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성 지하에 발걸음 소리가 요란했다. 그것은 조금 전 모자가 있었던 얼음 위에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가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헤레이스!”
사내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옆구리를 움켜쥔 채 쩔뚝거리는 몸은 서 있기도 힘든지 휘청였으며, 얼굴은 핏기가 아예 가셔 회색빛이었다.
사내가 홀로 있는 그것을 발견하고는 이를 악문 채 다가왔다. 그것의 얼굴도 사내와 마찬가지로 잿빛이었다. 하나 헤레이스의 행방을 아는 그것의 얼굴에는 사내와 같은 초조함은 없었다.
대신 그것의 얼굴에는 복수를 이뤘다는 환희과 어떤 후회가 번갈아 가며 떠오르고 있었다.
이즈카엘이 그것의 표정에서 불길함을 읽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헤레이스…… 헤레이스는 어디 갔지?”
한 걸음 더 가까이 온 이즈카엘에게서는 독한 약초 냄새가 났다. 그것이 이즈카엘의 옆구리를 힐끔 봤다. 피에 젖은 셔츠 아래 짓이겨 뭉쳐 놓은 약초와 감다 만 붕대가 보였다. 잠깐 혼절한 사이 누군가 재빠르게 치료라도 한 모양새였다.
그렇다 해도 보통이라면 진즉 죽고도 남을 상처였다. 그것이 조소했다. 그때도 그렇고…… 눈앞의 멍청한 사내는 제 목숨이 경각을 다툴 때마다 살려 달라는 말보다 제 아내를 먼저 찾고는 했다.
그것의 비웃음에도 이즈카엘은 개의치 않았다. 그가 그것의 앞에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는 발치에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했다.
“그녀를 찾게 해 줘. 헤레이스가 어디로 갔는지 알려 줘.”
비참한 사내의 모습에 그것이 입매를 비틀었다. 이제 마지막이다. 그것이 헤레이스에게서 건네받은 칼을 쥐었다. 그리고 이즈카엘을 향해 내질렀다.
“소용없어. 네 그녀는 이미…….”
이 말을 하는 순간을 기다렸다. 네 아내는 널 떠나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갔다. 그런 말을 전하며 사내의 얼굴을 구경할 순간이었다. 그가 그때의 저만큼이나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울부짖기를 기대했다.
“이미…….”
그런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죽었다. 이 짧은 한마디만 꺼내면 되는데…… 당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의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사내가 찾는 여인의 끝이 어떠할지 이미 아는데. 제 손으로 그 끝을 도왔는데……. 도무지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네가 싫어, 이즈카엘.”
말을 멈춘 그것이 방향을 바꿨다. 그것의 날카로운 손톱이 발께에 꿇어앉아 있는 사내의 어깨에 박혔다. 이즈카엘은 신음 한번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는 계속 노예처럼 수그리며 말할 뿐이었다. 아내를 찾게 해 달라.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알려 달라.
그것이 거칠게 손톱을 뽑아 입가에 가져갔다. 비릿한 피 냄새가 손톱 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그것은 평소처럼 피를 맛보지 않았다. 대신 그것은 얼음 위에 떨어지는 핏방울을 증오스럽다는 듯이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네 몸에 핏방울 하나로 있을 때부터 네가 역겨웠어.”
그 얼음 동굴에서 몸이 찢겼을 때가 떠올랐다. 작은 티끌로 목숨을 부지해 메데아의 몸에 들어가던 날. 메데아의 양분을 빨아먹고 크고 있던 이 사내의 몸으로 들어간 날. 그날의 비참함에 그것이 몸을 떨었다.
“네게 기생해 살아가면서도 항상 네 목숨이 꼬꾸라지길 원했어. 이대로 사라져도 상관없을 만치 네가 미웠어. 하지만 곧 알게 됐지. 널 단순하게 죽이는 건 너무 시시하다고.”
메데아의 죽음 이후 그것은 부러 황녀였다는 여자를 자극했다. 그 여자가 내리치는 매에 숨어든 작은 몸이 고통스럽길 원했다. 하지만 단순한 매질은, 인간 여자가 행하는 폭력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리하여 그것은 이즈카엘의 몸에 깃든 욕망을 관찰하며 차근차근 계획을 세웠다.
