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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105화 (105/108)

105화.

눈밭에서 뛰놀던 아이가 생각났다. 헤레이스가 품에 안은 에르젠을 꼭 껴안았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냉기 속에서 벗어난 아이의 시신은 곧 있으면 부패가 시작될 터였다.

에르젠의 얼굴에 여러 번 입맞춤한 헤레이스가 아이를 안은 채 일어났다. 그녀가 질척이는 땅을 밟고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얼마 움직이지도 않았건만 발이 물에 닿았다. 거기서 한 발 더 내딛자 곧 발목까지 물이 차올랐다.

해가 져 어두컴컴해진 호수에는 바람이 제법 세게 불고 있었다. 덕분에 호수 물은 가을임을 감안해도 차가웠다. 헤레이스는 시리다 못해 감각이 사라지는 듯한 발에 입술을 깨물면서도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어느새 그녀의 허리까지 물이 찼다. 급격히 떨어진 체온에 헤레이스의 얼굴은 이미 파랗게 변한 후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녀는 아들을 높이 들어 올려 최대한 물에 닿지 않게 했다.

시린 물이 계속해서 옆구리를 때리자 헤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이즈카엘을 떠올렸다. 제게 옆구리를 뚫린 그는 마지막 순간에 무릎을 꿇은 채 그녀에게 무어라 애원하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우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이즈카엘은 제 꼴이 얼마나 흉한지도 모른 채 그녀의 발치에 조아리고 피를 흘리며 울었다. 그러나 헤레이스는 그가 하는 애원을 듣지 못했다. 아니,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내 소중한 사람들을 모조리 죽인 괴물이야.’

헤레이스는 오라비와 안나의 죽음 직후 막 꿈에서 헤어 나온 참이었다. 두 사람을 직접 죽인 건 이즈카엘이 아니었으나,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건 그였다. 기억을 잃은 와중임에도 헤레이스는 분명히 말했다. 오라비를 데려오는 것이 위험하지 않겠냐고.

그럼에도 그는 오라비와 안나를 데리고 오려 했다. 그녀를 위해서라 말했지만 헤레이스는 그가 언제고 기억을 되찾을 그녀를 붙잡기 위해 그들을 이용하려 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샤를……. 샤를에게 미안하다 말하던 이즈카엘. 헤레이스는 그가 샤를 또한 죽였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 사람은 악마야. 대번에 목숨을 끊었어야 했는데.”

오라비와 안나, 그리고 샤를을 생각하자 그를 좀 더 깊숙이 검을 찌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 목숨을 끊어 버렸어야 했는데. 죽어 간 이들을 생각하면 사라졌던 증오가 다시금 솟았다. 하지만 왜 계속…….

‘살았을까?’

……그 사람의 생사가 궁금한 걸까.

더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려던 헤레이스는 잠시 멈춰 이즈카엘의 죽음을 상상해 봤다.

그는 그것에게 제 죽음을 듣고 죽었을까? 아니면 듣지 못한 채 죽었을까? 혹은…… 그 상처에도 살아 있을까? 질문에 답은커녕, 장면조차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헤레이스는 지금의 상황에서도 그의 죽음조차 상상하지 못하는 자신이 우스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멍청한 것. 바보 같은 계집.”

죽음을 앞둔 헤레이스가 살면서 처음으로 저열한 욕설을 입에 담았다. 고개를 저은 그녀가 빠르게 물속을 헤쳤다. 그러나 물이 가슴 위로 차올랐을 때 무언가 그녀를 막아 세웠다. 앞을 보니 늙은 어부가 배 위에서 노를 뻗어 그녀를 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노인장께서는…….”

헤레이스가 놀란 얼굴을 했다. 그때 짐작이 맞는다면 저 노인은…….

“놀라기는…… 그때 보고 알았을 거 아니오. 내가 산 자가 아님을. 부인이 옳게 보았소. 난 호수를 떠도는 망자라오.”

헤레이스의 생각을 읽었는지 노어부가 경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엄숙한 얼굴을 한 채 헤레이스 쪽으로 노를 더 깊이 내밀었다.

