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이로써 영광스러운 아나이스 제국의 어버이시자…….’
남부마저 손을 들자 아나이스 제국의 첫 번째 여제가 탄생하는 걸 막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글로리아는 아비의 사후가 1년이 되기 전에 황금 권좌에 앉아 관을 쓰고 홀을 들었다.
‘황제 폐하 만세. 아나이스를 다스리소서.’
‘황제 폐하 만세. 아나이스를 다스리소서.’
‘황제 폐하 만세. 아나이스를 다스리소서.’
아나이스 제국 전역에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정치, 사회, 문화는 물론이요, 사소한 일상에도 파고든 변화가 제국을 활기차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러한 움직임과 동떨어진 곳도 있었으니 북부 세르펜스 성 본채, 그곳만은 세상사와 무관하다는 듯 고요와 평온만이 감돌았다.
* * *
새 황제가 선 지 몇 달이 지났다.
계절이 한차례 지나가고 다시 겨울이 왔다. 북부의 겨울답게 밖에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눈은 건물 밖 입구와 길을 제외하고 가득 쌓여 밖의 소리를 차단했다.
“헤레이스.”
이즈카엘이 밖을 보는 아내를 불렀다. 헤레이스가 못 들은 척 뒤돌아보지 않은 채 시무룩한 얼굴로 창밖만을 바라봤다. 귀여운 아내의 모습에 이즈카엘이 미소를 지으며 아내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 있어?”
이즈카엘이 선 채로 아내를 살짝 껴안은 채 그녀의 머리에 입맞춤했다. 아내를 보는 순간마다, 아내와 닿는 자리마다 열감과 함께 끔찍한 고통이 따랐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너무도 천연덕스러워 헤레이스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 채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밖에 나가고 싶은데…… 당신이 안 된다 했잖아요.”
“눈이 너무 많이 와. 날씨도 지나치게 춥고. 그러잖아도 얼마 전에 감기를 앓았잖아. 또 감기라도 앓게 되면 어떡해.”
“…….”
“……당신이 아프면 견디기가 힘들어. 그러니까 조금 따뜻해지면 나가자.”
이즈카엘이 아내의 옆에 앉아 그녀를 들어 제 무릎 위에 앉혔다. 그제야 헤레이스가 이즈카엘을 돌아봤다. 그녀가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이즈카엘의 가슴에 머리를 댔다. 닿는 자리가 넓어지자 이즈카엘은 순간 참지 못하고 입 안을 세게 물었다.
“저번에도 결국 다 나았는걸.”
“…….”
“그래도 당신이 그렇게까지 걱정하니까…… 나가지는 않을게요.”
입 안에서 비릿한 맛이 났다. 이즈카엘은 침과 함께 그것을 삼키며 아내를 내려다봤다. 눈을 감고 그에게 안겨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아직 사라지지 못한 우울감이 남아 있었다. 이즈카엘은 눈을 파내는 듯한 고통보다 아내의 얼굴에 자리한 우울감이 더 괴로웠다.
“그것 말고도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어?”
이즈카엘의 물음에 헤레이스가 잠시 고민하다 눈을 위로 치켜떠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즈카엘, 나는 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까요?”
“…….”
“사고가 있었다 해도 모든 기억을 한순간에 잊는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
“벌써 1년이 훌쩍 지났는데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헤레이스는 지난 1년 동안 무엇이라도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하나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그녀의 머릿속은 원래 새하얀 백지였던 것처럼 무엇도 그려 내지 못했다. 헤레이스는 그게 못내 답답했다.
물론 그렇다 해서 못 견딜 만치 힘든 건 아니었다. 가끔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지금 당장 자신을 안고 있는 사내 덕에 견딜 만했다.
‘……누구세요?’
‘…….’
‘그리고 난…… 누구예요?’
‘……당신은 헤레이스. 내 아내야.’
자신을 그녀의 남편이라 소개한 이. 기억에는 없었지만 헤레이스는 이즈카엘만은 믿을 수 있었다.