“난 네가 살아 있는 동안 살이 썩고 피가 마르는 고통을 받길 바랐다. 찢어지는 심장에 울부짖고 매 순간 숨이 막혀 허덕이길 원했어. 그리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어. 네가 욕망하는 건 너무 단순하고 또 간절했으니까.”
계획을 세우는 것이 시시할 정도였다. 그것이 깃들어 있는 사내아이는 곧장 한곳만을 바라봤으니까.
그것은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까지 욕망을 받아먹고 힘을 키우기만 했다. 심지어 기다림조차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제 동생과 결혼한다는 여자를 보는 순간 형체를 갖출 수 있을 만큼의 욕망이 들이찼으니.
“그녀를 차지한 네가 행복에 겨워할 때는 피가 거꾸로 솟을 만치 화가 났다. 목적을 위한 단계임을 알았음에도 네 웃는 낯짝을 가장 가까이서 봐야 하는 게 끔찍했지.”
다만 추락을 위해 잠시 쥐여 준 미끼로 사내가 웃을 때는 모든 걸 그만두고 싶을 정도였다. 어찌나 행복해하던지. 간신히 만든 형체가 분에 끓어 휘발할 것 같았다.
“그래도 인내심을 가진 보람이 있었어. 넌 네 손으로 모든 걸 망쳤으니까. 그걸 가까이서 구경할 때는 어찌나 재미있던지.”
다행히 기다림에 대한 보상은 충분했다. 일은 잘 풀렸다. 몇 번의 속삭임 만에 사내는 스스로 거짓을, 그리고 제 손으로 모든 걸 어그러뜨렸다. 스스로 심장을 난도질하는 것도 모른 채.
“특히 모든 사실을 알려 줬을 때 네 표정은 혼자 구경하기 아까웠어.”
그것이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며 깔깔거렸다. 정말 즐겁다는 듯. 하나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배를 부여잡고 허리까지 숙였던 그것은 웃음을 멈춘 채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왜 더는 우습지 않지? 이 순간이 가장 즐거워야 하는데 왜…….”
웃음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진 상태였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한 그것이 얼음 위에서 다리를 뻗어 이즈카엘의 턱을 들어 올렸다. 차올랐던 환희가 단숨에 무너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끝없는 후회가 높다란 탑이 되어 점차 층수를 높여 갔다.
“네놈의 웃는 낯짝보다 역겨운 게 있을 줄 몰랐어. 지금에 와 가장 끔찍한 건…….”
네 개의 눈이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우는 사내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그리고 한참 만에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즈카엘, 네가 이해된다는 거야.”
마지막 순간, 그 여자가 이 사내와 저를 닮았다고 말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것 자신도 제 앞에 무릎을 꿇은 사내와 저를 분간해 낼 수 없었다.
“네놈과 너무 오랫동안 있었던 탓이겠지. 네 피와 욕망을 너무 양껏 먹었어.”
다 큰 사내처럼 가라앉은 목소리와 함께 그것의 몸이 자라기 시작했다. 꼭 아이의 몸에 어른이 갇혀 있었던 것처럼 척추를 따라 등뼈가 튀어나오고 손과 발이 단숨에 커졌다. 서서히 길어지는 팔다리와 이리저리 꺾이며 소리를 내는 뼈가 기괴했다.
“……인제 와서는 너와 내가 구분되지 않아. 내 앞에 이리 무릎을 꿇고 조아리는 널 보면 애초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헷갈려.”
다 자란 그것은 이즈카엘과 같았다. 몸 군데군데 보이는 비늘과 아직 날카로운 손톱, 그리고 두 쌍의 금안이 아니라면 이즈카엘이라고 해도 모두 속아 넘어갈 정도였다.
그것이 얼음에서 내려왔다. 아이의 몸을 할 때와 달리 발은 이미 바닥에 닿아 있었다. 그것이 이즈카엘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양 무릎을 꿇었다.