“망자인 난 이 이상 그대를 막을 수 없소. 하지만 간절히 부탁하는데 그만 뭍으로 돌아가시오. 난 부인 같은 이가 호수에 가라앉는 걸 두고 볼 수 없다오.”

“…….”

“아우뉴 호수에 가라앉아 떠오르지 못한 자들은 나처럼 기억 속에서 헤매며 영영 호수를 떠돈다오. 아이는 이미 떠났으니 상관없지. 하지만 그대의 슬픔은 너무 크고 무거워. 한번 빠지면 영영 떠오르지 못할 거요.”

내 딸 에르나처럼. 말의 끝이 형용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 있었으나 노어부의 말에도 헤레이스는 꿈쩍하지 않았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비켜 달라 말하자 노어부가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기는 잔인한 곳이요. 나는 그나마 배가 있지만…… 여기 가라앉은 다른 이들이 어찌 되었는지 아시오? 아우뉴 호수 바닥에 누워 차가운 물에 매 순간 고통받고 있다오. 여신께서도 호수 밑바닥은 보지 못해. 여기는 맑은 카르베나 마찬가지요.”

“……잘됐네요.”

“부인…….”

“그게 제가 원하던 거예요.”

노어부가 헤레이스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고개를 저었지만 그녀는 완강했다. 헤레이스가 노어부의 노를 밀어내고 한 발 더 물속으로 들어갔다.

곧 헤레이스의 빗장뼈까지 물이 차올랐다. 에르젠 또한 물에 잠기는 것도 이제는 막을 수 없었다.

배는 이제 헤레이스의 옆에 있었다. 노어부가 손을 뻗어 헤레이스를 막아 보려 했지만 노와 달리 그의 손은 헤레이스를 통과했다.

노어부가 배 위에서 안타까운 얼굴로 발을 구르던 순간이었다. 노어부의 시야에 무언가 들어왔다. 저만치 떨어진 뭍에서 사내가 두리번거리며 몸을 끌고 있었다.

그가 망설임 없이 노를 저었다. 그리고 동시에 헤레이스의 몸이 완전히 호수에 잠겼다.

* * *

“타시오.”

노어부는 헤레이스를 찾아 물안개가 짙은 뭍가를 헤매던 이즈카엘의 앞에 갑자기 나타났다. 제정신이 아닌 이즈카엘은 그를 이상하게 생각지도 않은 채 무시하고 지나쳤다. 노어부가 그런 그를 보며 일갈하듯 말했다.

“기사 나으리, 당신이 안타까워 도와주는 게 아니오. 영영 이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부인이 가여워 그런 거지.”

어부의 말을 듣는 순간 이즈카엘은 본능적으로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내와 딸을 잃고 그 뒤를 따른 노어부…… 그 한심하고 어리석은 작자의 이야기를.

이즈카엘은 대꾸 없이 곧바로 배에 올랐다. 노어부도 답을 바란 것은 아닌지 이즈카엘이 배에 오르기 무섭게 노로 힘차게 물가를 밀 뿐이었다.

배는 어느 때보다 빠르게 물살을 갈랐다. 이즈카엘은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배 가장 끝에 주저앉아 호수를 샅샅이 살폈다.

바람조차 불지 않아 잔잔한 호수는 그에게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았다. 해는 이제 거의 다 떨어져 호수 너머 지평선 끝만을 겨우 비출 뿐이었다. 노어부는 그 한 줌 남은 빛을 등지고 계속해서 노를 젓고 또 저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어부가 깊은 한숨과 함께 노 젓기를 멈췄다.

아우뉴 호수는 수심이 서서히 깊어지는 지형이 아니었다. 거대한 호수는 그 깊이가 제멋대로로, 뭍만큼이나 얕은 곳에서 갑자기 절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어느 순간 급격히 물이 깊어졌다.

당장 배가 멈춘 곳도 그 부근이었다. 조금 앞에 있는 호수의 빛깔은 급격한 수심 변화로 그림자가 잔뜩 져 가장자리와 비교하면 훨씬 어두웠다. 이즈카엘이 뒤를 돌아봤다. 왜 더 가지 않느냐고 소리치기 위해서였다.