“그래도 내가 당신을 사랑한 사실 하나만은 이제 확신할 수 있어요.”
그녀가 손을 뻗어 남편의 얼굴을 쓸었다. 그녀의 손이 닿자 사내가 움찔거렸다. 그 반응에 헤레이스가 배시시 웃었다. 그는 그녀가 저를 만질 때마다 부끄러워 그런 거라 했다.
“처음 일어났을 때도, 지금도…… 당신만 보면 심장이 이렇게 뛰는걸.”
헤레이스가 이즈카엘의 손을 붙잡아 제 가슴 위로 가져갔다. 처음에는 너무 빨리 뛰는 심장이 두렵기도 했지만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사람에게만 이리 반응하는 제 심장은 분명 사랑을 알려 주는 것이리라.
사내는 그녀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녀의 온기를 느끼며 이해 못 할 얼굴을 하고 있을 뿐. 그러나 도통 어떤 표정인지 감을 잡지는 못해도 하나만은 확실했다.
이즈카엘.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사랑했다.
헤레이스가 입술을 내밀었다. 그러자 이즈카엘이 자연스레 그녀에게 입맞춤했다. 두 사람이 나누는 환희는 같았다. 다만 한 사람은 거기에 더해 타는 듯한 괴로움도 함께 느낄 뿐이었다.
습하고 긴 입맞춤이 끝나자 헤레이스가 이즈카엘의 왼쪽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늦은 밤에도 느꼈지만 간혹 남편의 왼쪽 눈이 기이하게 빛난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이상하단 말이야. 손도 왼쪽이 항상 더 차가운 느낌이고…….’
방금 입을 맞추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살짝 눈을 떴을 때 남편의 왼쪽 눈은 오른쪽과 달리 일렁이고 있었다.
“헤레이스, 그만. 간지러워.”
그녀가 계속해서 눈두덩을 건드리자 이즈카엘이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그리고 자연스레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헤레이스가 저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 남편의 수려한 옆얼굴을 구경하다 그의 손아귀에서 손을 빼냈다. 그리고 양손으로 남편의 얼굴을 틀어쥔 채 멋대로 내려 부족한 입맞춤을 이어 갔다.
“……이즈카엘, 나 궁금한 게 있어요.”
또 한 번의 입맞춤이 끝나자 헤레이스가 뜨거운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녀에게 얼굴을 잡힌 이즈카엘이 말해 보라는 듯 무언으로 답했다. 헤레이스가 남편의 얼굴을 놓고 손을 제 배 위에 올린 채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침실을 함께 사용하면서 자연스레 궁금해진 주제였다. 분명 전에도 그와 함께 온기와 숨을 나눴을 텐데. 그렇다면…….
“당신 말대로면 우리 결혼한 지 꽤 됐잖아요. 그런데 그동안 아이는 없었……, 아?”
헤레이스가 말을 하다 멈췄다. 눈 밑을 가로질러 무언가 뺨을 적셨다. 그녀가 손을 들어 제 뺨에 묻어난 것을 손가락으로 닦아 냈다.
“헤레이스.”
이즈카엘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눈물에 당황한 헤레이스는 그의 표정이 어떻게 일그러졌는지도 모른 채 제 얼굴만 더듬거렸다.
“아…… 내가 왜 이러지. 왜…… 아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헤레이스의 혼란이 가중되자 이즈카엘의 왼쪽 금안이 번뜩였다. 사내가 꼭 다른 사람처럼 얼굴을 굳혔다.
이지가 사라지고 평온이 찾아들었다. 사내의 품 안 여인이 깊은 수마에 몸을 늘어뜨렸다.
* * *
헤레이스는 간만에 꿈을 꿨다. 아주 차가운 어느 물속에 잠기는…… 악몽에 가까운 꿈이었다.
물은 차가웠지만 몸은 따스했다. 헤레이스는 제 품에 안겨 있는 존재가 온기를 나눠 주고 있음을 깨닫고 수중임에도 눈을 떠 품 안을 바라봤다.