“헤레이스를…… 제발…… 뭐든 가져가도 좋으니까.”
이즈카엘은 계속해서 빌고 있었다. 그것이 저와 똑같은 사내를 보며 고통에 일그러진 낯을 했다. 심장이 저며지고 몸이 수천 갈래로 찢어지는 고통이, 불안으로 당장 미쳐 버릴 것 같은 머리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원대로 해 준 걸 후회해.”
“제발…… 헤레이스가 어디 있는지 알려 줘.”
“결과가 어찌 될지 알면서도 보낸 스스로가 원망스러워.”
같은 목소리가 한쪽은 후회하고 한쪽은 애원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즈카엘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이즈카엘의 시야가 일렁이며 주변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니 그녀를 찾아.”
그것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울린다 싶더니, 이즈카엘은 어느새 안개가 자욱하게 핀 호숫가에 발을 딛고 서 있었다.
바로 앞에 끝없이 펼쳐진 호수는 넓고 깊었다. 이즈카엘은 익숙한 풍경에 제가 있는 곳이 아우뉴 호수임을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헤레이스…….”
아내의 눈을 닮은 푸른 호수 어딘가에 아내가 있을 터였다. 이즈카엘이 옆구리를 부여잡고 다리를 끌기 시작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핏방울이 선명히 찍혔다.
“애초 잘못을 말아야지. 뒤늦게 뭐 하는 짓인가.”
호수 위에서 그 모습을 보던 늙은 어부가 혀를 찼다. 그러나 잠시 고민한 어부는 멀리서 무언가를 보고는 일어나 손때 묻은 노를 쥐었다.
배가 저물어 가는 해를 뒤에 두고 호수를 가르며 미끄러졌다.
* * *
헤레이스는 완만한 비탈에 앉아 호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잔잔한 호수는 그 위를 부는 바람에도 큰 일렁임 없이 고여 있었다.
그녀가 호수 위로 떨어지는 낙엽을 보다 흙으로 더러워진 발을 드레스 안으로 숨겼다. 그리고 품 안의 에르젠을 고쳐 안으며 아이를 잉태했을 때를 떠올렸다.
‘아이가 태어나고 조금 자라면 저곳에 함께 가고 싶어.’
그때만 해도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녀를 버겁게 하는 일이 닥쳤지만 그게 배 속 아이와 도망을 생각할 만큼 영향을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랑 너랑 에르젠, 이렇게 우리 셋만 떠날래?’
하지만 상황은 나빠져만 갔고 헤레이스는 에르젠이 태어난 지 백일이 되기 무섭게 성에서 도망쳐 이 호수를 건넜다.
“에르젠, 전에도 엄마랑 여기 온 적 있는데…… 엄마는 그때 너한테 많이 미안했어. 호수를 몰래 건너겠다고 아기인 널 억지로 재웠거든.”
강제로 에르젠을 재우고 호수를 건널 때, 헤레이스는 죽은 듯이 자는 에르젠 때문에 잔뜩 겁을 먹었더랬다. 어찌나 마음이 미어지던지, 당시에는 아이를 키우며 그보다 마음 아픈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도 엄마는 너에게 미안하기만 했어. 로즈베리도 양껏 못 먹이고, 근사한 옷도 못 입혀 주고, 많이 놀아 주지도 못해서…… 부족한 엄마 앞에서 네가 예쁘게 웃을 때마다 미안해서 눈물이 났지.”
물론 그건 착각이었다. 생전 혼자 힘으로 어느 것도 해 본 적 없는 헤레이스는 아이를 키우며 온갖 마음고생을 다 했다. 아이가 잘 먹고 잘 입지 못할 때마다 강제로 재워야 했던 그때만큼, 아니 그때보다 더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에르젠, 엄마는 매일 울더라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우리 에르젠한테 너무 미안했지만 그래도…….”
그러나 그렇다 해도. 그때가 헤레이스에게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하루가 지나면 아이가 커 있는 모습이 신기했다. 그리고 동시에 너무 벅찼다.
“그래도…… 그때가 너무 그리워. 에르젠이 너무 보고 싶어.”