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그가 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었다. 방금 전까지 줄줄 흐르던 피눈물이 그새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거뭇했던 왼쪽 시야는 어느새 멀쩡히 돌아와 아내를 담고 있었다.
온전한 이즈카엘과 달리 그것의 비명은 갈수록 더 커졌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그것의 몸은 빛무리에 먹혀 점차 작아져만 갔다.
「죄 많은 사내야. 네 아내가 살아 있는 동안 네 몸뚱이는 영영 지옥을 헤매리.」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어느 순간 빛이 번쩍했다. 너무도 환한 빛에 이즈카엘이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찰나가 지나고 주변이 달라졌다. 아내의 침실에서 꿇어앉은 자세 그대로 눈을 뜬 이즈카엘이 몸을 일으켜 침대에 누워 있는 헤레이스를 내려다봤다. 살짝 벌어진 입술 새로 가느다랗지만 뜨거운 숨이 새어 나왔다.
이즈카엘이 믿기 어렵다는 듯 아내의 얼굴에 달달 떨리는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누군가가 손에 독이라도 부은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아내를 보고 있는 눈도 마찬가지였다. 타들어 갈 듯 열감이 몰려왔고, 눈에서 시작된 고통에 온몸이 저절로 뒤틀렸다.
“크흑!”
참지 못한 이즈카엘이 눈을 감고 헤레이스에게서 손을 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이즈카엘은 다시 눈을 뜨고 손을 뻗었다. 손이 녹아내리는 듯한 고통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하지만 손바닥 아래에 산 자 특유의 온기가 느껴지자 고통조차 잊을 수 있었다.
“헤, 헤레이스…… 아…… 헤레이스.”
사내의 부름에 답하기라도 하듯 헤레이스가 손가락을 움찔거리더니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곧이어 푸른 눈이 반쯤 드러났다.
아우뉴 호수처럼 맑은 눈에는 어떠한 근심도, 슬픔도 없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낯선 환경에 대한 당혹감뿐. 긴 신음을 흘린 헤레이스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고개를 젖히고 콜록거렸다.
기침과 함께 그녀가 왈칵 물을 뱉어 내자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얼굴에 다가왔다. 다른 이의 존재가 느껴지자 헤레이스가 시선을 돌렸다. 가물거리는 시야로 울고 있는 사내가 들어찼다. 그녀가 사내를 보며 당황스러운 낯을 하다 기침으로 인한 눈물을 훔쳐 냈다.
사내의 손은 이제 그녀에게 거의 닿을 듯이 가까워졌다. 낯선 사내의 손길을 피한 헤레이스가 상체를 일으킨 후 두려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세요?”
에필로그. 파랑새
아나이스 제국이 또다시 시끄러워졌다. 시작은 세르펜스 공작이 보내온 서신에서 비롯됐다.
이즈카엘이 쓴 서신에는 황태자 이안이 머물던 숙소가 무너지는 사고가 났다며, 다른 이들은 모두 죽었으나 다행히 황태자 전하만을 구했다는 말과 함께 사고로 황태자의 신체 일부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황궁에 도착한 황태자는 서신대로 정신이 완전히 나가 있는 데다 다리를 절었다.
‘이 무슨!’
물론 이즈카엘의 말을 누구도 곧잘 믿을 리 없었다. 아니, 사실이라 한들 벌을 피해 갈 수 없었다. 황제는 곧바로 군대를 준비하라 이르며 이즈카엘에게 수도로 오라 명했다. 이즈카엘은 황제의 명에 답을 미루며 침묵했다.
‘북부에 군대를 보내야 합니다!’
‘하지만 세르펜스 공작은 야만인들을 막고 있지 않소. 그러잖아도 전의 반역으로 나라 안 기사가 부족한데…….’
‘황태자께서 저리되셨는데 무슨!’