작은 파랑새가 그녀의 품에 있었다. 그녀의 눈과 같은 색의 깃털이 물속에서도 선명했다.
헤레이스가 손을 올려 파랑새를 쓰다듬었다. 품 안의 작은 생명체를 보는 순간, 마음이 미어질 것 같았다. 심장이 조이듯 아프고 눈물이 끝없이 났다.
파랑새는 그 동그란 눈으로 헤레이스를 빤히 마주 보기만 했다. 그러다 그녀의 눈물이 물을 파고들어 제 깃털에 닿자 날개를 펴더니 그녀의 품을 벗어났다.
날갯짓하는 파랑새의 주변으로 물보라가 일었다. 하얀 거품이 파랑새를 휘감더니 한순간에 빛이 되었다.
헤레이스는 눈이 부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파랑새는 사라지고 작은 아이가 보였다.
헤레이스와 꼭 닮은 검은 머리에 푸른 눈. 그녀가 아이에게 손을 뻗으며 무어라 외쳤으나 그 외침이 무엇이었는지는 헤레이스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빛무리에 삼켜진 아이가 그녀의 품에 안겨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이의 속삭임을 미처 다 듣기도 전…….
‘엄마 곧 갈 거야. 그러니까…….’
……헤레이스는 꿈에서 깼다.
* * *
“축하드립니다. 아기씨를 잉태하셨습니다.”
악몽이라 생각했던 것은 태몽이었다. 헤레이스는 악몽에서 깨자마자 의원의 축하를 받았다.
기쁜 소식이었다. 그녀는 모든 불안과 근심을 잊은 채 남편을 꼭 껴안고 여기저기 입맞춤했다. 의원이 그녀의 과한 애정 행각에 헛기침을 하며 물러났다.
“……축하해. 그리고 고마워, 헤레이스.”
의원이 문을 닫고 나가자 방 안에는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소리만 났다. 몸을 굳히고 있던 이즈카엘이 한참 만에 제게 안긴 헤레이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헤레이스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느라 남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하나 그의 목소리와 손이 떨리는 것을 보고 헤레이스는 그가 기뻐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바깥은 그새 눈이 그쳤다. 이제 조금 있으면 쌓인 눈이 녹겠지. 그리고 계절이 지나 다시 겨울이 될 때쯤이면 아이가 태어날 것이다.
헤레이스가 머릿속으로 아이가 태어날 계절을 그릴 때였다. 부부가 머무는 침실 창가에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헤레이스의 눈과 같은 빛깔의 깃털……. 창틀에 앉은 파랑새는 꿈에서 본 것과 같았다. 그녀가 파랑새를 유심히 살피다 저도 모르게 목에 맺혀 있던 이름을 중얼거렸다.
“에르젠.”
헤레이스의 머리를 더듬던 이즈카엘의 손이 순간 멈췄으나 그것도 잠시, 그는 알았다며 나지막이 답을 하고 다시 그녀의 머리를 쓸었다. 남편의 허락에 헤레이스가 그의 품을 파고들며 입 안에 맴도는 이름을 재차 불렀다.
“……에르젠.”
아주 흔한 이름이었건만 이상하게 입에 담을 때마다 마음이 어그러졌다. 아프다가도 기뻤고, 슬프다가 환희에 넘치기도 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헤레이스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이즈카엘의 어깨를 적셨다.
이즈카엘은 말없이 아내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나 어느새 그의 목울대도 아내의 흐느낌을 따라 이리저리 울렁였다.
한 사람의 울음은 어느새 두 사람의 오열로 변해 있었다. 기쁜 날 이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너무 기뻐 그런 것이라고 헤레이스는 애써 생각했다.
그녀가 남편의 목을 팔로 더욱 세게 휘감았다. 이즈카엘도 아내의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헤레이스가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에르젠. 우리 아이 이름은 에르젠이에요.”
〈완결〉
By. [Y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