노어부는 이즈카엘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눈물을 흘린 채 조금 떨어진 어느 지점을 바라봤다. 무언가 예감한 듯 이즈카엘이 노어부의 시선을 좇았다. 그러자 수면 가까운 물속에서 희뿌연 무언가가 아래로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언뜻 올라오는 물방울에 눈을 부릅뜬 이즈카엘이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컴컴한 호수로 몸을 던졌다.

첨벙.

물이 튀며 반동으로 배가 기우뚱 흔들렸다. 그러나 노인은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사내가 사라진 물속을 봤다.

“……이미 늦었구려.”

노어부가 회한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손에서 노를 툭 놓았다. 노가 떨어지며 덜그럭 소리를 냈다. 그리고 동시에 노어부의 형체가 스르르 안개처럼 사라졌다.

* * *

‘헤레이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흐릿했던 형체가 뚜렷해졌다. 아내를 알아본 이즈카엘이 아래로 빠르게 헤엄치기 시작했다.

움직임이 느린 물속임에도 아내는 어찌나 빠르게 추락하는지, 하늘거리는 드레스 자락을 붙잡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즈카엘이 호수의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그녀를 건지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물속을 갈랐다.

그의 옆구리가 벌어지며 피가 물에 섞여들었다. 헤엄으로 만들어진 물살이 덜렁거리는 피부를 거침없이 때렸다. 하나 이즈카엘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팔다리를 더욱 세차게 움직일 뿐이었다.

‘헤레이스.’

마침내 그의 손에 헤레이스가 닿았다. 그녀는 이미 의식을 잃었는지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그 와중에도 아이를, 에르젠을 붙잡고 있었다. 힘 빠진 양손의 손가락들이 간신히 얽혀 있었다.

그렇다 해도 아이가 아내의 품에서 유실되지 않음은 기이한 일이었다. 자세히 보니 얇은 허리끈이 아내와 아이의 허리를 연결하고 있었다. 아내에게 아이가 어떤 의미인지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즈카엘이 눈동자를 잘게 떨다 이를 악물고 두 사람을 낚아챘다. 그리고 위를 향해 빠르게 헤엄치기 시작했다.

그의 품에 들어온 아내의 몸은 에르젠처럼 차가웠다. 이즈카엘은 물속에 있어 그런 것이라고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수면 위로 나가기만 하면, 뭍에 아내를 뉘기만 하면 해결되리라. 그리 믿었다.

수면이 보이자 그는 아내부터 위로 밀어 올렸다. 가까운 곳에 타고 온 배가 보였다. 노어부의 행방이 사라진 것 따위는 이즈카엘의 안중에 있지도 않았다. 그는 헤레이스와 에르젠을 배 위에 먼저 올린 뒤, 헤엄으로 달궈진 몸을 배에 태웠다.

“헤레이스!”

배의 바닥에 손이 닿자마자 그가 아내의 곁으로 구르듯 다가갔다. 그러나 이미 아우뉴 호수에 영혼을 가라앉힌 헤레이스가 그 부름에 답할 리 없었다.

“헤레이스! 헤레이스! 제발…… 헤레이스!”

폐가 타들어 갈 듯 숨을 불어 넣어도, 천을 찢고 가슴을 수없이 눌러도 아내는 깨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차가워지기만 하는 몸에 이즈카엘은 그녀를 붙잡고 하염없이 같은 행동만 반복할 뿐이었다.

“헤레이스! 제발…… 헤레이스!”

그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엉망이었다. 아내를 붙잡은 그가 숨을 흘려 넣거나 아내의 가슴께에 두 손을 포개 올릴 때마다 호수 위에 뜬 배가 출렁였다.

하늘은 그의 심경처럼 까맣게 변했다. 당장에라도 떨어질 듯 반짝이는 수만 개의 별만 아니라면 호수와 하늘을 구분하기도 어려우리라.

주변이 어둠 속에 잠기자 헤레이스의 창백한 얼굴이 더 도드라졌다. 눈을 꼭 감고 있는 그녀는 산 자만이 가지는 온기도, 숨결도 더는 갖추고 있지 않았다. 남은 것은 가까스로 찾은 평온함에 미소를 짓는 얼굴과, 얼음장 같은 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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