명백히 반란으로 볼 수 있는 행동이었다. 전운이 제국을 감쌌다. 그러나 출정에 대해 황제가 귀족들을 소집하기도 전, 일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황제가 황태자 이안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 조사를 명하기 전날이었다. 황제는 정부의 침실에서 불현듯 급사했다. 독살이라는 말이 잠시 돌았지만 증거가 없었다. 게다가 황제의 사후, 닥쳐온 혼란에 죽은 이는 만인지상의 신분이 무색하게 잊혔다.
하루아침 비어 버린 황제 위, 그것은 새로운 분란의 시작이었다.
난잡했던 황제에게는 사생아가 지나치게 많았다. 그리고 황후에게는 황태자를 제외하고는 아들이 없었다.
‘황태자께서는 황제 위에 오를 수 없소. 정신이 온전치 못한 자는 황제가 될 수 없는 게 국법이요.’
‘한데 남은 황자가 없잖소. 남은 건 모두 황녀뿐인데…….’
‘황후 폐하 태생이 없는 것뿐이요. 작고하신 황제 폐하의 사생아 중에는 괜찮은 집안의 분들이 몇 계시지. 그분들로 하여금 황제 위를 잇게 하면…….’
‘맞소! 그러고 보니 레넌 공작 가문의 영애가 작고하신 폐하의 아들을 낳았지. 그 아들이 황태자 전하보다 네 살 어렸던가.’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이안은 황제가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황제의 사생아 중 유력한 가문의 출신들이 하나둘 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중 하나는 남부의 레넌 공작가 출신의 어미를 두고 있었기에 아주 노골적으로 황제 위를 탐했다.
‘폐하의 적법한 자녀는 내 아이들뿐이오. 다른 이들은 누구도 감히 황금 권좌를 노리지 못해.’
황후 이젤라는 아나이스 제국 사상 처음으로 황녀를 황제로 내세웠다. 황제의 핏줄이긴 하나, 사생아 중 누구도 황족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니 제 태생의 첫째 황녀 글로리아가 황제 위를 물려받는 게 적법하다는 의견이었다.
황후의 말은 옳았다. 인정받지 못한 사생아는 사생아일 뿐이었으니.
‘황녀께서는 뭐든 잘하시지요. 영리하신 분입니다.’
‘젊은 학자들이 황제가 된 타국의 황녀들을 조사하고 있다지요. 좋은 선례가 될 수도 있다면서요.’
게다가 황후가 내세운 글로리아는 전부터 오라비인 이안보다 뛰어나다며 평을 받던 이였다. 그녀는 어느 방면으로나 오라비를 앞서며 여인임에도 재주를 마음껏 뽐냈다.
‘황녀께서는 훌륭하시지. 하지만 여인이 아닌가. 드레스를 입고 남편의 보필해야 할 여자가 어찌 만인지상의 자리에…….’
‘절대 불가한 일이오! 여자 황제라니! 타국의 사례를 보지 못했소? 여자가 황제가 되면 나라가 100년을 못 간다 하더이다.’
그러나 여자가 황제가 되는 일이 처음인 제국에서 그 주장이 쉬이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당장 남부를 비롯해 몇몇 지역에서 반기를 든 자들이 나타났다.
땅이 나뉘지 않았다뿐이지, 아나이스는 여러 개로 쪼개졌다. 각 지역에서 기사들이 무장을 하고 전국의 대장간에서는 쉴 새 없이 철을 두드렸다. 대장간 열기가 무르익을수록 사람들의 불안도 커져만 갔다.
‘서부의 스펜서 공작가가 남부의 레넌 공작가에 붙었습니다. 그 여식과 혼인을 준비한다 하여…….’
‘원로원에서도 황녀님의 황제 위 즉위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힘듭니다.’
‘동부는 발을 빼고 있습니다. 페가토 후작의 반역으로 군대를 거의 잃은 지역이라…… 게다가 여인이 황제가 된다는 거에 가장 반감이 큰 지역입니다.’
