로 길 위에 엎드려 몸을 웅크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사람들이 전염병 환자라도 본 것처럼 인상을 쓰더니 이내 로제에게서 거리를 두고 지나갔다.
“……흐윽.”
로제는 기침이 가라앉고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먼지를 뒤집어쓴 다갈색 머리칼 몇 가닥이 핏기 없는 뺨 위로 흘러내렸다.
그녀가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며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서려는 순간, 멀리서 뿔피리 소리가 들렸다.
“대공 전하께서 행차하시니 모두 예를 갖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