제국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공작가 중 황후와 글로리아에게 도움을 줄 가문은 하나뿐이었다.
‘황후 폐하, 황녀께서 온전히 황금 권좌에 앉을 길은 하나뿐입니다.’
‘…….’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확실하지도 않은 원한 때문에 일을 망칠 수 없는 노릇 아닙니까.’
황후로서도 세르펜스 공작가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내키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글로리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어미에게 속살거렸다.
‘네 오라비가 정신을 차리면 일이 쉬울 텐데.’
‘어머니, 그만 오라버니께 미련 버리세요. 어차피 오라버니는 황제 자리에 맞지 않았어요. 아시잖아요. 이안 오라버니가 시종과 시녀를 몇이나 죽였는지. 그런 사람이 황제가 되면 이 제국은 무너질 뿐이에요.’
‘글로리아…….’
‘이게 옳은 길이에요. 아버지는 지금과 같은 혼란을 초래하더라도 절 후계자로 택하셨어야 해요.’
‘…….’
‘전 이 어려움을 이기고 아버지 정도는 가볍게 넘길 훌륭한 황제가 될 거예요. 그러니 어머니, 절 도와주세요. 네?’
결국 황후는 세르펜스 공작가에게 서신을 띄웠다. 황궁에서는 두 마리의 전서구가 북부로 향했다. 같은 날 두 통의 서신을 받은 이즈카엘은 황후와 첫째 황녀에게 따로 답을 했다.
서신이 몇 번 오가고 글로리아가 오라비의 일로 형식적인 조사차 북부에 다녀갔다. 그리고 이안의 일은 사고로 마무리됐다.
‘역시나 예상대로 사고일 뿐이었군. 고생했소, 공작. 황족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죄로 벌금은 좀 물어야겠지만 그 이상 그대에게 죄를 묻는 일은 없을 거요.’
‘먼저 서신을 주셔 감사합니다. 그때는 다들 절 반역자로 볼 때라 위험이 많았을 텐데요.’
‘오히려 내가 더 고맙지. 공작 그대가 시일을 앞당겨 준 셈이니까.’
‘…….’
‘내 오라비는 적당히 한적한 시골에서 지내다 조금 이른 죽음을 맞이할 거요. 더는 사람도 함부로 죽일 수 없겠지.’
‘언제부터 생각하신 일입니까?’
‘오래전부터.’
‘…….’
‘항상 여인이라는 이유로 오라비에게 숙이는 게 싫었소. 나도 황제가 되고 싶었지. 하나 참았어. 아비도, 어미도 난 결혼해 누군가의 부인이 되는 게 옳은 길이라 가르쳤으니까. 부모의 가르침이 옳다 여겼지.’
‘그런데 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다만, 사실 오라비 손에 가장 먼저 죽은 시종이 내 연인이었소. 어릴 적부터 우리는 서로를 마음에 품고 있었지. 그와 결혼만 할 수 있다면 부모의 말대로 드레스를 입고 평생을 누군가의 아내로 살아도 좋다 여겼어.’
‘…….’
‘그 사람이 죽고 나니 알겠더군. 오라비는 황제가 돼서는 안 된다는 걸. 물론 그렇다고 아비의 많은 사생아 중 하나에게 나라가 넘어가는 꼴도 볼 수는 없었지.’
‘…….’
‘복수심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니오. 난 연인의 죽음으로 크게 깨우쳤을 뿐이야. 적법한 피와 능력을 모두 가진 건 나뿐이라고. 자격 없는 이들은 죽어서라도 물러나야지.’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황녀 전하께서는 훌륭한 황제가 되실 겁니다.’
세르펜스 공작가를 등에 업은 글로리아는 하나둘 정적들을 무찌르거나 설득해 나갔다. 남부의 레넌 공작가가 끝내 그녀에게 반기를 들어 전쟁이 일어났으나 그는 3개월이 가기도 전 마무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